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실록(肅宗實錄)

肅宗實錄 권25,숙종 19년 11월 18일(丁巳)條.(1693)

※자료출처; 숙종 23년까지의 기록은 독도박물관, 그 이후는 '독도영유권 자료의 탐구'에서

接慰官洪重夏辭陛 左議政睦來善 右議政閔黯 與重夏同爲請對 重夏言 倭人所謂竹島 卽我國鬱陵島 今以爲不關而棄之則已 不然則不可不預爲明辨 且彼若以人民入接 則豈非他日之憂乎 來善黯俱以爲倭人之徙入民戶 旣不能的知 此是三百年空棄之地 因此生釁失好 亦非計也. 上從黯等言. 盖蔚山漁人 自海邊漂至鬱陵島 島上三峰接天 中有數十戶人家遺址 草木則多竹葦 禽獸則多烏鳶猫狸 爲倭人所執去 自其島至伯耆州 七晝夜 時倭請以犯境之罪 罪漁人. 太宗朝 宰臣申叔舟 浮海入審鬱陵島 記其形止而來 今漁人所言 與其記言相符 議者皆以爲 此明是鬱陵島 而廟堂乃以爲等棄之地而不欲辨爭 其計誤矣.


접위관(接慰官) 홍중하(洪重夏)가 하직 인사를 하고, 좌의정(左議政) 목내선(睦來善), 우의정(右議政) 민암(閔黯)이 홍중하와 함께 청대(請對)하였다. 홍중하가 아뢰기를,

"왜인(倭人)이 이른바 죽도(竹島)는 바로 우리 나라의 울릉도(鬱陵島)입니다. 지금 상관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버린다면 그만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미리 명확히 판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만약 저들의 인민(人民)이 들어가서 살게 한다면 어찌 뒷날의 걱정꺼리가 아니겠습니까?"

하고, 목내선, 민암은 아뢰기를,

"왜인들이 민호(民戶)를 옮겨서 들어간 사실은 이미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이것은 3백년 동안 비워서 내버려둔 땅인데, 이것으로 인하여 흔단(釁端)을 일으키고 우호(友好)를 상실하는 것은 또한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민암 등의 말을 따랐다. 대체로 울산(蔚山)의 고기잡이 하는 사람이 해변(海邊)에서 표류(漂流)하여 울릉도(鬱陵島)에 이르렀는데, 섬 위에는 세 봉우리가, 하늘에 닿아 있고 섬 가운데는 수십(數十) 호(戶)되는 인가(人家)의 허물어진 터가 있었으며, 초목으로는 대나무와 갈대가 많았고 날짐승과 길짐승으로는 까마귀 소리개 고양이 너구리 살쾡이가 많았는데, 왜인(倭人)들이 잡아가는 바가 되었으며, 그 섬으로부터 백기주(伯耆洲)까지는 7주야(晝夜)가 걸린다. 이때 왜(倭)가 국경을 침범한 죄(罪)로 고기잡는 사람을 처벌하기를 청하였다. 태종조(太宗朝)의 재신(宰臣) 신숙주(申叔舟)가 배를 타고 울릉도에 들어가 살펴보고 그곳의 형지(形止)를 기록하여 왔었는데, 지금 고기잡이 하는 사람이 말한 바가 그 기록에서 말하는 것과 서로 부합이 되므로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이것은 분명 울릉도라고 여겼지만, 묘당(廟堂)에서는 버려둔 땅과 같이 여기고 분변하여 다투려고 하지 않았으니, 그 계책이 잘못되었다.


肅宗實錄 권25, 숙종 20년 2월 23일(辛卯)條.(1694)

癸酉春 蔚山漁採人四十餘口 泊船於鬱陵島 倭船適到 誘執朴於屯安龍福二人而去 及其冬 對馬島使正官橘眞重 領送於屯等 仍請禁我人之漁採於竹島者 其書曰 貴域瀕海漁氓 比年行舟於本國竹島 土官詳諭國禁 固告不可再 而今春漁氓四十餘口 入竹島雜然漁採 土官拘其二人 爲一時證質 本國因幡州牧 馳啓東都 令漁氓附與弊邑 以還故土 自今以後 決莫容船於彼島 彌存禁制 使兩國交誼 不生釁郄. 自禮曺覆書曰 弊邦禁束漁氓 使不得出於外洋 雖弊境之鬱陵島 亦以遼遠之故 不許任意往來 況其外乎 今此漁船 敢入貴境竹島 致煩領送 遠勤書諭 隣好之誼 實所欣感 海氓獵漁 以爲生理 不無漂轉之患 而至於越境深入 雜然漁採 法當痛徵 今將犯人等 依律科罪 此後沿海等處 嚴立科條而申勅之 仍以校理洪重夏 差接慰官 至東萊倭館 則橘眞重 見覆書中弊境鬱陵之說 甚惡之 謂譯官曰 書契只言竹島固好 必擧鬱陵者 何也 仍屢請刪改 而私送其從倭 通議於馬島 殆至半月 還延未決 重夏使譯官責之 從倭私謂譯官曰 島主必欲刪鬱陵二字 而如有難處者 亦許受書正官之委曲請改 自爾如此 又迭爲游辭以乎之 朝廷終不聽 橘眞重計窮情露 乃受書以歸 於是 治泊船鬱陵島人 或刑訊或編配 後承旨金龜萬侍講筵 白上曰 臣昔爲江原都事 至海上 問居人以鬱陵島 則爲指示之 臣早起遙望 三峰歷歷 及日出 都不可見矣 以此比之於靈巖月出山之望濟州 則尙爲近矣 臣謂當置鎭于此島 以備不虞 向者漁採人之謫配 恐爲過也. 上曰 爾言亦有見矣. 史臣曰 倭人所謂竹島 卽我國鬱陵島 而鬱陵之稱 見於羅麗史乘及唐人文集 則其來最遠矣 島中多産竹 亦有竹島之稱 而其實一島二名也 倭人隱鬱陵之名 但以竹島漁採爲辭 冀得我國回言 許其禁斷然後 仍執左契 以爲占據之計 我國覆書之必擧鬱陵者 乃所以明其地之本爲我國也 倭人之必欲改鬱陵二字 而終不顯言竹島之爲鬱陵者 盖亦自病其曲之在己也 噫 祖宗疆土 不可以與人 則明辨痛斥 使狡倭無復生心 義理較然 而過於周愼 徒欲羇縻 如犯人等科罪之語 尤示弱於隣國 可勝惜哉. 是夏 南九萬白上曰 東萊府使報 倭人又言 朝鮮人入於吾竹島 宜禁其更入也 臣見芝峰類說(故判書李晬光所著 芝峯卽其號) 倭奴占據礒竹島 礒竹 卽鬱陵島也 今倭人之言 其爲害 將無窮 前日答倭書 殊糢糊 宜遣接慰官 推還前書 直責其回賓作主可也 新羅圖 此島亦有國名 納土貢 高麗太祖時 島人獻方物 我太宗朝 不勝倭患 遣按撫使 刷出流民而空其地 今不可使倭居之 祖宗疆土 又何容與人乎. 申汝哲曰 臣問寧海漁人 島中多大魚 又有大木大竹如杠 土且沃饒 倭若據而有之 旁近江陵三陟 必受其害. 上用九萬言 命還前書


계유년(1693, 숙종 19) 봄에 울산(蔚山)의 고기잡이 40여 명이 울릉도(鬱陵島)에 배를 대었는데, 왜인(倭人)의 배가 마침 이르러, 박어둔(朴於屯) 안용복(安龍福) 2인을 꾀어내 잡아서 가버렸다. 그 해 겨울에 대마도(對馬島)에서 정관(正官) 귤진중(橘眞重)으로 하여금 박어둔 등을 거느려 보내게 하고는, 이내 우리 나라 사람이 죽도(竹島)에 고기잡는 것을 금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서신(書信)에 이르기를,

"귀역(貴域)의 바닷가에 고기잡는 백성들이 해마다 본국(本國)의 죽도에 배를 타고 왔으므로, 토관(土官)이 국금(國禁)을 상세히 알려 주고서 다시 와서는 안된다는 것을 굳이 알렸는데도, 올봄에 어민(漁民) 40여 명이 죽도에 들어와서 난잡하게 고기를 잡으므로, 토관이 그 2인을 잡아두고서 한때의 증질(證質)로 삼으려고 했는데, 본국(本國)에서 번주목(幡州牧)이 동도(東都)에 빨리 사실을 알림으로 인하여, 어민을 폐읍(弊邑)에 맡겨서 고향에 돌려보내도록 했으니, 지금부터는 저 섬에 결단코 배를 용납하지 못하게 하고 더욱 금제(禁制)를 보존하여 두 나라의 교의(交誼)로 하여금 틈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회답하는 서신에 이르기를,

