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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기요람(萬機要覽)
만기요람(萬機要覽) 11권은 조선 왕조 제23대 순조왕(純祖王) 8년(1808년)경에 시임(時任) 호조 판서(戶曹判書) 서영보(徐榮輔)와
부제학(副提學) 심상규(沈象奎)가 같이 비국유사당상(備局有司堂上)으로 있으면서 왕명을 받들어 찬진(撰進)한 것이다. 이 책은 재용편(財用篇)
6권과 군정편(軍政篇) 5권으로 되어 있으니, 재용편에는 국가 재정ㆍ경제의 제도와 실정 및 그 운용에 대하여 서술하였고, 군정편에는 국내 군사의
체제와 군정(軍政)을 집행하는 각 기관과 여러 진영(陣營)의 직장(職掌) 기타를 서술하고 아울러 경비조달의 방법을 실었으며, 그때의 상황만 밝힌
것이 아니라 옛날부터 내려온 연혁까지도 대략 밝혀서 전체가 간결하게 요점만 간추려져 있다.
요컨대, 이 책은 그 서명(書名)과 같이
만기(萬機)를 친재(親裁)하는 군주가 일상 정무를 총람(摠攬)하는 데 있어서 항시 좌우에 두고 참고로 하여 비망(備忘)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
책이다. 따라서, 일반 신민(臣民)이 보는 책이라기보다는 통치자인 국왕이 보기 위해서 만들어진 책이다.
이 책 군정편 4(軍政編四)
해방(海防) 동해(東海)에 울릉도와 안용복에 관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한문
원문은 이미지로 올립니다. 직접 한자를 입력하기에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군요. 양해바랍니다. 국역 해석은 서영보(徐榮輔), 심상규(沈象奎)著
만기요람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文獻備考日捕甜酸品在街珍E來梅中與日本之路岫州帕拉E而三學盟章時w平南來稍恥早日清則"車頭樹木丑山祖廿前H酷壓可t且「風恆三日呵ν到.地方巨型飛聾胡華本石輔藤草諸香木蘆肘幸-AH抽君一麗質輯棋大吋v濤一杯升山鍋文如旦去且大卸ι抽E揖中贅,主賦「牛甜甜晶肘無對ER海陸且一λ獨扭扭之過凡幸走λν永.名可之品本于山間國新摧取之種惡毒輯錯電翩-m島本于山國 新羅取之 後恐導倭爲寇 刷出居民 空其地
〈문헌비고 울릉도 사실(文獻備考鬱陵島事實)〉문헌비고(文獻備考)에
이르기를, “울릉도는 울진(蔚珍)에서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고, 일본의 은기주와
가까우며 세 봉우리가 허공에 높이 솟았는데, 남쪽 봉우리가 조금 낮다.
날씨가 맑을 땐 봉우리 위에 있는 수목과 산 밑 모래톱까지도 역력히
보인다. 바람이 순풍이면 이틀이면 갈 수 있다.
땅은 4방이 백 리쯤 되고 시호(柴胡)ㆍ고본(藁本)ㆍ석남(石楠)ㆍ등초(藤草)ㆍ각종
향나무와 범고채[蘆]가 산출되며, 아름드리 대[竹]가 많으며, 범고채
열매[蘆實]와 복숭아씨가 큰 것은 술잔이나 되를 만들 만하다. 산고양이가
개만큼 크고 쥐가 고양이 만하다.
바다 가운데 큰 짐승이 있는데 생김새가
소와 같이 눈동자는 붉고 뿔이 없다. 떼를 지어 해안에 누웠다가 사람이
혼자서 오는 것을 보면 해치는데 대개는 사람을 만나면 흔히 달아나
물속으로 들어간다. 이 섬은 가지도(可之島)로서 본래는 우산국(于山國)이었는데,
신라 때 쳐서 빼앗았다가 뒤에 그들이 왜인들을 끌어들여 도적질을 할까
두려워서 주민들을 모두 육지로 몰아내고 그 땅을 비워두웠다.

