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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卷35, 이자료는 19세기 중엽에 편찬된 이규경(李圭景:1788~?)이 쓴 백과사전류의 책으로, 역사 ·경학 ·천문 ·지리 ·불교 ·도교 ·서학(西學) ·예제(禮制) ·재이(災異) ·문학 ·음악 ·음운 ·병법 ·광물 ·초목 ·어충 ·의학 ·농업 ·광업 ·화폐 등 총 1,417항목에 달하는 내용을 변증설(辨證說)이라는 형식을 취하여 고증학적인 방법으로 해설하고 있다. 특히 <울릉도사실변증설(鬱陵島事實辨證說)>에서는 평민 안용복(安龍福)이 울릉도를 지키기위한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이 외에도 민중생활사와 관련된 내용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울릉도사실변증설(鬱陵島事實辨證說) 東方多彈丸黑痣之小島 比如潑墨者之大小亂點 其中有鬱陵島 古于山國
一作蔚陵 一作芋陵 又作羽陵 或稱武陵 울릉도의 사적에 대한 변증설 우리 東方(동방)에는 彈丸(탄환)이나 점은 사마귀만큼씩 자잘한 섬이 많아서, 비유하자면 마치 산수화를 그리기 위해 어지러이 뿌려 놓은 크고 작은 멍물 방울과 같다. 그 가운데 울릉도라는 섬이 있는데, 이것이 곧 옛날의 우산국으로, 蔚陵芋陵이라고도 하고 羽陵武陵이라고도 한다. 「輿地圖」의 鬱陵 조에 의하면, 于山島는 따로이 그리지 않거나 혹은 어떤 섬 하나를 울릉의 위쪽에 그린 것을 于山이라 칭하였다. 拾遺記 扶桑五萬里 有磅磄山 上有桃樹百圍萬年一實 鬱水在磅磄山東 生碧藕長千常云 故有萬歲氷桃千常碧藕之說. 余意磅磄與方丈 音相近 俗謂智異山爲方丈山. 又世傳昔有人 於高城海邊 見水中臥石 題曰方丈山碑 以此疑金剛亦號方丈山云. 所謂鬱水恐指鬱陵島而言. 拾遺記又言 蓬萊山高二萬里 水淺有細石如金玉 不加陶也 自然光淨 東有鬱夷國云. 所記細石 似今棊子之類. 鬱夷與鬱陵島 音相近 鬱陵亦古國名. 王維 送日本晁監序 扶桑若薺 鬱島如萍 卽此也 見 李睟光芝峰類說. 倭人則稱松島 島在江原道蔚珍縣正東三百五十里(與日本之隱岐州相近 卽倭山陰道之隱岐州 隱岐四郡 亦一島居山陰道北 五穀乏 藻蜜多小 下國也 隱岐之旁 又有后烏羽 小島也) 三峰撑空 南峰稍卑 風便 二日可到(遠可七八百里自江陵三陟等地 登高望之 三峰 縹緲隱見 一作直三陟府) 「拾遺記(습유기)에 이르기를, “부상(扶桑, 동녘을 가리킴)으로 5만 리쯤 가면 磅磄(방당)이라는 산이 있고 이 산 위에는 1백 아름들이나 되는 복숭아나무가 있는데, 이 복숭아는 1만 년 만에 한 번씩 열매가 연다. 그리고 鬱水(울수)라는 물은 방당산 동쪽에 있는데, 여기에는 1천 상(常, 1상은 16尺)이나 되는 연뿌리가 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1만년 만에 열매가 여는 복숭아와 천 상이나 되는 연뿌리[萬歲永挑 千常碧藕]’라는 말이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생각하건대, 磅磄과 方丈(방장)은 음이 서로 비슷한데, 俗에서는 지리산을 가리켜 方丈山이라 하니, 아마 이곳 지리산이 아닌가 싶다. 