"폐방(弊邦)에서 어민을 금지 단속하여 외양(外洋)에 나가지 못하도록 했으니 비록 우리 나라의 울릉도일지라도 또한 아득히 멀리 있는 이유로 마음대로 왕래하지 못하게 했는데, 하물며 그 밖의 섬이겠습니까? 지금 이 어선(漁船)이 감히 귀경(貴境)의 죽도에 들어가서 번거롭게 거느려 보내도록 하고, 멀리서 서신(書信)으로 알리게 되었으니, 이웃 나라와 교제하는 정의(情誼)는 실로 기쁘게 느끼는 바입니다. 바다 백성이 고기를 잡아서 생계(生計)로 삼게 되니 물에 떠내려가는 근심이 없을 수 없지마는, 국경을 넘어 깊이 들어가서 난잡하게 고기를 잡는 것은 법으로서도 마땅히 엄하게 징계하여야 할 것이므로, 지금 범인(犯人)들을 형률에 의거하여 죄를 과(科)하게 하고, 이후에는 연해(沿海) 등지에 과조(科條)를 엄하게 제정하여 이를 신칙하도록 할 것이오."

하였다. 이내 교리(校理) 홍중하(洪重夏)를 접위관(接慰官)으로 임명하여 동래(東萊)의 왜관(倭館)에 이르게 했는데, 귤진중이 우리 나라의 회답하는 서신 중에 '우리 나라의 울릉도'라는 말을 보고는 매우 싫어하여 통역관(通譯官)에게 이르기를,

"서계(書契)에 다만 죽도(竹島)라고만 말하면 좋을 것인데, 반드시 울릉도를 들어 말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면서, 이내 여러 번 산개(刪改)하기를 청하고는, 사사로이 그 따라온 왜인을 보내어 대마도에 통하여 의논하기를 거의 반 달이나 되면서 시일을 지체하여 결정하지 않으므로, 홍중하가 통역관으로 하여금 이를 책망하니, 따라온 왜인이 사사로 통역관에게 이르기를,

"도주(島主)는 반드시 울릉(鬱陵)이란 두 글자를 깎아 버리려고 했으니, 난처(難處)한 일이 있는 듯하며, 또한 자세히 고치기를 청하는 정관(正官)의 서신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저절로 이와 같이 되었다."

하고는, 또 번갈아 근거 없는 말을 하면서 다투므로, 우리 조정에서 마침내 들어주지 않았다. 귤진중이 꾀가 다하고 사실이 드러나게 되어 그제야 서계를 받고서 돌아갔다. 이에 울릉도에 배를 정박했던 사람을 치죄(治罪)하여 혹은 형신(刑訊)하기도 하고, 혹은 귀양보내기도 하였다. 후에 승지 김만귀(金萬龜)가 강연(講筵)에 모시고 있다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신이 옛날에 강원 도사(江原都事)가 되었을 때, 바닷가에 이르러 거주하는 사람에게 울릉도를 물었더니 가리켜 보이므로, 신이 일찍이 일어나 멀리서 바라보니 세 봉우리가 뚜렷했는데, 해가 뜰 때에는 전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로써 영암(靈巖)의 월출산(月出山)에서 제주(濟州)를 바라본 것에 비한다면 오히려 가까운 편입니다. 신은 마땅히 이 섬에 진(鎭)을 설치하고서 뜻밖의 변고에 대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번에 고기잡는 사람을 귀양보낸 일은 아마 지나친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또한 소견(所見)이 있도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왜인들이 말하는 죽도란 곳은 곧 우리 나라의 울릉도인데, 울릉이란 칭호는 신라(新羅), 고려(高麗)의 사서(史書)와 중국 사람의 문집(文集)에 나타나 있으니 그 유래(由來)가 가장 오래 되었다. 섬 가운데 대나무가 많이 생산되기 때문에 또한 죽도란 칭호가 있지마는, 실제로 한 섬에 두 명칭인 셈이다. 왜인들은 울릉이란 명칭은 숨기고서 다만 죽도에서 고기잡는다는 이유를 구실로 삼아서, 우리 나라의 회답하는 말을 얻어서 그 금단(禁斷)을 허가받은 후에 이내 좌계(左契)를 가지고서 점거(占據)할 계책을 삼으려고 했으니, 우리 나라의 회답하는 서계에 반드시 울릉이란 명칭을 든 것은, 그 땅이 본디 우리 나라의 것임을 밝히기 때문이다. 왜인들이 반드시 울릉이란 두 글자를 고치려고 하면서도, 끝내 죽도가 울릉도가 된 것을 드러나게 말하지 않는 것은, 대개 그 왜곡(歪曲)이 자기들에게 있음을 스스로 걱정했기 때문이다. 아! 조종(祖宗)의 강토(疆土)는 남에게 줄 수가 없으니 명백히 분변하고 엄격히 물리쳐서 교활한 왜인(倭人)으로 하여금 다시는 마음을 내지 못하도록 할 것이 의리가 분명한데도, 주밀하고 신중한 데에 지나쳐서 다만 견제(牽制)하려고 한 것이 범인(犯人)들에게 과죄(科罪)하는 말과 같이, 더욱 이웃 나라에 약점(弱點)을 보였으니, 이루 애석함을 견디겠는가?.】

이해 여름에 남구만(南九萬)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동래 부사(東萊府使)의 보고에 왜인이 또 말하기를, 조선(朝鮮) 사람은 우리의 죽도에 마땅히 다시 들어오는 것을 금지해야 할 것이다. 라고 하는데, 신(臣)이 《지봉유설(芝峰類說)》【고(故) 판서(判書) 이수광(李晬光)이 저술한 책으로, 지봉(芝峰)은 그의 호(號)이다.】을 보니, 왜놈들이 의죽도(礒竹島)를 점거(占據)했는데, 의죽도는 곧 울릉도이다. 라고 했습니다. 지금 왜인의 말은 그 해독이 장차 한정이 없을 것인데, 전일 왜인에게 회답한 서계가 매우 모호했으니, 마땅히 접위관을 보내어 전일의 서계를 되찾아와서 그들이 남의 의사를 무시하고 방자하게 구는 일을 바로 책망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신라 때 이 섬을 그린 그림에도 또한 나라 이름이 있고 토공(土貢)을 바쳤으며, 고려 태조(太祖) 때에 섬 사람이 방물(方物)을 바쳤으며, 우리 태종(太宗) 때에 왜적이 침입하는 근심을 견딜 수가 없어서 안무사(按撫使)를 보내어 유민(流民)을 찾아 내오게 하고는, 그 땅을 텅비워 두게 했으나, 지금 왜인들로 하여금 거주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조종의 강토를 또한 어떻게 남에게 줄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신여철(申汝哲)은 아뢰기를,

"신이 영해(寧海)의 어민에게 물으니, 섬 가운데 큰 물고기가 많이 있고, 또 큰 나무와 큰 대나무가 기둥과 같은 것이 있고, 토질도 비옥하다. 고 하였는데, 왜인이 만약 점거하여 차지한다면 이웃에 있는 강릉(江陵)과 삼척(三陟) 지방이 반드시 그 해를 받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남구만의 말을 들어 써서 전일의 서계를 돌려오도록 명하였다.


肅宗實錄 권25, 숙종 20년 7월 16일(壬午)條.(1694)

前武兼宣傳官 成楚珩上䟽 陳備豫之策 有六 一曰 鳥嶺(聞慶)竹嶺(豊基) 置忠淸道兵使及營將 鬱陵島設鎭是也 二曰 洞仙嶺(鳳山) 靑石洞(開城府) 設鎭是也 … 上命該曺稟處 然無所施行.

전 무겸선전관 성초형이 군비책 6가지를 상소하였는데, 그 첫번째 대책 중 하나가 울릉도에 진을 설치하는 것. 임금이 해조에 품처하게 하였으나 시행된 바가 없었다.