高麗太祖庚寅 土頭貢獻 授使白吉爵
以土頭爲正朝 顯宗壬戌 島民被女眞寇掠 逃來者多 處之禮州爲編戶 德宗壬申 島主遣其子夫於仍多郞來貢 仁宗己未 溟州道首倉使李陽實入島 取菓核木葉異常者以獻
毅宗己卯 王聞島中地廣土肥 可以居民 遣溟州首倉金柔立往視 欲復爲縣 回秦云 島有大山 自山頂東距海一萬餘步 西距海一萬三千餘步 南距海一萬五千餘步
北距海一萬餘步 有村落墟七所 破礎尙存 或有石佛·石塔·鐵鍾 地多巖石 人不可居 遂寢其議
고려 태조 13년 경인(930년)에 토착민의
우두머리가 와서 공물을 바치자 그에게 백길(白吉)이란 벼슬을 주고
토착민의 우두머리로 정조(正朝)를 삼았다. 현종(顯宗) 13년 임술(1672년)에
도민(島民)들이 여진 병의 약탈을 당하여 도망해 온 자가 많으므로 이들을
예주(禮州)에 살게 하고 호적에 편입시켰다.
덕종(德宗) 원년 임신(1032년)에
도주(島主)가 그 아들 부어잉다랑(夫於仍多郞)을 보내어 조공하였고,
인종(仁宗) 17년 기미(1139년)에 명주도(溟州道)의 수창사(首倉使) 이
양실(李陽實)이 섬에 들어가 과일[菓]의 씨와 이상한 나뭇잎을 가져와
바쳤다.
의종(毅宗) 13년 기묘(1159년)에
왕은 이 섬이 땅이 넓고 흙이 기름져 백성을 살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명주(溟州)의 수창(首倉)김유립(金柔立)을 보내어 시찰하게 하고 다시
현(縣)으로 만들려고 하였는데, 돌아와 보고하기를, ‘섬 안에 큰 산이
있는데 산꼭대기에서 동쪽으로 바다까지 10,000여 보, 서쪽으로 13,000여
보, 남쪽으로 15,000여 보, 북쪽으로 바다까지가 10,000여 보에 부락의
옛터가 일곱 군데 있어서 깨어진 주춧돌이 남아있으며,ㆍ석탑(石塔)과
철종(鐵鍾) 따위가 있으나 지면에 암석이 많아서 사람이 살 수가 없습니다.’
하였으므로, 드디어 중지하고 말았다.

後崔忠獻 以本島土壤膏沃 多珍木·海錯 遣使移本郡民以實之 後屢爲風濤所盪 舟覆 人多物故 因還其民 高·元之際 本國叛臣李樞等 告于元 以鬱陵島多珍恠之材
元遣使人島 欲伐木以納 上表陳乞 得止 本朝太宗朝 聞流民移多逃入其島 再命 三陟金麟雨爲按撫使 刷出 世宗二十年 遣縣人萬戶南顥
率數百人 往搜逋民 盡俘金丸等七十餘人而來 其地遂空 成宗二年 有告別三峯島者 乃遣朴宗元 往見之 因風濤不得到而還 뒤에 최충헌(崔忠獻)이 이 섬의 토지가
비옥하고 진기한 수목과 해산물이 많다고 하여 사신을 보내어 본군의
주민을 옮기려 하였으나 여러 번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히고 사람이
많이 죽었기 때문에 드디어 그 주민들을 도로 돌려보내고 말았다.
고종(高宗)ㆍ원종(元宗) 때에 본국
반신(叛臣) 이추(李樞) 등이 원 나라에 알리기를, ‘울릉에 진기한 재목이
많다. 하였으므로, 원에서 사람을 보내어 재목을 베어 들이려고 하였는데,
글을 올려 사정하여 중지시켰다. 본조 태종(太宗) 때에 유민(流民)들이
이 섬으로 많이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삼척의 김인량(金獜兩)을 안무사(按撫使)로
임명하여서 두 번이나 데려왔다.