또 세상에 전하기를, “옛날 어떤 사람이 固城의 해변에서 물속에 누워 있는 돌 하나를 발견하였는데, 거기에 ‘方丈山碑’라고 씌어 있었기 때문에 어떤 이는, 금강산을 방장산이라 호칭했나보다고 했다” 하니, 이른바 鬱水(울수)라는 것은 아마 울릉도를 가리켜 말한 것인 듯하다. 또 「습유기」에 이르기를, “봉래산은 높이가 2만리인데, 물이 얕고 물속에는 細石이 있어 마치 금옥과 같과 같아 다듬지 않아도 자연 광택이 흐르며, 그 동쪽에는 鬱夷國(울이국)이 있다” 하였다. 여기에서 말한 세석은 곧 棊子(기자)의 유인 듯하며, 鬱夷는 울릉도와 음이 서로 비슷하다. 또 울릉은 옛나라의 이름이기도 하니, 王維(왕유)가 일본 사람 晁監(조감)을 송별한 序에 ‘扶桑(부상)’은 냉이와 같고 鬱島(울도)는 마름과 같다.‘ 한 대문의 울도가 바로 이것이다. 이상의 말은 모두 李睟光(이수광)의 「芝峰類說」에서 나온 것이다. 왜인들이 松島라 칭하는 섬이 있는데, 이 섬은 강원도 울진현에서 정 동쪽으로 3백 50리쯤 되는 거리에 있다. (이 울진현은 일본의 隱岐州와 서로 가까우니, 이는 곧 일본 山陰道의 은기주이다. 이 은기주 가운데 4군 또한 하나의 섬으로 되어 있는데, 이 섬은 산음도의 북쪽에 위치하여 오곡은 없고 海藻와 꿀이 많이 나는 곳으로 일본의 下國이다. 또 은기주의 곁에는 后烏羽라는 작은 섬이 있다.) 이곳에는 봉우리 세 개가 창공에 높이 솟아 있는데, 그 중 남쪽 봉우리가 약간 낮으며, 풍세가 좋으면 이틀에 당도할 수 있다.(이 세 봉과의 거리는 울진현에서 7~8백 리쯤 되는데, 江陵․三陟)등지에서 높은 곳에 올라 바라보면 세 봉이 아스라하게 보인다. 어떤 데는 이 곳을 삼척부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新羅智證王十二年壬辰 于山國 地方百里 恃其險不服 阿(阿 一作河)瑟羅(今 江陵)軍主異斯夫 謀幷于山國 謂其國人愚悍 可以計服 乃多造木獅子 載戰船 抵其道 誑之曰 汝若不服 放此獸踏殺之 國人懼乃降. 高麗太祖十三年庚寅 其島人 使白吉土豆(豆 一作頭) 貢獻方物 以土頭爲正朝. 德宗元年壬申 島主遣其子夫於仍多郞來貢. 毅宗十一年丁丑 遣金柔立 往審羽陵島 從山頂 東距海一萬餘步 西距海一萬三千餘步 南距海一萬五千餘步(一作萬五千步) 北距海一萬三千餘步(一作八千步) 有村墟七所 有石佛鐵鐘石塔 地多巖石 不可居 是時 已成空地. 十三年己卯 毅宗聞地廣土肥 可以居民 遣溟州道監倉 金柔立往視 回奏 地多巖石 民不可居. 後崔忠憲 移本郡民以實之 屢爲風濤所盪 舟覆 人多物故 因還其民. 入于本朝 太宗朝 聞流民多入其島 再命三陟人金麟雨爲按撫使刷出. 世宗二十年戊午 遣蔚珍縣人萬戶南顥率數百人 搜浦民 俘金凡等七十餘人而還 其地遂空. (按李晬光芝峰類說 鬱陵島 壬辰後 被倭焚掠 無復人煙 近聞倭占據礒竹島 或謂礒竹 卽鬱陵島云.) 成宗二年辛卯 有人告別有三峯島 在東海中 近鬱陵 遣朴宗元往探 因風濤不得泊還 同行一船 過鬱陵島取大竹大鰒而還. (按朴元宗 因風濤不得泊還 同行一船 過鬱陵島 取大竹大鰒而還云爾 則朴元宗不得泊者 卽三峯島 而島上 風濤大作 不得渡泊者然. 故同行一船 則過鬱陵 採鰒伐竹而歸也. 其辭語 實有所語三峯島也 不然 則誰敢以虛無之一島 告于至尊也. 山海經 蓬萊山溟海無風 而洪波百丈 維飛仙能渡云 蓋我東北海 風濤甚險 異於他海也.) 光海君七年乙卯 倭差船 謂將探磯竹島 朝廷不許接待 東萊府使朴慶業
移書責之曰 所謂礒竹島 實我國之鬱陵島也 今雖廢棄 豈可容他人之冒居.