肅宗實錄 권27, 숙종 20년 8월 14일(己酉)條.(1694)

初南九萬 以鬱陵島事 白上 議遣接慰官 直責其回賓作主. 及倭差還 持春間所受回書而至 又致對馬島主書曰 我書曾不言鬱陵 回書忽擧鬱陵二字 是所難曉 只冀刪之. 九萬遂欲從其言 改前書 尹趾完執不可曰 旣以國書 付之歸使 何敢復來請改乎 今若責之以竹島是我鬱陵島 我人之往何嘗犯界乎 則倭必無辭矣 九萬遂以此入奏. 上曰 狡倭情狀 必欲據而有之 其依前日所議 直辭以報之. 九萬曰 曾聞高麗毅宗 初欲經理鬱陵 而東西只而萬餘步 南北亦同之 土壤編小 且多巖石 不可耕 遂不復問. 然此島在海外 久不使人視之 倭言又如此 請擇三陟僉使 遣于島中 察其形勢 或募民以居之 或設鎭以守之 可備旁伺之患也. 上許之 遂以張漢相爲三陟僉使 接慰官兪集一 受命南下. 盖安龍福朴於屯 初至日本 甚善遇之 賜衣服及椒燭以遣之 又移文諸島 俾勿問 而自長碕島 始侵責之 對馬島主書契 竹島之說 是爲他日徼功於江戶之計也. 集一問龍福 是得其實 乃喝倭差曰 我國將移書于日本 備言侵責龍福等之狀 諸島安得無事 倭差相顧失色 始自折服. 至是 九萬改前日回書曰 弊邦江原道蔚珍縣 有屬島曰鬱陵 在本縣東海中 而風濤危險 船路不便 故中年移其民空其地 而時遣公差 往來搜檢矣. 本島峰巒樹木 自陸地歷歷望見 而凡其山川紆曲 地形濶狹 民居遺址 土物所産 俱載於我國輿地勝覽書 歷代相傳 事跡昭然. 今者我國海邊漁氓 往于此島 而不意貴國之人 自爲犯越 與之相値 乃反拘執我人 轉到江戶 幸蒙貴國大君 明察事情 優加資遣 此可見交隣之情 出於尋常 欽歎高義 感激何言. 雖然我氓漁採之地 本是鬱陵島 而以其産竹 或稱竹島 此乃一島二名也 一島二名之狀 非從我國書籍之所記 貴州人亦皆知之 而今此來書中 乃以竹島爲貴國地 方欲令我國禁止漁船之更往 而不論貴國人侵涉我境 拘執我氓之失 豈不有欠於誠信之道乎 深望將此辭意 轉報東都 申飭貴國邊海之人 無令往來於鬱陵島 更致事端之惹起 其於相好之誼 不勝幸甚. 倭差見之 請改侵涉拘執等語 集一不從. 倭差又請 得第二書(請刪鬱陵二字之言)之回答 集一曰 汝若受上船宴 則吾當歸奏朝廷 而成送之 盖權辭也. 倭差遂受上船宴 集一乃復命 然倭差不肯歸. 漢相以九月甲申 乘舟而行 十月庚子 還至三陟. 言倭人往來固有迹 而亦未嘗居之 地狹多大木 水宗(海中水激處猶陸之有嶺也) 亦不平 艱於往來 欲知土品 種麰麥而歸 明年復往 可以驗之. 九萬入奏曰 不可使民入居 間一二年搜討爲宜. 上從之. 又言禮曺所藏 有丁卯伯耆州倭 漁于其食邑竹島 標到我界之文 東萊府所藏 有光海甲寅 倭有送使探視礒竹島之言 朝廷不答 使東萊峻斥之之文 倭之漁採此島 其亦久矣. 上曰然. 時漢相所圖上山川道里 與輿地勝覽所載多舛 故或疑漢相所至 非直鬱陵島也.


당초에 남구만(南九萬)이 울릉도(鬱陵島)에 관한 일로 임금에게 아뢰어, 접위관(接慰官)을 보내 맞바로 회빈 작주(回賓作主)하는 짓을 책망하게 하기로 의논하였다. 왜차(倭差)가 돌아오면서 봄 무렵에 받아 간 회서(回書)를 가지고 왔고, 또한 대마 도주(對馬島主)의 서계(書契)를 바쳤는데, 이르기를,

"우리의 서계에는 일찍이 울릉도를 언급하지 않았는데, 회서에는 갑자기 '울릉' 두 글자를 거론했습니다. 이는 알기 어려운 바이니 오직 삭제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남구만이 그만 그 말을 따라 앞서의 서계를 고치려고 하자, 윤지완(尹趾完)이 안된다고 고집하기를,

"이미 국서(國書)로 돌아가는 사자(使者)에게 붙였는데, 어찌 감히 다시 와서 고치기를 청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이번에 책망하기를, 죽도(竹島)는 곧 우리 울릉도이다. 우리 나라 사람이 가는 것이 어찌 경계(境界)를 범한 것인가? 라고 한다면, 왜인들이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남구만이 드디어 이를 가지고 들어가 아뢰니, 임금이 이르기를,

"교활한 왜인(倭人)들의 정상(情狀)으로 보아 필시 점거(占據)하여 소유하려는 것이니, 전일에 의논한 대로 바로 말을 하여 대꾸해 주라."

하였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일찍이 듣건대, 고려 의종(毅宗) 초기에 울릉도를 경영하려고 했는데, 동서(東西)가 단지 2만여 보(步)뿐이고 남북도 또한 같았으며, 땅덩이가 좁고 또한 암석(巖石)이 많아 경작할 수 없으므로 드디어 다시 묻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섬이 해외(海外)에 있고 오랫동안 사람을 시켜 살피게 하지 않았으며, 왜인들의 말이 또한 이러하니, 청컨대 삼척 첨사(三陟僉使)를 가려서 보내되 섬 속에 가서 형편을 살펴보도록 하여, 혹은 민중을 모집하여 거주하게 하고 혹은 진(鎭)을 설치하여 지키게 한다면, 곁에서 노리는 근심거리를 방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드디어 장한상(張漢相)을 삼척 첨사로 삼고, 접위관 유집일(兪集一)이 명을 받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대개 안용복(安龍福)과 박어둔(朴於屯)이 처음 일본(日本)에 갔을 적에 매우 대우를 잘하여 의복과 호초(胡椒)와 초[燭]를 주어 보냈고, 또한 모든 섬에 이문(移文)하여 아무 소리도 못하게 했는데, 장기도(長碕島)에서 침책(侵責)하기 시작했다. 대마 도주(對馬島主)의 서계(書契)에 '죽도(竹島)'란 말은 곧 장차 강호(江戶)에서 공을 과시하기 위한 계책이었는데, 유집일이 안용복에게 물어보자 비로소 사실을 알았다. 그제야 왜차(倭差)를 꾸짖기를,

"우리 나라에서 장차 일본에 글을 보내 안용복 등을 침책(侵責)한 상황을 갖추어 말한다면, 모든 섬들이 어찌 아무 일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니, 왜차들이 서로 돌아보며 실색(失色)하고 비로소 스스로 굴복하였다. 이에 이르러 남구만이 전일의 회서(回書)를 고치기를,