세종(世宗) 20년 현인(縣人)인 만호(萬戶)
남호(南顥)가 수백 명을 거느리고 가서 도망자를 수색하여 김 환(金丸)
등 70여 인을 잡아 모조리 데려온 뒤엔 이 땅은 텅비게 되었다. 성종(成宗)
2년(1471년)에, 누가 말하기를, ‘삼봉도(三峰島)란 섬이 따로 있다.’
하여,

同行一船鬱陵島 只取大竹·大鰒魚
回啓云 島中無居民矣 輿地志云 鬱陵·于山皆于山國地
于山則倭所謂松島也。光海七年 倭差船二隻 謂將探礒竹島形止 且曰 島在慶尙·江原之間
朝廷惡其猥越不許接待 只令東萊府使朴慶業答書曰
足下非不知此島之橫占 乃欲攙越窺覘, 是誠何心恐非隣好之道 所謂礒竹島 實我國之鬱陵島也
介於慶尙·江原海洋 載在輿地
焉可誣也 盖自羅·麗以來取考方物 逮至我朝屢刷逃民 今雖廢棄豈可容他人胃居乎
前日復書(今以前日復書之說觀之 前已有所往復也
박종원(朴宗元)을 보내어
조사하였는데 풍랑 때문에 이르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일행이었던
배 한 척이 울릉도에 닿아서 큰 대[竹]와 큰 전복만 갖고 돌아와서 상주하기를,
‘섬에는 사람이 살지 않습니다.’ 하였다.
여지지(輿地志)에,
‘울릉(鬱陵)ㆍ우산(于山)은 다 우산국(于山國) 땅이며, 이 우산을 왜인들은
송도(松島)라고 부른다.’고
되어 있다.
광해군(光海君) 7년(1615년)에 왜인이
배 두척을 보내서, ‘의죽도(礒竹島)의 상황을 탐지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섬이 경상도와 강원도의 사이에 있다.’ 하였다. 조정에서는
그 건방지고 주제넘음을 미워하여 접대를 허락하지 않고, 동래부사(東萊府使)
박경업(朴慶業)을 시켜 답서하기를, ‘귀하가 이 섬을 점령함은 가로채는
것이 됨을 모르는 것이 아닐 터인데 남의 땅을 넘보는 것은 무슨 마음이냐?
아마도 이것은 선린 우호(善隣友好)의 도리가 아닌성 싶다. 이른 바
의죽도(礒竹島)란 실로 우리 나라의 울릉도로서, 경상도와 강원도 바다
사이에 있음은 여지서(輿地書)에 실렸는데 어떻게 속일 수 있겠는가?
신라ㆍ고려 때부터 토산물을 받아 들였고, 본조에 와서도 여러 번 도피한
백성을 붙잡아 들였다. 지금 비록 폐기하였을 망정 다른 나라 사람이
불법으로 거주 함을 어찌 용납하겠는가? 전일에 보낸 복서(전일 답서 여기에 전일 답서라 한
것을 보면 전에도 왕복한 사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已悉梗槩 貴島 宜瞿然改圖 而今乃直以解纜發船爲言
不幾於輕朝廷而昧道理乎 貴島於我國往來過行 惟有一路 譬若門戶 此外
無論漂船 皆以賊船論斷 弊鎭沿海將官
惟知嚴守約束而已 不知其他 惟貴島審區上之有別 知界限之難侵 恪守信義 努力自勖 免致謬戾 尙克有終裁 肅宗十九年 馬島太守平義信押送漂民二口 貽書禮曺曰 貴域漁氓 行舟於本國竹島 極是不可到之地也 以故土官詳諭國禁 今者復不顧國禁 에서 이미 그 대략을
밝혔으니, 귀도(貴島)에서는 뚜렷한 반성이 있어야 하겠거늘 이제 배를
출발시키겠다고 하니, 이는 우리 조정을 업신여기고, 도리(道理)에 어두운
것이 아닌가? 귀도가 우리 나라에 통행함에는 오직 하나의 길이 있으니,
비유컨대 문호(門戶)와 같다. 이 밖에 표류하는 선박이라도 모두 적선으로
단정하겠다. 우리 진(鎭)의 연해(沿海) 장관(將官)은 다만 엄하게 약속을
지킬 줄 알 뿐이고 다른 것은 모른다. 그러니 귀도는 영토란 구별이
있음을 살피고, 한계선을 침범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서, 각별히 신의를
지키기로 스스로 힘써서 허물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여 유증의미가 있게
하라.’ 하였다.