신라 智證王 13년 임진(512)에, 통틀어 사방 1백 리쯤 되는 于山國이 지형의 험고함을 믿고 복종하지 않자, 阿瑟羅州(아슬나주)(阿(아)는 河(하)로도 쓰며, 아슬나주는 지금의 강릉이다.)의 軍主인 이사부가 우산국을 병합하기를 도모하면서 이르기를, “그 나라 사람들은 성질이 어리석고 조급하므로 계략으로 굴복시킬 수 있다” 하고, 나무로 만든 獅子(사자)를 戰船에 나누어 싣고서 그 섬에 당도하여 그들에게 속여 말하기를, “너희들이 만일 복종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어 놓아서 너희들을 밟아 죽이도록 하겠다”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곧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 13년 경인(930)에는 그 섬 사람이 白吉(백길)과 土豆(토두)(豆는 頭로도 쓴 데가 있다)를 보내어 그곳 方物을 貢獻하자, 고려조에서 (백길은 정위(正位)로,) 토두는 正朝로 삼았다. 덕종 원년 임신(1032)에는 그 島主가 그의 아들 夫於仍多郞(부어잉다랑)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그리고 의종 11년 정축(1157)에는 김유립을 羽陵島(우릉도)에 보내어 지형을 살펴보게 한 결과, 산꼭대기에서 동쪽으로 바다까지는 1만여 보쯤 되고, 서쪽으로 바다까지는 1만 3천여 보쯤 되고, 남쪽으로 바다까지는 1만 5천여 보(1만 3천 보라고 한 데도 있다)쯤 되고, 북쪽으로 바다까지는 1만 3천 보(8천 보라고 한 데도 있다)쯤 되며, 마을 터가 일곱 군데 있는데, 여기에는 석불․철종․석탑 등이 있고 땅에는 암석이 많아서 사람이 살 수가 없으며, 이때는 벌써 공지로 되어 있었다. 의종 13년(기묘)에는 땅이 넓고 비옥하여 사람이 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명주도 감창 김유립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는데, 김유립이 회주화기를 ‘땅에 암석이 많아서 사람이 살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뒤에 최충헌이 본군의 백성들을 옮기어 그곳을 채웠으나, 잦은 풍랑으로 인해 배가 뒤집혀서 사망자가 많이 발생하므로 그곳에 있는 백성들을 다시 본군으로 귀환시켰다. 本朝에 들어와서는 태종 때에 유민들이 그 섬에 많이 들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두 번씩이나 삼척 사람 김인우를 안무사로 삼아 그들을 쇄출하도록 하였다. 세종 20년 무오(1438)에는 울진현 사람인 만호, 남호를 시켜 수백 명을 거느리고 그곳에 가서 포민들을 수색해 오게 한 결과, 김환 등 70여명을 생포하여 돌아옴으로써 그 지역이 텅 비어버렸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상고하건대 “울릉도가 임진왜란 이후 왜노들로부터 분략을 받아 인적이 끊어졌는데 요즘 들으니, 왜노들이 의죽도를 점거한다고 한다. 어떤 이는, 이 의죽도라고 말하는 것은 곧 울릉도다”라고 하였다.) 성종 2년 신묘(1471)에는 어떤 사람이, 동해 안에 울릉도와 가까운 지점에 따로이 삼봉도가 있다고 고하자, 박원종을 보내어 탐지하게 하였으나 풍랑으로 인해 배를 대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는데, 동행했던 배 한척은 울릉도에 들러 대죽․대복 등을 채취해 가지고 돌아왔다. (상고하건대, 박원종은 풍랑으로 인해 배를 대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는데, 동행했던 배 한 척이 울릉도에 들러 대와 전복 등을 채취해 왔다 하였으니, 박원종이 배를 대지 못했다는 곳은 곧 삼봉도로서 그 섬 언저리에 풍랑이 크게 일어 배를 대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동행했던 배 한 척은 울릉도에 들러서 대와 전복을 채취해 가지고 돌아온 것이니, 그 말이 곧 삼봉도가 참으로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누가 감히 있지도 않은 섬을 있다고 지존(至尊, 임금을 가리킴)에게 고하겠는가, 「산해경」에 이르기를, “溟海(명해)에는 바람은 없으나 파도가 백 길이나 일어서 오직 날아 다니는 신선만이 건널 수 있다” 하였는데, 대체로 우리 나라 북해는 파도가 매우 거세어 다른 바다와 다르다.) 광해군 7년 을묘(1615)에는 왜의 사자의 배가 와서, 의죽도를 탐지하려 한다고 하므로 조정에서 그들의 접대를 허락하지 않았는데, 동래부사 박경업이 글을 보내어 꾸짖기를, “이른바 의죽도는 사실상 우리 나라의 울릉도이다. 지금 아무리 폐기되어 있기는 하지만, 어찌 타국 사람이 와서 살도록까지야 용납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肅宗十九年癸酉夏 東萊戰船櫓軍安龍福 潛入倭中 有爭島之擧. (肅廟十九年癸酉夏 東萊戰船櫓軍安龍福 出入倭館 善倭語 漂泊鬱陵島 倭船七艘先到 時倭已惹爭島之端 龍福與倭辨詰 倭怒執以歸拘五浪島 龍福言島主曰 鬱陵芋山本屬朝鮮 朝鮮近 而日本遠 何故拘執我不歸 島主送諸伯耆州 伯耆島主待以賓禮 賚稂許多 辭不受 島主問汝欲何爲 龍福又言其故曰 禁止侵擾 以厚交隣 是吾願也. 島主許之 稟于江戶 成契券與之 遂遣 還行到長崎島 島主黨馬島 奪其券 送之馬島 馬島主囚之 聞于江戶 江戶復爲書契 令勿侵兩島 且令護送 馬島主復奪其書契 囚五十日 押送東萊倭館 又留之四十日 送之東萊府. 龍福悉訴之 府使不以聞 以犯越刑之 以寢其事 此而寢之可乎) 二十一年乙亥夏 龍福憤鬱不已 流販僧復入倭中 爭詰竹島 以更不相爭爲約 而還泊襄陽 方伯狀聞以犯越罪當斬 用相臣議 原恕形配. (肅廟二十一年乙亥夏 龍福憤鬱不已 誘販僧五人及掉工四人復至鬱陵
我國三商船先泊 魚採斫竹有 倭船適止 龍福令諸人縛執 諸人懼不從. 倭云我等魚採松島偶至此卽去.