"우리 나라 강원도의 울진현(蔚珍縣)에 속한 울릉도란 섬이 있는데, 본현(本縣)의 동쪽바다(東海) 가운데 있고 파도가 험악하여 뱃길이 편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몇 해 전에 백성을 옮겨 땅을 비워 놓고, 수시로 공차(公差)를 보내어 왔다갔다하여 수검(搜檢)하도록 했습니다. 본도(本島)는 봉만(峰巒)과 수목을 내륙(內陸)에서도 역력히 바라볼 수 있고, 무릇 산천(山川)의 굴곡과 지형이 넓고 좁음 및 주민의 유지(遺址)와 나는 토산물(土産物)이 모두 우리 나라의 《여지승람(輿地勝覽)》이란 서적에 실려 있어, 역대에 전해 오는 사적이 분명합니다. 이번에 우리 나라 해변의 어민들이 이 섬에 갔는데, 의외에도 귀국(貴國) 사람들이 멋대로 침범해 와 서로 맞부딪치게되자, 도리어 우리 나라 사람들을 끌고서 강호(江戶)까지 잡아갔습니다. 다행하게도 귀국 대군(大君)이 분명하게 사정을 살펴보고서 넉넉하게 노자(路資)를 주어 보냈으니, 이는 교린(交隣)하는 인정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높은 의리에 탄복하였으니, 그 감격을 말할 수 없습니다. 비록 그러나 우리 나라 백성이 어채(漁採)하던 땅은 본시 울릉도로서, 대나무가 생산되기 때문에 더러 죽도(竹島)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곧 하나의 섬을 두 가지 이름으로 부른 것입니다. 하나의 섬을 두가지 이름으로 부른 상황은 단지 우리 나라 서적에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귀주(貴州) 사람들도 또한 모두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온 서계(書契) 가운데 죽도를 귀국의 지방이라 하여 우리 나라로 하여금 어선(漁船)이 다시 나가는 것을 금지하려고 하였고, 귀국 사람들이 우리 나라 지경을 침범해 와 우리 나라 백성을 붙잡아간 잘못은 논하지 않았으니, 어찌 성신(誠信)의 도리에 흠이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깊이 바라건대, 이런 말 뜻을 가지고 동도(東都)에 전보(轉報)하여, 귀국의 변방 해안(海岸) 사람들을 거듭 단속하여 울릉도에 오가며 다시 사단을 야기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면, 서로 좋게 지내는 의리에 있어 이보다 다행함이 없겠습니다."

했었는데, 왜차(倭差)가 보고서 '침범해 오다[侵涉]'와 '붙잡아 갔다[拘執]' 등의 어구(語句)를 고치기를 청했으나, 유집일이 들어주지 않았다. 왜차가 또한 제2의 서계의【'울릉' 두 글자를 삭제해 주기를 청한 서계이다.】 회답을 받기를 청하므로, 유집일이 말하기를,

"만일 그대가 상선연(上船宴)을 받기로 한다면, 내가 마땅히 돌아가 조정에 아뢰어 마련해 보내겠다."

하였으니, 대개 임시 변통하여 한 말인데, 왜차가 드디어 상선연을 받았고, 유집일도 이에 복명(復命)하였다. 그러나 왜차는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장한상(張漢祥)이 9월 갑신(19일)에 배를 타고 갔다가 10월 경자(6일)에 삼척(三陟)으로 돌아왔는데, 아뢰기를,

"왜인(倭人)들이 왔다갔다 한 자취는 정말 있었지만 또한 일찍이 거주하지는 않았습니다. 땅이 좁고 큰 나무가 많았으며 수종(水宗)이【바다 가운데 물이 부딪치는 곳이니, 육지의 고개가 있는 데와 같은 것이다.】 또한 평탄하지 못하여 오고가기가 어려웠습니다. 토품(土品)을 알려고 모맥(麰麥)을 심어놓고 돌아왔으니 내년에 다시 가 보면 징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남구만이 입시(入侍)하여 아뢰기를,

"백성이 들어가 살게 할 수도 없고, 한두 해 간격을 두고 수토(搜討)하게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예조(禮曹)에서 간직하고 있는 문서에는 '정묘년에 백기주(伯耆州)의 왜인이 그의 식읍(食邑) 죽도(竹島)에서 고기를 잡다가 우리 나라 지경으로 표류(漂流)해 왔다.' 는 글이 있고, 동래부(東萊府)에 간직한 문서에는 '광해(光海) 갑인년(1614, 광해 6)에 왜(倭)가 사자(使者)를 보내 의죽도(礒竹島)를 탐시(探視)하겠다고 말했으나 조정에서 답하지 않고, 동래부로 하여금 준엄하게 배척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왜인들이 이 섬에서 어채(漁採)해 온 지가 또한 오래 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이때 장한상(張漢相)이 그려서 올린 산천(山川)과 도리(道里)가 《여지승람》의 기록과 틀리는 것이 많으므로, 혹자는 장한상이 가 본 데가 진짜 울릉도가 아닐 것이라고 의심하기도 하였다.


肅宗實錄 권28, 숙종 21년 6월 20일(庚戌)條.(1695)