숙종 19년(1693년)에 대마도 태수
평의신(平義信)이 표류민 2명을 압송(押還)하면서 예조에 보낸 글에,
‘귀역(貴域)의 어민이 본국 죽도(竹島)에 배를 타고 들어 왔는데, 이곳은
와서는 안 되는 지역(極是不可到之地)이다. 그러므로 지방관이 국가의
금법을 상세히 일러 주었거늘 이제 다시 금법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漁氓四十餘口
往入竹島 雜然漁採 由是土官拘留其漁氓二人(安龍福·朴於屯) 爲質於州司 以爲一時之證 我因幡州牧 連前後事狀 馳報東都 蒙令被漁民附與弊邑 以還本土
不忘想夫我殿下泛愛黎庶 無間遠近 旣往不咎 惟緣鴻庇 二漁氓 得還故土也 此事所係非細 兩國豈可不思無妄之禍耶 速加改令於邊浦
堅制禁條 隣睦悠久
一好事也 答曰 敝邦海禁至嚴 制束海民 使不得出於外洋 雖弊境之鬱陵島 亦以遼遠之故 切不許任意往來 況其外乎
今此漁船 敢入貴界竹島 어민 40여 명이 죽도에 들어와서
멋대로 고기잡이를 하였기 때문에 지방장관이 그 어민 2명 안용복(安龍福)과
박어둔(朴於屯) 을 구금하여 주사(州司)에게 볼모로 맡겨 놓고 일시의
증거로 삼으려고 한 것이다. 우리는 인번주목(因幡州牧)을 통하여 전후의
사실을 종합하여 동도(東都)에 보고했더니, 그 어민을 폐읍(弊邑)에서
인수하여 본국으로 돌려 보내주라는 분부를 받았다.
본인은 우리 전하께서 널리 백성을
사랑함이 멀고 가까움에 다름이 없으므로 과거는 허물치 않고 오직 혜택을
베풀어 2명의 어민을 그들의 고국에 돌려보낸 것이다. 이 사실은 관계가
중대하니, 양국은 어찌 불의의 사태에 대해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속히 변포(邊浦)에 다시 명령하여 금지조항을 단단히 마련하여 이웃
나라와의 화목함을 길이 보존하는 것이 좋은 일인가 생각한다.’ 하였다.