龍福曰 松島本我芋山島 明日追至芋山島 倭擧帆走 龍福追之 漂迫于玉岐島
轉至伯耆州 島主歡迎 龍福自稱鬱陵搜捕將 乘轎入 與島主抗禮 言前後事甚詳.
且云我國歲輸米一石必十五斗 綿布一匹三十五尺 紙一卷二十張 馬島偸損
謂米石七斗 布匹二十尺 載紙爲三卷 吾將欲直達于關白 治欺誑之罪 同行有稍解文字者製疏
示島主. 馬島主父聞之 乞憐於伯耆州 事遂已. 慰諭送還曰 爭地事 悉如汝言
有不如約者 當重罰之. 同年秋八月還泊襄陽 方伯狀聞 拿致龍福等于京
諸人納供如一 朝議以犯越挑釁 將斬之. 惟領敦寧尹趾完曰 龍福雖有罪 然馬島從前欺詐者
徒以我國 不得專通江戶故耳. 今知別有他路 勢必恐怯 今誅龍福非計也.
領中樞南九萬曰 馬島之欺詐 非龍福無以畢露 其罪之有無姑置 爭島事 不可不因此機會
明辨痛斥之. 書問馬島曰 朝廷將別遣使 直探其虛實云爾 則馬島必大恐服罪
然後龍福事徐議其輕重未晩也 次上策也. 不然使萊府送書島中 先陳龍福擅自呈文之罪
次陳本島假稱竹島 奪取公文之失 待其回答 而龍福斷罪之意 決不可及於書中
次中策也. 至若不問馬島奸欺之狀 而先殺龍福 以快其心 彼必以此籍口
侮我脅 我將何以堪之 此下策也. 於是 朝廷用中策 島主果自服 歸罪於前島主
不復往來鬱陵 朝廷乃減龍福死配去云. 於是 朝廷用中策 島主果自服 歸罪於前島主
不復往來鬱陵 朝廷乃減龍福死 配去. 倭至今不服指鬱陵爲日本地 皆龍福之功也.) 숙종 19년 계유(1693) 여름에는 동래부의 전선에 예속된 노군 안용복이 몰래 왜인들 속에 들어가 이 섬의 소유권을 놓고 왜인들과 다툰 일이 있었다. (숙종 19년 여름의 일이다. 동래부의 전선에 예속된 노군 안용복은 왜관에 드나들어서 왜어에 능숙하였는데, 풍랑으로 인해 울릉도에 표류되었을 때 왜선 7척이 먼저 와서 이 섬의 소유권을 놓고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에 용복이 왜인들과 시비를 벌이니, 왜인들이 노하여 그를 잡아가지고 오랑도로 가서 구금하므로 용복이 도주에게 말하기를, “울릉과 우산은 본디 조선에 예속되어 있으며, 조선과는 가깝고 일본과는 먼데, 어째서 나를 구금해 놓고 돌려보내지 않는가?”하니, 도주가 그를 백기주로 보내었다. 백기도주가 용복에게 빈례로 대우하고 많은 銀子를 주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으므로, 도주가, “그대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물었다. 용복이 다시 전후 사실을 말하고 이르기를, “침략을 금지하고 이웃 나라끼리 서로 친선을 도모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하자, 도주가 이를 승낙하고 강호막부에 품하여 계권을 작성하여 주고 보내 주었다. 이리하여 용복이 장기도에 이르니, 장기도주가 대마도와 符同하여 그 계권을 빼앗고 대마도로 압송하였다. 대마도주가 용복을 구금하고 강호막부에 보고하니, 강호에서 다시 서계를 보내고 울릉과 우산 두 섬을 침략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본국으로 호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대마도주는 그 서계를 다시 빼앗고 50일 동안이나 구금하였다가 동래부 왜관으로 압송하였는데, 왜관에서도 40일 동안이나 억류시켰다가 동래부로 돌려보냈다. 용복이 동래부에 와서야 이 사실을 죄다 열거하여 호소하니, 부사가 상부에 보고하지도 않고 이유없이 월경했다 하여 임의대로 형벌을 가하고는 이 일을 숨겨버렸으니, 이런 사실을 숨겨버려서야 되겠는가.) 숙종 21년(을해) 여름에 용복이 그때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떠돌이 중들을 달래어 다시 울릉도에 들어가 이 섬을 놓고 분쟁을 벌인 끝에, 다시는 서로 분쟁하지 않기로 약조를 체결하고 양양으로 돌아왔는데, 방백이 이들의 월경한 죄는 의당히 베어야 한다고 장계를 올렸으나, 상신의 의논에 의해 정상을 참작하여 유배의 형에 그쳤다. (숙종 21년(을해) 여름에 용복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떠돌이 중 5인과 사공 4인을 달래어 다시 배를 타고 울릉도에 이르니, 우리나라 상선 3척이 먼저 와서 정박하고 고기를 잡으며 대나무를 벌채하고 있었는데, 마침 왜 당도하였다. 