前年接慰官兪集一還朝 而差倭橘眞重 猶索第二書之回答 南九萬以爲 狡倭情狀絶痛 豈可又答其第二書乎 況兩書之意 自是一事一答書足矣 終不許眞重久留不歸 期於得請 會倭國召眞重歸 眞重送以六月十五日 爲發行之期 貽書萊府 詰問四條 以請轉達朝廷而開示之. 其一曰 答書中時遣公差 往來搜檢云 謹按因幡伯耆二州邊民 年年往竹島漁採 二州年年獻彼島鰒魚於東都 彼島風濤危險 非海上安穩之時 則不得往來 貴國若實有遣公差之事 則亦當海上安穩之時 自大神君至今八十一年 我民未曾奏與貴國公差相遇于彼島之事 而今回答書中言 時遣公差往來搜檢者 未知何意也. 其二曰 回答書中不意貴國人 自爲犯越云 貴國人侵涉我境云 謹按兩國通好之後 往來竹島之漁民 漂到于貴國地 禮曺參議以送返漂民 與書於弊州緫三度矣 本邦邊民 往漁于彼島之狀 貴國所曾知也 以上上年我民往漁于彼島 爲犯越侵涉 則曾前三度書中 何不言犯越侵涉之意乎. 其三曰 回答書中一島二名之狀 非徒我國書籍之所記 貴州之人 亦皆知之云 貴國曾考一島二名之狀 載于書籍之中 而又謂一島二名之狀 弊州之人 亦皆知之 則初度答書 何言貴界竹島弊境鬱陵島乎 若初不知竹島卽鬱陵島 而爲二島二名 則今之答書 何言一島二名之狀 非徒我國書籍之所記 貴州之人亦皆知之乎. 其四曰 謹按八十二年前 弊州寄書於東萊府 以告看審礒竹島之事 府使答書云 本島卽我國所謂鬱陵島者 今雖荒廢 豈可容他人之冒占 以啓鬧釁耶 其再答書亦然 七十八年前 本邦邊民 往漁于彼島 漂到于貴國地之時 禮曺參議與弊州書云 倭人馬多三伊等七名 被獲於邊吏 問其來由 則乃往漁于鬱陵島 遇風漂到者也 玆付倭船 送回貴島 盖八十二年前 言可容他人之冒占 以啓鬧釁耶 別無七十八年前 聞他人往漁而容許之理矣 今回答書中 言一島二名之狀 貴州之人 亦皆知之者 以八十二年前 東萊府答書 有礒竹島者 實我國之鬱陵島也之句乎 八十二年前書 七十八年前書 辭意不相合 今不可不請問之. 朝廷答曰 八十二年前甲寅 貴州頭倭一名 格倭十三名 以礒竹島大小形止探見事 持書契出來 朝廷以爲猥越而不許接待 只令本府府使朴慶業答書 其略曰 所謂礒竹島 實我國之鬱陵島 介於慶尙江原兩道海洋 而載在輿圖 烏可誣也 今雖廢棄 豈可容他人冒居 以啓鬧釁耶 貴島我國往來通行 唯有一路 此外則無論漂船眞仮 皆以賊船論斷 弊鎭及沿海將官 唯嚴守約束而已 唯願貴島 審區土之有分 知界限之難侵 各守信義 免致謬戾云 今此書辭 亦載於來書 疑問第四條 詳略雖異 大旨則同 若欲知此事源委 此一書足矣 其後三度漂倭 或稱往漁于鬱陵島 或稱漁採于竹島 而並付歸船 送回貴島 而不以犯越侵涉爲責 前後意義 各有所在 頭倭之來 責以信義者 以有侵越之情也 漂船之泊 只令順付者 沉溺餘生 乞得速還 則資送是急 不暇問他 與國之禮 有當然者 夫豈有容許我土之意乎 時遣公差 往來搜檢事 我國輿地勝覽 詳記新羅高麗及本朝 太宗世宗成宗三朝 屢遣官人於島中之事 且前日接慰官洪重夏下去時 貴州摠兵衛稱號人 言於譯官朴再興曰 以輿地勝覽觀之 鬱陵島果是貴國地云 此書乃貴州人所嘗見 而丁寧言說於我人者也 近間公差之不常往來 漁氓之禁其遠入 盖爲海路之多險故也 今者舍自前記載之書而不信 乃反以彼我人之不相逢値於島中爲疑 不亦異乎 一島二名云者 朴慶業書中 旣有礒竹島實我國鬱陵島之語 且洪重夏與正官倭相見時 正官乃發我國芝峰類說之說 類說曰 礒竹卽鬱陵島也 然則一島二名之說 雖本載於我國書 發其言端 實自貴州正官之口 答書中所謂一島二名之狀 非徒我國書籍之所記 貴州人亦皆知之者 乃指此而言也 此豈可疑而請問者乎 癸酉年(1693, 숙종 19)初度答書 有若以竹島與鬱陵島爲二島者然 此乃其時南宮之官 不詳故事之致 朝廷方咎其失言矣 此際貴州出送其書而請改故 朝廷因其請而改之以正初書之失 到今惟當一以改送之書 考信而已 初書旣以錯誤而改之 則何足爲今日憑問之端乎. 此書未及達 而眞重又自以己意 作爲文字 請於回答書啓 依此改之 萊府峻責却之 眞重遂進定行期於六月初十日 又賂書萊府曰 去年所受回答書中 有可疑之辭意 然再度書契 不爲回答 則貴國之意 未可窮知 故只請再度答書 旣受之答書 不爲疑問 而裁判平成常入和館傳刑部君 令某歸州之命 某仍以爲答書中可疑之辭意 不可不請問 五月十五日呈疑問書於府使 以請轉達于京都 以六月十五日爲乘船之期 欲貴國閱疑問書而察此事之情狀 某未乘船之前 再改回答書契之微意也 故五月廾三日 以某之意見 增損答書文字 錄爲一本 呈府使大人 以請轉達于京都 其後訓導來 述府使之意 其所言如不知是非者 某悟此事不成 因減所期之日數 以六月十日爲乘船之期 自呈疑問書 至于今二十五日 而貴國未賜開示者 卽是無可開示之辭也 旣無可開示之辭 則答書不可不改作 不爲改作而欲令帶去者 豈止輕侮弊州 實是侵陵本邦也 貴國輕侮弊州 侵陵本邦 則某之處此事 不可不直赴東萊府 面接府使大人 以見不辱君命之節義 然刑部君召某之意 有不可量知者 故含羞抱憤 以歸弊州 府使大人 可以憐察某之情也 某之歸州 不帶回答書契 使訓導別差封之 以授之館守 是乃欲刑部君遣使之日館守 授之使者 使者繼述某之志事 以決此事之成否者也 因惟兩國之和好 在留答書於和館之間 答書一越海 則兩國恐失百年之和好云云. 眞重雖發船到絶影島下 東萊府追送朝廷所答開示書 眞重乃復貽書萊府 大肆罵辱 其書曰 今日裁判送達開示書於船上 某謹讀之 開示不明 是所謂過而順之 又從而爲之辭者也 開示不明之趣 論之如左 一八十二年前書 卽述新羅高麗國初彼島屬于貴國之辭而已 彼島屬于本邦者 八十年來之事 則何以八十二年前書 爲盡今番一件之源委乎 開示書漂船之泊 只今順付者 沉溺餘生 乞得速還 則資送是急 不暇問他 與國之禮 有當然者 夫豈有容許我土之意乎云 是乃遁辭之窮也 所謂禮者 何禮乎 非禮之禮 大人不爲 某竊歎貴國無開示之辭也 摠兵衛所言 以輿地勝覽觀之之意也 輿地勝覽 卽二百年前之書籍 而彼島屬于本邦者 八十年來之事也 以輿地勝覽 爲今番一件之證驗 何其不察古今之變易乎 八十年來我國邊民 年年往漁于竹島 未曾與貴國公差相逢于彼島 而今開示書 以輿地勝覽爲證驗 則今之答書言 時遣公差往來搜檢者 豈不爲虛僞之說乎 不能開示某之所問 而却著書中辭意之虛僞者 某竊爲貴國恥之 某與朴再興相見時 發芝峰類說之說者 欲使貴國 知弊州有芝峰類說書也 今開示書 以類說爲一島二名之證驗 則某亦可以類說爲鬱陵島 屬于本邦之證驗 某曾考之類說自序 卽八十二年前所識也 類說亦有近聞倭人 占據礒竹島之語 知他人占據而容許之 知他人往漁而容許之 則是八十年來貴國自棄彼島 以令爲他人之有也 往事如是 而今番以我民往彼島 爲犯越侵涉者 不思之甚也 今之答書 與初度答書 辭意不相合 而貴國今歸罪於南宮之官 以隱前後答書辭意不相合之失 今番一件 固兩國之大事 則無南宮所作答書朝廷不閱之理矣 某今讀開示書 而深爲貴國恥之. 初眞重兩年留館 必期得請 自以使事不成 朝家循例供給之物 一不取用 穿弊乞食 辛苦萬狀 而終不變易焉 及至渡海之時 內取朝家前後所給白米一千八百六十石 貽書萊府 而還送之時 以眞重事 中外洶洶 皆以爲壬辰之變 不日將作 人心波蕩 靡有止泊 久而後乃定. 史臣曰 狡倭情狀 雖甚絶痛 旣答其一書 則又以嚴斥之義 答其第二書 顧何傷哉 南九萬執迷不回 終使堂堂國家 受無限罵辱於一差倭 可勝痛哉.


지난해에 접위관(接慰官) 유집일(兪集一)이 조정에 돌아왔는데, 차왜(差倭) 귤진중(橘眞重)이 오히려 제2서(第二書)의 회답(回答)을 요구하자, 남구만이 말하기를,

"교활한 왜(倭)의 정상이 절통(絶痛)하다. 어찌 또 그 제2서에 답서를 보낼 수가 있겠는가? 더구나 두 서신(書信)의 내용은 동일한 것이니, 한 번 답장을 했으면 충분하다."

하고,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귤진중이 오랫동안 머물면서 돌아가지 않고는 기어코 자신이 청한 것을 성사시키려 하였는데, 마침 왜국(倭國)에서 귤진중을 소환하여 귀국(歸國)하라고 하니, 귤진중이 드디어 6월 15일을 길을 떠나는 시기로 잡고 동래부에 편지를 보내 네 가지 조항을 힐문(詰問)하며 이를 조정에 전달해서 개시(開示)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 첫째 조항에 이르기를,

"답서(答書) 가운데, '수시로 공차(公差)를 파견하여 왕래하며 수색하고 검사하게 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인번(因幡) 백기(伯耆) 두 주(州)의 변민(邊民)들이 해마다 죽도(竹島)에 가서 고기잡이를 하여, 2주(州)가 해마다 그 섬의 복어(鰒魚)를 동도(東都)에 바치는데, 그 섬은 바람과 물결이 위험하므로, 해상(海上)이 안온(安穩)할 때가 아니면 왕래할 수가 없습니다. 귀국(貴國)에서 만일 실지로 공차(公差)를 파견한 일이 있다면 역시 분명히 바다가 안온할 때였을 것입니다. 대신군(大神君)으로부터 지금까지 81년 동안 우리 나라 백성들이 일찍이 귀국에서 공식적으로 파견한 사자(使者)들과 그 섬에서 서로 만났다는 사실을 상주(上奏)한 적이 없었는데, 이제 회답하는 서신 가운데는 '수시로 공차(公差)를 파견하여 왕래하며 수색하고 검사하게 하였다.'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였고, 둘째 조항에는 이르기를,

"회답하는 서신 가운데, '뜻밖에 귀국의 사람이 스스로 범월(犯越)하였다.' 하고, '귀국의 사람들이 우리 국경을 침범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양국(兩國)이 통호(通好)한 이후에 죽도(竹島)를 왕래하던 어민(漁民)들이 표류하여 귀국 땅에 이르면 예조 참의(禮曹參議)가 표류민(漂流民)을 되돌려 보내는 일로 폐주(弊州)에 서신을 보낸 것이 모두 세 차례입니다. 우리 나라의 변방 백성들이 그 섬에 가서 고기잡이한 실상은 귀국이 일찍이 알고 있던 바인데, 아주 오래 전에 우리 백성들이 그 섬에 가서 고기잡이한 것을 범월(犯越)이나 침섭(侵涉)한 것으로 여겼다면, 일찍이 종전 세 차례의 서신 가운데에서는 어찌하여 범월과 침섭의 뜻을 말하지 아니하였습니까?"