답서에 이르기를, ‘폐국(弊國)은 해상의 금령이 매우 엄격하여 하며
우리의 영토인 울릉도까지도 결코 마음대로 왕래하지 못하게 하는데
하물며 그 밖이겠는가? 지금 우리의 어선들이 귀국의 영토인 죽도(竹島)에
침입하여

致煩欽送 隣好之義 實所欣感 海氓 獵漁以爲生理 或不無遇風漂轉之患 而至於越海深入 法當痛徵 今將犯人 依律科罪 是時 接慰官洪重夏
至東萊 傳授答書 則差倭以爲 只論竹島事足矣 何爲以擧鬱陵耶 譯官答曰 所以明我國之亦嚴海禁也 倭曰 鬱陵島 固知爲貴國地 壬辰後
爲日本所占據者 貴國芝峯類說中不有之乎 首譯朴再興曰 類說中 誠有之 然此有大不然者 壬辰之亂 日本兵深入我境
西至于平安 北至于咸鏡 大小沿海郡邑 皆爲亂兵所據 송환의 귀찮스러움을 끼치었으니
이웃 나라로서의 호의에 대하여 실로 고맙게 여기는 바이다. 해변의
백성이란 고기잡이로 을 하기 때문에 혹 풍랑을 만나서 표류하는 일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바다를 건너 깊숙이 들어간 데 대해서는 법으로
엄중히 징계해야 할 것이다. 지금 이 범인들은 법에 의해 죄를 다스리겠다.’
하였다.
이때 접위관(接慰官)홍중하(洪重夏)가
동래부(東萊府)에 이르러 답서를 전달하니, 파견된 왜인이 말하기를,
‘죽도 사건만 말해도 될 터인데 하필 울릉도를 들어서 말할 게 무엇이냐?’
하였다. 역관은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도 해상의 금병을 엄격하게
밝히기 위함이다.’ 하니,
왜인이 말하기를 ‘울릉도가 귀국의
영토인 줄은 잘 알지만 임진란 뒤엔 일본(日本)의 점령지가 되었다고
귀국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있지 않느냐?’ 하였다.
수석 역관 박재홍(朴再興)이 말하기를,
‘유설 가운데 사실 그 말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절대로 그렇게 보아서는
안 된다. 임진란 때에 일본 병이 우리 경내에 깊이 들어와서 서쪽으로는
평안도에 이르렀고, 북쪽으로는 함경도까지 이르렀으니, 크고 작은 해안지방의
군읍(郡邑)들은 모두 난병에게 점령되었던 바,

不獨鬱陵一島而已 則豈可以壬辰亂兵所占據者僞言乎 類說所論 非所可援 況文士一時慢筆 何足爲明證
二十年 馬島太守平義信 奉書禮曺曰 向者貴國漁民 往入本國竹島者 同還焉 回簡
有鬱陵島名 是所難曉也 只冀除却鬱陵之名云云 二十一年 島倭橘眞重上書于東萊
以竹島設疑問四條 二十二年 馬島奉行倭平眞顯等六人 奇書於我國譯官卞·宋兩人 其一
論竹島事 其一 論安龍福擅行事 時廟堂諸議 以爭一空曠之地 以開邊釁 爲不可
어찌 임진란 중에 난병들이 한 것을
가지고 말할 수 있겠는가? 유설에서 말한 것을 끌어올 것이 아니다.
더구나 문사의 일시적인 만필(漫筆)이 밝은 증거가 될 수는 없다.’고
논박하였다.
20년에 대마도 태수 평의신(平義信)이
예조에 서한을 보내어 이르기를, ‘지난 번 본국의 죽도에 들어온 귀국의
어민을 송환한데 대한 귀국의 답서에 울릉도의 명칭이 들었는데, 이것은
이해 할 수 없다. 울릉도란 명칭만을 지워 주기 바란다. 운운.’ 하였고,
21년에 대마도의 왜인 귤진중(橘眞重)이 동래부에 서신을 올리어 죽도에
대한 의문점 4개조를 말하였으며, 22년엔 대마도 봉행(奉行) 왜인(倭人)
평진현(平眞顯) 등 6인이 우리 나라의 역관 변(卞)ㆍ송(宋) 두 사람
앞으로 서신을 보냈는데, 하나는 죽도에 대한 논의였고, 하나는 안용복(安龍福)
자의로 행동한 사건을 논한 것이었다. 이때 조정의 여론은, ‘하나의
빈 땅을 가지고 국제적인 분쟁을 일으키는 것이 옳지 않다.’ 하였는데,

獨領相南九萬以爲 疆土受之 祖宗不可與之 乃曰 此島 高麗得之於新羅
我朝得之於高麗 元非日本之地 以此往復不已 事逐寢 遣武臣張漢相往審島中
自是定爲法 每三年一送人觀其島 官給斧子十五伐其竹若木 又采土物若干 納于朝以僞信
三陟營將及越松萬戶 相遆入焉 初 東萊安龍福隷櫓軍
善倭語 肅宗十九年夏 入海漁採 漂到鬱陵島 遇倭船被拘 入日本五浪島 龍福言於島主曰 自鬱陵距我國一日程 距日本五日程 非屬我國者乎 오직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은, ‘강토는
조종(祖宗)에서 물려 받은 것이니 줄 수 없다.’ 하였으며, 이어서,
‘이 섬은 고려가 신라에서 받고, 가 고려에게서 받은 것이며, 원래가
일본 땅이 아니다.’ 하여, 이러한 서한이 오고 가다가 잠잠해졌다.