용복이 여러 사람을 시켜 왜인들을 포박하도록 명하였으나, 모두들 겁을 먹고 따르지 않았는데, 왜인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들은 松島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우연히 이곳에 당도하였을 뿐이다” 하고 즉시 물러갔다. 용복이 말하기를, “松島는 본디 우리 나라 芋山島이다” 하고, 다음 날 우산도로 달려가니, 왜인들이 돛을 올리고 달아나므로 용복이 뒤쫓아 가는 도중 옥기도에 표류하다가 다시 백기주에 당도하였다. 그러자 백기도주가 나와서 환영하므로 용복이 울릉도 수포장이라 자칭하고 교자를 타고 들어가서 도주와 대등한 예로 인사를 나눈 뒤 전후의 일을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이어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서 해마다, 쌀은 1석을 15두로, 면포는 1필을 35척으로, 종이는 1권을 20장으로 충수하여 보냈는데, 대마도에서 모두 빼먹고는, 쌀은 1석을 7두, 면포는 1필을 20척, 1권의 종이는 3권으로 각기 절단하여 강호로 올려보냈으니, 내가 이 사실을 곧장 관백에게 전달하여 그 기만한 죄상을 다스리도록 하려 하오”하고, 동행했던 인사 중에 약간 글을 아는 자를 시켜 소장을 지어 도주에게 보였다. 대마도주의 아버지 된 자가 이 말을 듣고 백기주에 달려와 용서해 주기를 애걸하므로, 관백에게 죄상을 전달하겠다는 일은 이로써 그만두었다. 이에 그들은 지난 일을 사과하고 용복을 전송하면서, “섬을 가지고 다투어 온 일에 대해서는 모두 그대의 말대로 따를 것이오. 만일 이 약속을 어긴 일이 있을 경우에는 마땅히 중벌에 처하겠소” 하였다. 이해 가을 8월에 용복이 양양부에 다다르니, 방백이 이 사실을 장계로 보고하고 용복 등 일행을 서울로 압송하였다. 여러 사람의 공초가 한결같이 나오므로 조정의 의논이, 국경을 넘어서 이웃나라와 쟁단을 일으켰다 하여 참형에 처하려 하였다. 그런데 당시 영돈령부사 윤지완 만이, “용복이 비록 죄는 있으나 대마도가 예전부터 속여온 것은 한갓 강호와 직통하지 않은 때문이었다가 지금 별달리 통하는 길을 찾았으니, 대마도에서 반드시 두려워할 것인데, 이때에 용복을 참형에 처하는 것은 국가의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하였다.영중추부사 남구만도 말하기를, “대마도에서 속여온 일은 용복이 아니었더라면 다 드러날 수 없는 것이니, 그 죄의 유무는 막론하고, 우선 섬을 다투는 일에 대하여 이 기회를 통해 밝게 변석하고 엄중하게 물리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대마도에 서계를 보내어 묻기를 ‘조정에서 곧 강호에 직접 사신을 보내어 그 허실을 탐지하겠다’고 한다면, 대마도에서 반드시 크게 두려워하여 복죄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용복의 일에 대해 그 경중을 서서히 논의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상책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동래부를 시켜 대마도에 서계를 보내어 먼저 용복이 임의로 글을 올린 죄상을 말하고, 다음에 울릉도를 죽도라 가칭한 것과 공문을 탈취한 도주의 과실을 밝혀 그에 대한 회답을 기다릴 것이며, 용복을 처벌한다는 뜻은 절대로 서계 가운데 언급하지 말 것이니, 이것이 중책입니다. 만약 대마도의 기만해 온 죄상을 묻지도 않고 먼저 용복을 죽여 그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면, 그들이 반드시 이것으로 구실을 삼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협박할 것이니, 이 일을 장차 어떻게 감당해 내겠습니까. 