하였고, 세째 조항에는 이르기를,

"회답하는 서신 가운데, '동일한 섬이 두 가지 이름으로 되어 있는 사실은 다만 우리 나라 서적에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귀주(貴州)의 사람들도 또한 다 안다.'고 하였습니다. 귀국이 일찍이 동일한 섬이 두 가지 이름으로 되어 있는 사실이 서적에 기재되어 있는 것을 상고하고, 또 '동일한 섬이 두 가지 이름으로 되어 있는 사실을 폐주(弊州)의 사람들도 또한 다 안다.'고 생각하였다면, 첫번째의 답서(答書)에서는 어찌하여 '귀계(貴界)의 죽도(竹島), 폐경(弊境)의 울릉도(鬱陵島)'라고 말하였습니까? 만일 애당초 죽도가 바로 울릉도인 줄 알지 못하고 두 섬이 두 이름으로 되었다고 생각하였다면, 지금의 답서(答書)에서는 어찌하여, '동일한 섬이 두 가지 이름으로 되어 있는 실상은 다만 우리 나라 서적에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귀주(貴州)의 사람들도 또한 다 안다.'고 말하였습니까?"

하였고, 네째 조항에는 이르기를,

"삼가 살펴보건대, 82년 전 폐주(弊州)에서 동래부에 서신을 보내어 의죽도(礒竹島)를 자세히 조사하는 일을 알리니, 동래 부사의 답서(答書)에 이르기를, '본도(本島)는 바로 우리 나라의 이른바 울릉도(鬱陵島)라는 곳으로서 지금은 비록 황폐해져 있으나, 어찌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점거하는 것을 허용하여 시끄럽게 다투는 단서를 열겠는가?' 하였고, 그 두번째 답서도 또한 그러하였습니다. 그런데 78년 전에 본방(本邦)의 변민(邊民)이 그 섬에 고기잡이하러 갔다가 표류하여 귀국 땅에 이르렀을 때 예조 참의가 폐주(弊州)에 보낸 서신에, '왜인(倭人) 마다삼이(馬多三伊) 등 7명이 변방의 관리에게 체포되었기에 그들이 온 연유를 물어보니, 울릉도에 고기잡이하러 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온 자였다. 이에 왜선(倭船)에 태워 귀도(貴島)로 돌려보낸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82년 전에 '어찌 다른 사람이 함부로 점거하는 것을 허용해서 시끄럽게 다투는 단서를 열겠는가?'라고 말하였다면, 78년 전에 다른 사람이 가서 고기잡이한다는 것을 듣고 허용하였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회답하는 서신 가운데, '동일한 섬이 두 가지 이름으로 되어 있는 사실을 귀주(貴州)의 사람들도 또한 다 안다.'고 말한 것은 82년 전 동래부의 답서에 '의죽도(礒竹島)란 실은 우리 나라의 울릉도이다.'라고 한 문구가 있기 때문입니까? 82년 전의 서신과 78년 전의 서신의 내용이 서로 부합되지 않으니, 지금 청문(請問)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으므로, 조정(朝廷)에서 답하기를,

"82년 전 갑인년(1614년, 광해 6)에 귀주(貴州)에서 두왜(頭倭) 한 명과 격외(格倭) 13명이 의죽도(礒竹島)의 크고 작은 형편을 탐사(探査)하는 일로 서계(書契)를 가지고 나왔는데, 조정에서 이를 함부로 경계를 넘었다 하여 접대(接待)를 허락하지 않고, 다만 본부(本府)의 부사(府使)인 박경업(朴慶業)으로 하여금 답장을 하도록 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이른바 의죽도(礒竹島)란 실은 우리 나라의 울릉도로서, 경상(慶尙) 강원(江原) 양도(兩道)의 해양(海洋)에 끼여 있는데, 여도(輿圖)에 기재되어 있으니,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그리고 지금은 비록 폐기(廢棄)되어 있지만, 어찌 다른 사람이 함부로 점거하는 것을 허용해서 시끄럽게 다투는 단서를 열겠는가? 귀국(貴國)과 우리 나라가 왕래하고 통행하는 것은 다만 이 한 길이 있을 뿐이며, 이 밖에는 표선(漂船)의 진가(眞仮)를 따지지 않고 모두 적선(賊船)으로 논단(論斷)할 것이다. 폐진(弊鎭)과 연해(沿海)의 장관(將官)들은 다만 약속을 엄중히 지킬 뿐이니, 바라건대 귀도(貴島)는 구토(區土)의 분간이 있음을 살피고, 계한(界限)의 침략하기 어려움을 알아 각각 신의(信義)를 지켜서 사리(事理)에 어그러지는 일을 초래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하였고, 지금 이 서신의 내용은 보내온 서신에도 기재되어 있다. 의문을 제기한 네 가지 조항은 상세하고 간략한 것은 비록 다르지만 대지(大旨)는 동일한데, 만일 이 일의 전말(顚末)을 알고자 한다면 이 한장의 서신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 뒤에 세 차례에 걸쳐서 표류해 온 왜인이 있어 혹은 울릉도에 고기잡이하러 왔다고 하고, 혹은 죽도에 고기잡이하러 왔다고 하였는데, 아울러 귀선(歸船)에 태워 귀도(貴島)로 돌려보내고 범월(犯越) 침섭(侵涉)으로 책망하지 않았던 것은 전후의 일이 나름대로 각각 의의(意義)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두왜(頭倭)가 왔을 때 신의(信義)로써 꾸짖었던 것은 침월(侵越)의 정상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표류해 온 배가 정박하였을 때 다만 돌아가는 인편에 딸려 보내도록 하였던 것은 물에 빠져 죽을 뻔하다 살아남은 목숨이 빨리 송환시켜 주기를 원해 살려 보내는 일이 급하므로 다른 것은 물어볼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었으며, 이웃 나라와 친근(親近)하는 예의로서 당연한 일인 것이었다. 어찌 우리 국토를 허용할 의사가 있어서였겠는가? 수시로 공차(公差)를 파견하여 왕래하여 수색하고 검사한 일은, 우리 나라의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신라(新羅), 고려(高麗)와 본조(本朝)의 태종(太宗) 세종(世宗) 성종(成宗) 삼조(三朝)에서 여러 번 관인(官人)을 섬에 파견한 일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또 전일에 접위관(接慰官) 홍중하(洪重夏)가 내려갔을 때 귀주(貴州)의 총병위(摠兵衛)라 일컫는 사람이 역관(譯官) 박재흥(朴再興)에게 말하기를, '《여지승람》으로 본다면 울릉도는 과연 귀국(貴國)의 땅이다.'라고 하였다. 이 책은 바로 귀주(貴州)의 사람이 일찍이 본 바이고, 틀림없이 우리 나라 사람에게 말한 것이다. 요사이 공차(公差)가 항상 왕래하지 않고 어민(漁民)들에게 멀리 들어가는것을 금지시켰던 것은 대개 해로(海路)에 위험한 곳이 많기 때문이었다. 이제 예전에 기재한 서적은 버리고 믿지 않는 채 도리어 왜인과 우리 나라 사람이 섬 가운데에서 서로 만나지 않은 것을 의심하니,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동일한 섬인데 두 가지 이름으로 되어 있다.'고 한 것은 박경업(朴慶業)의 서신 가운데 이미 '의죽도(礒竹島)는 실은 우리 나라의 울릉도이다.'라고 한 말이 있다. 그리고 또 홍중하(洪重夏)가 정관(正官)인 왜인(倭人)과 서로 만났을 때 그 정관이 곧 우리 나라 《지봉유설(芝峰類說)》에 있는 내용을 발설하였는데, 《지봉유설》에는 이르기를, '의죽도는 바로 울릉도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동일한 섬인데 두 가지 이름으로 되어 있다는 설은 비록 본래 우리 나라 서적에 기재된 것이지만, 그 말이 발달된 것은 사실 귀주(貴州)의 정관(正官)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의 답서(答書) 가운데 이른바, '동일한 섬인데 두 가지 이름으로 되어 있는 사실은 다만 우리 나라 서적에 기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귀주(貴州)의 사람들도 또한 모두 다 알고 있다.'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 이것이 어찌 의문을 제기하여 청문(請問)할 만한 것이겠는가? 계유년(1693, 숙종 19)의 첫번째 회답한 서신에 죽도와 울릉도를 마치 두 섬으로 여긴 것 같은 점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그때 남궁(南宮, 예조의 별칭)의 관원이 고사(故事)에 밝지 못했던 소치로서, 조정이 바야흐로 그 실언(失言)을 나무랐었다. 그때에 귀주(貴州)에서 그 서신을 돌려보내어 고쳐 주기를 청했기 때문에, 조정에서 그 청에 따라 첫 서신의 잘못된 점들을 고쳐서 바로잡았으니, 오늘날에 있어서는 오직 마땅히 한결같이 고쳐서 보낸 서신을 상고해 믿어야 할 것이다. 첫 서신은 이미 착오로 인해서 개정하였으니, 그것이 어찌 족히 오늘의 빙고(憑考)해 질문할 단서가 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 서신이 미처 전달되기 전에 귤진중이 또 스스로 자기의 의사로 문장을 만들어 회답하는 서계(書啓)를 여기에 따라 고쳐 줄 것을 청하니, 동래부(東萊府)에서 준엄하게 꾸짖고 물리쳤다. 귤진중이 드디어 귀국하는 시기를 6월 10일로 앞당겨 정하고, 또 동래부에 서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지난해에 받은 회답서(回答書) 가운데 의심스러운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번째 서계(書契)에 대하여 회답을 않으니, 귀국(貴國)의 의사를 끝까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다만 두번째의 답서(答書)만을 요구하고, 이미 받은 답서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재판(裁判) 평성상(平成常)이 화관(和館)에 들어와서 형부군(刑部君)이 저에게 귀국하라고 하였다는 분부를 전달하였습니다. 저는 이내 답서 가운데 의문스러운 내용을 청문(請問)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5월 15일에 의문서(疑問書)를 부사(府使)에게 올려서 경도(京都)에 전달해 주기를 청하고, 6월 15일을 귀국하는 시기로 잡았습니다. 귀국(貴國)에서 의문서를 열람하여 이 일의 정상을 살펴서 제가 귀국하는 배를 타기 전에 회답하는 서계(書契)의 내용을 다시 고쳐 주기를 바랐기 때문에, 5월 23일에 저의 의견(意見)으로 답서 문자(答書文字)를 더하고 줄여 한 벌을 써서 부사 대인(府使大人)에게 올려 경도(京都)에 전달해 주기를 요망했습니다. 그 뒤에 훈도(訓導)가 와서 부사(府使)의 의사를 설명하였는데, 그의 말은 시비(是非)를 알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고 기약했던 날짜를 단축하여 6월 10일을 승선(秉船)하는 시기로 잡았습니다. 의문서(疑問書)를 올린 뒤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25일이 지났는데도, 귀국에서 거기에 대해 개시(開示)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해명할 만한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해명할 만한 말이 없다면 답서(答書)는 고쳐 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고쳐 쓰지 않고서 가져가게 하려는 것이 어찌 폐주(弊州)를 경멸하는 것으로 그치겠습니까? 사실은 본방(本邦)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귀국(貴國)에서 폐주를 경멸하고 본방을 업신여겼으니, 저는 이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곧바로 동래부(東萊府)로 달려가서 부사 대인(府使大人)을 면접(面接)하고, 임금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않는 절의(節義)를 보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형부군(刑部君)이 저를 소환할 뜻을 헤아려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수치와 분노를 품고 폐주로 돌아가는 것이니, 부사 대인께서는 저의 심정을 살필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폐주로 돌아감에 있어 회답하는 서계(書契)를 가져가지 않고 훈도(訓導)와 별차(別差)로 하여금 그것을 봉(封)해서 관수(館守)에게 주도록 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형부군(刑部君)이 사신을 보낼 때 관수가 그것을 사자(使者)에게 주어 그 사자가 저의 뜻과 일을 계술(繼述)하도록 해서 이 일의 성사 여부를 결정지으려는 것입니다. 인하여 생각해 보니, 양국(兩國)의 화호(和好)는 답서(答書)를 화관(和館)에 남겨 두는 데 있었습니다. 답서가 한 번 바다를 건너가게 되면 두 나라는 아마 백년(百年)의 우호(友好)를 상실할 듯합니다."