무신 장한상(張漢相)을 보내어 울릉도를
조사하였고, 이때부터 법으로 정하여 3년마다 한 번씩 사람을 보내어
그 섬을 조사하고 관에서 도끼 15자루를 주어 그곳 대와 를 베었고,
또 토산물을 채취해서 정부에 바치는 것으로써 하나의 신표[信]를 삼게
하였다.
삼척(三陟) 영장(營將)과 월송(越松)
만호(萬戶)가 번갈아 여기에 들어갔다. 동래(東萊) 사람 안용복(安龍福)은
노군(櫓軍)에 속하여 일본 말에 능통하였는데, 숙종 19년(1693년) 여름에
바다에 들어가 고기잡이를 하다가 표류되어 울릉도에 이르렀다가 일본
배[倭船]을 만나 붙들려서 일본의 오랑도(五浪島)에 들어갔다. 용복은
도주(島主)에게, ‘울릉도가 우리 나라에서는 하루 길이요, 일본에서는
닷새 길이니 울릉도는 우리 나라에 붙은 것이 아니냐?

朝鮮人自往朝鮮地 何拘爲 島主知不可屈 解送白耆州 州太守厚遇饋銀幣. 龍福不受曰 願日本勿復以鬱陵島爲辭 受銀非吾志也 太守遂禀關白
作書契授之言鬱陵非日本界 行至長崎島 島主卽馬島之黨也 求見書契 出示之 奪不還 送龍福于馬島. 時馬島主僞籍關白命
數以鬱陵島爭之 其實非關白意也. 鬱陵 饒魚竹 倭利其有 且差倭至則 國家待之豊厚 倭因此來往不止 至是 恐龍福盡發其奸狀 牢囚久之 押送東萊
叉囚于館前後九十日 始還 조선 사람이 조선 땅에 갔는데 어째서
구속하느냐?’ 하니, 도주는 그를 굴복시키지 못할 듯하여 풀어서 백기주(伯耆州)로
보냈다. 백기주의 태수는 그를 잘 대접하고 은(銀) 폐물을 주었다. 용복은
받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일본이 울릉도를 가지고 말썽을 부리지
않을 것을 원할 뿐이고, .’고 하였다.
태수는 드디어 관백(關白)에게 보고하고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는 서류를 만들어 주었다. 그는 가다가
장기도(長碕島)에 들렸는데, 도주는 대마도의 일당으로서 서류를 보자고
요구하여 보였더니, 서류를 빼앗고 용복을 대마도로 보내었다.
이때 대마도주는 관백을 핑계하고
자주 울릉도를 들어서 다투었는데 사실은 관백의 뜻이 아니었다. 울릉도에는
물고기와 대[竹]가 풍부하였으므로 왜인들은 그 이권을 차지하려고 했던
것이며, 또한 그들의 파견원이 우리 나라에 오면 조정에서는 그들을
후하게 대우한 탓으로 그들의 내왕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용복이 이를 모조리 폭로할까 두려워하여 오랫동안 구금하였으며, 동래로
압송하여서도 관(館)에 가두었다가 전후 90일 만에야 풀려나왔다.