이것이 하책입니다” 하였다. 조정에서 그 다음가는 방책을 채용하니, 도주가 과연 자복하여 허물을 前 도주에게 돌리고 다시는 울릉도에 왕래하지 않았으며, 조정에서는 용복을 극형에서 감하여 변방으로 귀양보냈다. 생각건대, 지금까지도 왜인들이 다시는 울릉도를 가리켜 일본 땅이라 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용복의 공로이다.) 星湖李瀷曰 龍福直是英雄儔匹 以一卒之賤 出萬死之計 爲國家 抗强敵 折奸萌 息累世之爭 復一州之土 比諸傅介子陳湯 其事尤難 非傑然者不能也. 朝廷不惟不之賞 前刑後配 摧陷之不暇哀哉. 鬱陵縱云土薄 馬島亦土無數尺 而爲倭所窟宅 歷世爲患 一或見奪 是增一馬島也 方來之禍 何可勝言. 以此論之 龍福非特一世之功也歟. 古今稱張循王花園老卒 爲人豪然 其所辦 不過大賈販殖之間 其於國家計策 未必優焉. 若龍福者 當危難之際 拔之行伍 借之翼角 得行其志 則所就豈止於此. 按倭以漁氓安龍福犯越事來爭 以芝峰類說及禮曹回啓 有貴界竹島之語爲證 朝廷遣武臣張漢相往審之 南北七十里 東西六十里云云 於是 朝廷 費辭往覆 彌縫乃止.) (李瀷論曰 余謂此事非難判 當時胡不曰 鬱陵之服屬新羅 自智證王始 時卽貴邦繼體之六年 未知威德遠被 史乘特書 有可以考見者耶. 至於高麗 或獻方物 或空其地 史不絶書 今千有餘年 今者何故突然惹此爭端. 卽無論羽陵礒竹之何指 鬱陵之屬我邦 則百分明白 而其旁近島嶼亦不過鬱陵之屬島. 與貴邦絶遠 其乘隙占據 所宜羞吝 而不合誇言者也. 設或中間爲貴邦冒奪 兩國約和誠信之後 悉宜還其舊田之不暇 況未曾著在貴邦之版籍也耶 旣在我界則 我氓之漁獵往來 理固宜然 何與於貴邦如是 則彼雖巧黠 將無復容其喙矣. 성호 이익은 말하기를, “안용복은 바로 영웅 호걸이다. 미천한 일개 군졸로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국가를 위하여 강적과 겨루어 간사한 마음을 꺾어버리고 누대에 거려 벌여온 분쟁을 종식시켰으며 일주의 땅을 되찾았으니, 傅介子(부개자)와 陳湯(진탕)의 일보다도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이야말로 뛰어난 인물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상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앞서는 참형을 운운하고 뒤에는 귀양을 보내어 꺾어버리기에 급급하였으니, 참으로 애통한 일이다. 울릉도가 비록 척박한 땅이고 대마도 역시한 조각의 농토도 없는 곳이지만, 대마도는 왜인의 소굴이 되어 역대로 내려오면서 우환거리가 되고 있는데, 만일 울릉도를 한 번 저들에게 빼앗긴다면 이는 도 하나의 대마도가 생기게 되는 것이니, 닥쳐올 우환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이로써 논하건대, 용복은 한 세대의 공적만을 세운 것뿐이 아니었다. 고금에 장순왕의 화원노졸을 호걸이라고 칭송하나, 그가 이룩한 일은 기껏 大商거부에 지나지 않았고 국가를 위한 계책에는 큰 도움이 없었던 것이다. 만일 이 용복 같은 이는 국가가 위급한 때에 항오에서 발탁, 장수급으로 등용하여 자기의 뜻을 충분히 펴게 하였다면 그가 이룩한 공적이 어찌 이것뿐이었겠는가” 하였다. 상고하건대, 왜인들이 어부 안용복이 월경한 일로 와서 논쟁한 데 대해 「사설」에, “그들이 「지봉유설」과 예조의 회답 가운데 있는 ‘귀계’니 ‘죽도’니 하는 말을 들어서 증거를 대자, 조정에서 무신 장한상을 울릉도로 보내어 살펴보게 했는데, 그의 복명에 ‘남북은 70리요, 동서는 60리이며……’하였다. 이리하여 조정에서는 누차 사신을 보내어 그 일을 무마시켰다” 하였다. 또 이익은 논하기를, “이 일은 담판짓기 어려운 것이 아니었는데, 그 당시에 어찌 ‘울릉도가 신라에 예속된 것은 지증왕 때부터 시작된 일이며, 그 당시 귀국은 계체6년(신라 지증왕13, 512)이었는데, 그 위덕이 멀리까지 미친 일이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혹 역사에 상고할 만한 특이한 기록이라도 있는가. 