하였다. 귤진중(橘眞重)이 이미 배를 띄워 절영도(絶影島) 근처에 이르렀으나, 동래부에서 뒤쫓아가서 조정에서 개시(開示)하는 답서를 전달하니, 귤진중이 이에 다시 동래부에 서신을 보내 욕설을 마구 퍼부었다. 그 서신에 이르기를,

"오늘 재판(裁判)이 개시(開示)하는 서신을 선상(船上)에 보내왔기에 제가 삼가 읽어 보았더니, 개시(開示)한 바가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른바, '과오를 그대로 계속하고 또 뒤따라 변명을 한다.'는 것입니다. 개시가 분명하지 않은 취지를 논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82년 전의 서신은 바로 신라(新羅), 고려(高麗), 국초(國初)에 저 섬이 귀국(貴國)에 소속되었다는 내용을 기술하였을 뿐이요, 저 섬이 본방(本邦)에 소속된 것은 80년 이래의 일이니, 어찌 82년 전의 서신으로 이번 이 1건(件)의 전말(顚末)을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개시한 서신에, '표류해 온 배가 정박하였을 때 다만 돌아가는 인편에 태워 보내도록 하였던 것은 물에 빠져 죽을 뻔하다 살아남은 목숨이 빨리 송환해 주기를 원해 살려 보내는 일이 급하므로, 다른 것은 물어볼 여가가 없었기 때문이었으며, 이는 이웃 나라와 친근(親近)하는 예의로서 당연한 일인 것이었다. 어찌 우리 국토(國土)를 허용할 의사가 있어서이겠는가?'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궁색한 둔사(遁辭)입니다. 이른바 예(禮)라는 것이 무슨 예입니까? 예가 아닌 예는 대인(大人)이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삼가 귀국(貴國)의 개시(開示)한 내용이 없는 것을 탄식하는 바입니다. 총병위(摠兵衛)가 말한 바, '《여지승람(輿地勝覽)》으로 본다면 울릉도는 과연 귀국의 땅이다.'는 내용에 있어선 《여지승람》은 바로 2백 년 전의 서적이고 저 섬이 본방(本邦)에 소속된 것은 80년 이래의 일입니다. 그런데 《여지승람》으로 이번 이 건(件)의 증거로 삼으니, 어찌 그다지도 고금(古今)의 변역(變易)을 살피지 못하는 것입니까? 80년 이래로 우리 나라의 변방 백성들이 해마다 죽도(竹島)에 가서 고기잡이를 하였지만, 일찍이 귀국의 공차(公差)와 그 섬에서 서로 만난 적이 없었는데, 이제 개시(開示)하는 서신에는 《여지승람》을 증거로 삼았으니, 지금 답서(答書)에서 말한, '수시로 공차를 파견하여 왕래하며 수색하고 검사하게 하였다.'는 것이 어찌 허위(虛僞)의 설명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질문한 바에 대해서는 개시(開示)하지 못하고, 도리어 서신에다 허위를 드러내었으니, 저는 삼가 귀국을 위하여 수치스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제가 박재흥(朴再興)과 서로 만났을 때 《지봉유설(芝峰類說)》에 있는 설(說)을 발설했다는 것은 귀국(貴國)으로 하여금 폐주(弊州)에 《지봉유설》이란 책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개시한 서신에 《지봉유설》로 동일한 섬에 두 가지 이름이 있는 증거로 삼았는데, 그렇다면 저도 《지봉유설》로 울릉도가 본방(本邦)에 소속되었다는 증거로 삼을 수가 있습니다. 제가 일찍이 《지봉유설》의 자서(自序)를 상고해 보니, 바로 82년 전에 쓴 것이었습니다. 《지봉유설》에도 또한, '요사이 들으니 왜인(倭人)이 의죽도(礒竹島)를 점거했다고 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점거한 줄 알면서도 그것을 허용하고, 다른 사람이 가서 고기잡이를 하는 줄 알면서도 그것을 허용하였으니, 이는 80년 이래로 귀국이 스스로 그 섬을 버려서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도록 한 것입니다. 지난 일이 이와 같은데도 이번에 우리 백성들이 그 섬에 간 것을 가지고 범월(犯越)과 침섭(侵涉)으로 여기는 것은 매우 생각을 잘못한 것입니다. 이번의 답서(答書)와 첫번째의 답서가 내용이 서로 부합하지 않는데도, 귀국(貴國)에서는 지금 남궁(南宮)의 관원에게 잘못을 돌리고, 전후(前後)의 답서 내용이 서로 부합하지 않는 실수를 숨기고 있습니다. 이번의 이 사건은 진실로 양국(兩國)의 대사(大事)이니, 예조에서 지은 답서를 조정에서 살펴보지 않았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 개시한 서신을 읽고 매우 귀국을 위해 수치스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하였다. 처음에 귤진중이 2년을 왜관(倭館)에 머무르며 반드시 요구를 달성하려고 기약하였다. 그래서 스스로 사신의 임무를 성취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이유로 조정에서 준례에 따라 공급하는 물품을 일체 취용(取用)하지 않았고, 해진 옷을 입고 밥을 구걸해 먹으며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초를 겪었지만, 마침내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바다를 건너 귀국할 때에 이르러 조정에서 전후에 걸쳐 공급한 백미(白米) 1천 8백 60섬을 가져다 동래부로 서신과 함께 환송(還送)하였다. 이때 귤진중의 일로 인하여 중외(中外)가 흉흉(洶洶)하여 모두 말하기를, "임진년과 같은 변란이 멀지 않아 장차 일어날 것이다."고 하였다. 인심(人心)이 물결처럼 흔들려 불안에 차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안정되었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교활한 왜인(倭人)의 정상은 비록 매우 절통(絶痛)한 일이나 이미 첫번째 서신에 답하였으니, 또 엄중하게 물리치는 뜻으로 그 두번째 서신에 답하는 것이 생각건대 무슨 손상될 것이 있겠는가? 남구만이 잘못된 견해를 고집스럽게 바꾸지 않아 끝내 당당(堂堂)한 국가로 하여금 한낱 차왜(差倭)에게 무한한 매도(罵倒)와 치욕을 당하게 하였으니, 통탄스러움을 금할 수가 있겠는가?】