用福言于府使 竟不聞 明年接慰官至東萊 龍福叉訴前事 朝廷亦不之信也 時差倭累至 若將生釁
國人憂之而 不知爲馬島 所瞞 龍福憤甚走蔚山海邊 有商僧雷憲等艤舟 龍福誘之曰 鬱陵島多海菜 吾當爲汝指其路 僧欣然從之 遂擧帆三晝夜 泊鬱陵島
倭舶自東至 龍福目諸人縛之 船人 不發
龍福獨前憤罵曰 何故犯我境 倭對曰 本向松島 固當去也 龍福追至松島 又罵曰 松島卽芋山島
爾不聞芋山亦我境乎 麾杖碎其釜 倭大驚走 龍福轉至伯耆州言其狀 용복은 전후 사실을 부사에게 말했지만,
끝내 보고하지 않았다. 이듬해 접위관(接慰官)이 동래에 왔을 때에도
용복은 또 이 사실을 호소하였으나 조정에서. 그 뒤에 파견된 왜인이
여러 번 와서 분쟁을 일으킬 듯하였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그를 걱정은
하면서도 馬島※에게 우리가 속임을 당하는 줄은 알지 못하였다. ※국역본에
이 부분이 생략되어 있는데, 馬島는
對馬島
용복은 분개해서 울산(蔚山) 해변으로
갔는데 마침 거기엔 장사치 중[商僧] 뇌헌(雷憲) 등이 와 정박하고 있었다.
용복은 그들을 꾀어서 말하기를, ‘울릉도에는 해채(海菜)가 많으니
내 그대들을 위해 길을 인도하겠다.’ 하니, 그들은 기뻐하며 선뜻 좇았다.
밤낮 사흘 만에 울릉도에 닿았더니
도 동쪽으로부터 와 닿았다. 용복은 여러 사람에게 눈짓하여 왜인들을
묶으라고 하였으나, 선원들은 겁이 나서 나서지 않았다. 용복은 앞에
나서서 꾸짖기를, ‘어찌 하여 우리 영토를 침범하느냐?’ 하니, 왜인은
대답하기를, ‘본시 송도(松島)로 갈려던 길이니 가겠노라.’ 하였다.
용복은 송도까지 쫓아가서 또 꾸짖기를, ‘송도는 곧 우산도(芋山島)다.
너희는 우산도가 우리의 영토라는 말을 못들었느냐?’ 하고는, 몽둥이를
휘둘러 가마솥을 부시니 왜인들은 매우 놀라 달아나 버렸다.
용복은 그 길로 백기주(伯耆州)로 가서 그 사실을 말하니,

太守悉捕治之 龍福乃詭稱鬱陵監稅官
升堂與太守抗禮 大言曰 馬島之居間矯誣 豈但鬱陵一事 我國所送幣貨 馬島轉賣日本 多設機詐 米十五斗爲一斛 馬島以七斗爲斛 布三十尺爲一疋 馬島以二十尺爲疋
紙一束甚長 馬島截爲三束 關白何從而知之 不能爲我達一書於關白乎 太守許之 馬島主父
時在江戶 聞之大懼 乞於太守曰 書朝而入則吾兒夕而死
子其圖之 太守歸語龍福曰 母庸上書 且速歸馬島如更爭界者 可差人賚書來 태수는 그들을 모조리 잡아서 치죄하였다.
용복은 자기가 울릉도의 감세관(監稅官)이라고 사칭하고 당상에 올라가서
태수와 서로 대등한 예를 치루고서 큰 소리로 말하기를, ‘대마도가
중간에 끼여서 속이는 것은 울릉도 문제뿐만이 아니다. 우리 나라에서
보내는 물품을 대마도가 일본에 전매(轉賣)하되 흔히 속임수를 쓴다.