고려로 논한다면 혹은 방물을 바친 일이나 혹은 그 섬을 비워둔 일 등이 역사 기록에 그친 적이 없었는데, 1천여 년을 지난 오늘에 와서 무슨 이유로 갑자기 이런 분쟁을 일으키는가. 羽陵島(우릉도)라고 하든, 礒竹島(의죽도)라고 하든, 어느 칭호를 막론하고 우리 나라에 예속된 것만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며, 그 부근의 섬도 울릉도의 부속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 섬은 귀국과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인데, 틈을 타서 이곳을 점령한 것은 너무도 수치스러운 일로서 의당 자랑하지 못할 말이다. 설사 중간에 귀국이 이 섬을 약탈해 갔다 할지라도 두 나라가 신의로써 화친을 맺은 후에는 의당 우리의 옛땅을 돌려 주어야 할 것인데, 하물며 이 섬이 일찍이 귀국의 판도 안에 들어간 적이 없었음에랴. 이미 우리 나라의 강토인 이상, 우리 백성들이 그곳에 왕래하며 고기잡이하는 것은 의당한 일인데, 귀국이 무슨 관여할 권리가 있는가’하고 따지지 않았던가. 이렇게만 했더라면 저들이 아무리 간사하다 할지라도 다시는 그에 대해 입을 열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黃菊村曄輿地衍義 臣謹案 蔚珍之正東 有鬱陵島 而地方百里 土沃無比 卽古于山國都也. 後魏延昌元年壬辰 降于新羅 厥後 無建置官長之事 但爲逃民隱居之所. 故我太宗世宗兩朝 刷還其民 遂空其地 今爲倭奴漁採之所 臣恐或如對馬島. 晉義熙元年 新羅實聖王四年乙巳 倭人置營而見失也. 臣愚以爲移三陟鎭于鬱陵 新設水軍節度使於三陟鎭營 以爲犄角之勢 則東海賊路 庶可無憂 而其在拓地之道 亦得其宜也. 菊村此議 允合至當. 我之海中 最要之賊路 無端空曠 甚不宜也. 按東史 實聖王元年壬寅 晉安帝元興元年 倭人置營於對馬島. 국촌 황엽의 「여지연의」에, “신이 삼가 상고하건대, 울진의 동쪽에 울릉도가 있는데, 사방 1백리 정도이고 땅이 비옥하기 이를 데 없으니, 이곳이 바로 옛날의 우산국 수도입니다. 후위 延昌 (宣武帝의 연호) 원년 임진(512)에 신라에 항복하였는데, 그후로 관장을 건치한 일은 없고 다만 도망간 백성들의 은신처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태종․세종 양대에 걸쳐 그곳에 있는 백성들은 쇄환시키고 드디어 그 땅을 비워버림으로써 지금은 왜노들의 고기잡이하는 곳이 되고 말았으니, 신은 혹 이 섬이 대마도처럼 되어버릴까 염려됩니다. 晉나라 義熙 (安帝의 연호) 원년(을사), 즉 신라 실성왕 4년(405)에 왜인이 이곳에 진영을 설치함으로써 이 섬을 빼앗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은 생각하건대, 삼척진을 울릉도로 옮기고 삼척 진영에 수군 절도사를 신설하여 서로 버티는 형세를 만들어 놓으면 동해의 적로에 거의 우환거리가 없게 될 것이고, 땅을 개척하는 방법에도 적의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국촌의 이 의논은 참으로 지당하다. 우리 나라의 바다는 가장 중요한 적로인데, 공연히 비워둔 것은 매우 온당치 못한 일이다. 東史를 상고하건대, 실성왕 원년 임인(402) 은 진 안제 원흥 원년인데, 이 해에 왜인들이 대마도에 진영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張漢相 探視後別單 木有冬柏紫檀側柏黃蘗槐椵桑楡桃李松橡 禽獸有烏鵲猫鼠 水族有嘉支魚 穴居巖磧 無鱗有尾 魚身四足 而後足甚短 陸不能善走 水行如飛 聲如嬰兒 脂可以燃燈(文獻備考 海中 無獸牛形 赤眸無角 羣臥海岸 見人獨行害之 遇人多走入水 名可之 按其皮不染水 可作鞍鞴靴鞋). 輿地勝覽 鬱陵土地饒沃 竹大如杠 鼠大如猫 桃核大如升(按今桃有鬱陵桃 以核傳種 未極大). 備考鬱島物産 柴胡藁本石楠藤草 諸香木蘆竹 多合抱者 蘆實桃核 大可爲杯升. 刷出逃民 空其地 每三年 一送人審視 官給斧子十五 伐其竹木 又採土物 納于朝以爲信. 三陟營將越松萬戶 相遞探視(今探視後 紫檀香蘆竹朱土可之皮等屬 納于備局) 逋氓之潛採鰒藿屬公. 以近世之搜括別單攷之 則非徒倭奴 湖南沿海人 潛入留住 伐松製船斫蘆竹採鰒藿魚 或入搜驗. 愚嘗聞鬱島有大竹田三處朱土窟一所 朱土甚鮮如硃. 又多大鮑海帶葛藤連抱. 其三峰 乃石骨崢嶸 産丹砂 爲天下第一品. 又有飛砂 卽丹砂之最神異者 其形如人 爲仙藥 人或得之 置諸白瓷甁 以海土塞甁口 置甁大缸中 盛潮水密封 然後飛砂不能遁去 其虛實不可知 蓋異聞. 有石香一種 狀如煤石(石炭也) 燒之有香 平蔚氓或得出 傳播關東諸寺云耳. 장한상이 그곳을 탐사하고 와서 보고한 별지에, “나무는 동백자단측백황벽괴목유자뽕나무느릅나무복숭아오얏소나무상수리나무 등은 없으며, 새는 까마귀까치가 있고, 짐승은 고양이쥐가 있으며, 물고기는 가지어가 있어 바위 틈에 서식하는데, 비늘은 없으나 꼬리가 있고 몸통은 다른 물고기와 똑같으나 네 개의 발에 뒷발은 아주 짧고 육지에서는 빨리 달리지 못하나 물에서는 나는 듯이 빠르고 소리는 마치 어린 아이들의 소리와 같고 그 기름은 등불에 사용합니다”하였다. (「문헌비고」에 이르기를 “바닷속에 소처럼 생긴 큰 짐승이 있는데, 눈동자는 붉고 꼬리는 없으며, 떼를 지어 바닷가 언덕에 나와 누워 있다가 혼자 가는 사람을 보면 해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면 달아나 물속으로 들어가는데, 이름을 可之라고 한다. 상고하건대, 그 짐승의 가죽은 물에 젖지 않으므로, 안장․풀무․가죽신 등을 만들 수 있다.” 하였다.) 「여지승람」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울릉도는 토지가 비옥하여 대나무의 크기는 외나무다리를 놓을 만하고 쥐의 크기는 고양이만하고 복숭아씨의 크기는 되만하다.” (상고하건대, 지금 복숭아 중에 울릉도 복숭아라는 것이 있는데, 그 씨를 받아 다른 데에 심으면 그리 크지 않다.) 「문헌비고」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울릉동의 물산으로는 시호고본석남등초와 모든 향목과 노죽이 있는데, 향목과 노죽은 크기가 아름들이 되는 것이 많고 노죽의 열매와 복숭아 씨의 크기는 술잔이나 되만큼 크다. 그런데 그곳에 도망가 있는 백성들을 모조리 쇄출하여 그 땅을 텅 비워버리고 3년마다 한 번씩 사람을 보내어 탐시하게 하였으며, 관에서 도끼 15자루를 지급하여 그곳에 있는 대나무를 벌채하고 또 토산물을 채취하여 조정에 공납해서 이를 상례로 삼았다. 삼척 영장과 월송 만호가 서로 교대하여 탐시(지금은 탐시한 후에 자단향노죽주토가지피 등속을 채취하여 비국에 공납한다)하였고 그곳에 도망간 백성들이 몰래 채취한 전복이나 미역은 모두 공용으로 적몰시킨다. 근세에 그곳을 탐시한 별지를 상고해 보면 ‘왜노뿐만이 아니라, 호남 연해에 사는 사람들도 몰래 이곳에 들어와 주거하면서 소나무를 벌채하여 배를 만들며, 노죽을 베어내고 전복이나 미역고기 등을 채취하는 것을 가끔 들어가서 수색한다’고 했다.” 나는 듣건대, 울릉도에 큰 대밭 세군데와 주토가 나는 굴 한 군데가 있는데, 주토는 매우 고와서 주사와 같다. 또는 돌고래․海帶(해대, 昆布의 별칭)가 많이 나고, 칡이나 등나무덩굴도 몇 아름 되는 것들이 많이 있다. 그곳에 있는 삼봉은 암석이 많고 험준한 곳으로, 여기서 나는 단사는 천하에 일품이다. 또 비사가 있는데, 이는 곧 단사 중의 가장 신기한 것으로, 그 모양이 마치 사람과 같이 생긴 선약이다. 이를 사람이 혹 얻었을 경우에는 백자병에 넣고 해토로 병 주둥이를 꼭 막아서 다시 큰 항아리 속에 넣고 조수를 담아 밀봉해 놓아야만이 비사가 도망가지 못한다고 하니, 그 허실은 알 수 없으나, 대체로 異聞이다. 또 일종의 석향이 있어 모양이 마치 煤石(석탄이다)처럼 생겼는데, 불에 태우면 향내가 나므로, 평해울진 등지의 백성들이 혹 가지고 나와서 관동 지방의 여러 절에 전파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