쌀은 15두(斗)가 1곡(斛) 인데도 대마도는 7두를 1곡으로 치고, 베와
무명은 30척이 1필인데도 대마도에서는 20척을 1필로 치며, 종이 1속(束)이면
매우 길다란데 대마도에서는 끊어서 3속으로 만든다. 관백이 이런 내용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니 귀하는 나를 위해 관백에게 서한 한 통을 전달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태수는 이를 허락하였는데 마침 대마도주의
아버지가 강호(江戶)에 있던 터라, 이 말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며 태수에게
애걸하기를, ‘서한이 아침에 들아가면 내 아들은 저녁에 죽을 것이니,
태수는 생각해 달라.’ 하였으므로, 태수는 용복에게 돌아와 말하기를,
‘일부러 서장(書狀)을 올릴 필요 없이 속히 대마도로 돌아가라. 만약
다시 국경 문제로 분쟁이 있거든 사람을 보내어 서장을 갖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龍福還泊襄陽 告于官
且獻在伯耆時呈太守文以證前事 諸從者一一納供 如龍福言無異辭 於是倭知不可復誑 抵書萊府
謝曰 不敢復遣人至鬱陵 是時事由龍福發 故倭疾之 以龍福行不由馬島爲罪
舊約有自馬島向釜山一路以外皆禁之文故也 朝議皆以爲龍福罪當斬 獨領敦寧尹趾完領中樞南九萬謂 殺之適足快馬島 憤且其人桀黠非碌碌者 宣留爲他日用
乃流
倭至今不復指鬱陵爲日本地 皆龍福功也 柳成龍答 皇朝將書曰 東海一邊 自慶尙左道達于江原道
自江原道達于咸鏡道 皆傍海之地 南海多島嶼 東海無島嶼 且水性悍急 不利行舡
自前賊兵雖不無犯境之時 而犯境之時 而不常有之 용복은 양양(襄陽)에 돌아와서 관에
보고하고 또 백기주(伯耆州)에 있을 때 태수에게 보낸 서장을 바치어서
앞의 일들을 증명하였으며, 따라갔던 여러 사람들도 저마다 용복의 진술과
일치하고 틀리지 아니하였다.
이리하여 왜인들은 더 이상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서한을 동래부에 보내와 사과하기를, ‘다시는
사람을 울릉도로 보내지 아니하겠다.’ 하였다. 이때에 그 내용이 용복으로
인해서 발각되었다는 것을 알고 왜인은 그를 미워하여 용복이 갈 때
대마도를 거쳐서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트집하여 죄로 삼았다.
옛 조약에, ‘대마도에서 부산으로
다니는 한 길 외에는 어떤 길도 금한다.’고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정의 의론은 모두 용복의 죄가 참형에 해당한다고 하였으나, 돈녕부(敦寧府)윤지완(尹趾完)과
영중추(領中樞) 남구만(南九萬)만은, ‘그를 죽이는 것은 대마도의 분함을
씻어 주는데 족할 뿐이다. 그리고 용복은 위인이 걸출하고 용렬한 자는
아니다. 마땅히 그를 살려서 후일에 쓰임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마침내 귀양을 보내는데 그쳤다. 일본이 그 뒤로 지금까지 울릉도가
저희네 땅이라고 주장하지 못하는 것은 다 안용복의 공적이다.
〈유성룡 소론(柳成龍所論)〉 유성룡이
명 나라 장수에게 보낸 답서에, ‘동해 일변(一邊)이 경상좌도에서 강원도에
이르며, 강원도에서 함경도에 이르기까지가 다 바다에 면한 지역이다.
남해는 섬들이 많지만 동해는 섬들이 없고, 또한 물결이 급하여 배가
통행하기에 불편하다. 그러므로 적병들이 국경을 침범하는 때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늘 있지는 않다.’ 하였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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