肅宗實錄 권30, 숙종 22년 8월 29일(壬子)條.(1696)

東萊人安龍福 興海人劉日夫 寧海人劉奉石 平山浦人李仁成 樂安人金成吉 順天僧雷憲 勝淡 連習 靈律 舟責 延安人金順立等 乘船往鬱陵島 轉入日本國伯耆州 與倭人相訟後 還到襄陽縣界 江原監司沈枰 捉囚其人等馳啓 下備邊司.


동래(東萊) 사람 안용복(安龍福), 흥해(興海) 사람 유일부(劉日夫), 영해(寧海) 사람 유봉석(劉奉石), 평산포(平山浦) 사람 이인성(李仁成), 낙안(樂安) 사람 김성길(金成吉)과 순천(順天) 중[僧] 뇌헌(雷憲), 승담(勝淡), 연습(連習), 영률(靈律), 단책(丹責)과 연안(延安) 사람 김순립(金順立) 등과 함께 배를 타고 울릉도(鬱陵島)에 가서 일본국(日本國) 백기주(伯耆州)로 들어가 왜인(倭人)과 서로 송사한 뒤에 양양현(襄陽縣) 지경으로 돌아왔으므로, 강원 감사(江原監司) 심평(沈枰)이 그 사람들을 잡아가두고 치계(馳啓)하였는데, 비변사(備邊司)에 내렸다.


肅宗實錄 권30, 숙종 22년 9월 2일(乙卯)條.(1696)

以江原監司沈枰狀啓 備邊司請安龍福等十一人 拿致京獄 明覈以處 允之.

강원 감사(江原監司) 심평(沈枰)의 장계(狀啓)에 따라 비변사(備邊司)에서 안용복(安龍福) 등 11인을 경옥(京獄)에 나치(拿致)하여 분명히 사핵(査覈)하여 처치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肅宗實錄 권30, 숙종 22년 9월 22일(乙亥)條.(1696)

時安龍福自東萊拿來 命備局堂上刑曹堂上各一員 齊會備局 究覈稟處 以其事關邊情也.

이때 안용복(安龍福)이 동래(東萊)에서 잡혀왔는데, 비국(備局)의 당상(堂上)과 형조(刑曹)의 당상 각각 1원(員)이 비국에 같이 모여서 구핵(究覈)하여 품처(稟處)하라고 명하였다. 그 일이 변정(邊情)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肅宗實錄 권30, 숙종 22년 9월 25일(戊寅)條.(1696)

備邊司推問安龍福等 龍福以爲 渠本居東萊 爲省母至蔚山 適逢僧雷憲等 備說頃年往來鬱陵島事 且言本島海物之豊富 雷憲等心利之 遂同乘船 與寧海篙工劉日夫等 俱發到本島 主山三峰 高於三角 自南至北 爲二日程 自東至西亦然 山多雜木鷹烏猫 倭船亦多來泊 船人皆恐 渠倡言 鬱島本我境 倭人何敢越境侵犯 汝等可共縛之 仍進船頭大喝 倭言吾等 本住松島 偶因漁採出來 今當還往本所 松島卽子山島 此亦我國地 汝敢住此耶 遂於翌曉 拕舟入子山島 倭等方列釜鬵煮漁膏 渠以杖撞破 大言叱之 倭等收聚載船 擧帆回去 渠仍乘船追趂 猝遇狂飆 漂到玉岐島 島主問入來之故 渠言頃年吾入來此處 以鬱陵子山等島 定以朝鮮地界 至有關白書契 而本國不有定式 今又侵犯我境 是何道理云 爾則謂當轉報伯耆州 而久不聞消息 渠不勝憤焥 乘船直向伯耆州 仮稱鬱陵子山兩島監稅將 使人通告本島 送人馬迎之 渠服靑帖裏 着黑布笠 穿皮鞋乘轎 諸人並乘馬 進往本州 渠與島主 對坐廳上 諸人並下坐中階 島主問何以入來 答曰 前日以兩島事 受出書契 不啻明白 而對馬島主 奪取書契 中間僞造 數遣差倭 非法橫侵 吾將上䟽關白 歷陣罪狀 島主許之 遂使李仁成 構䟽呈納 島主之父 來懇伯耆州曰 若登此䟽 吾子必重得罪死 請勿捧入 故不得稟定於關伯 而前日犯境倭十五人 摘發行罰 仍謂渠曰 兩島旣屬爾國之後 或有更爲犯越者 島主如或橫侵 並作國書 定譯官入送 則當爲重處 仍給糧 定差倭護送 渠以帶去有弊 辭之云 雷憲等諸人 供辭略同 備邊司啓請姑待後日登對禀處 允之.


비변사(備邊司)에서 안용복(安龍福) 등을 추문(推問)하였는데, 안용복이 말하기를,

"저는 본디 동래(東萊)에 사는데, 어미를 보러 울산(蔚山)에 갔다가 마침 중[僧] 뇌헌(雷憲) 등을 만나서 근년에 울릉도(鬱陵島)에 왕래한 일을 자세히 말하고, 또 그 섬에 해물(海物)이 많다는 것을 말하였더니, 뇌헌 등이 이롭게 여겼습니다. 드디어 같이 배를 타고 영해(寧海) 사는 뱃사공 유일부(劉日夫) 등과 함께 떠나 그 섬에 이르렀는데, 주산(主山)인 삼봉(三峯)은 삼각산(三角山)보다 높았고, 남에서 북까지는 이틀길이고 동에서 서까지도 그러하였습니다. 산에는 잡목(雜木), 매[鷹],까마귀, 고양이가 많았고, 왜선(倭船)도 많이 와서 정박하여 있으므로 뱃사람들이 다 두려워하였습니다. 제가 앞장 서서 말하기를, '울릉도는 본디 우리 지경인데, 왜인이 어찌하여 감히 지경을 넘어 침범하였는가? 너희들을 모두 포박하여야 하겠다.ꡑ'하고, 이어서 뱃머리에 나아가 큰소리로 꾸짖었더니, 왜인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본디 송도(松島)에 사는데 우연히 고기잡이 하러 나왔다. 이제 본소(本所)로 돌아갈 것이다.' 하므로, '송도는 자산도(子山島)로서, 그것도 우리 나라 땅인데 너희들이 감히 거기에 사는가?' 하였습니다. 드디어 이튿날 새벽에 배를 몰아 자산도에 갔는데, 왜인들이 막 가마솥을 벌여 놓고 고기 기름을 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막대기로 쳐서 깨뜨리고 큰 소리로 꾸짖었더니, 왜인들이 거두어 배에 싣고서 돛을 올리고 돌아가므로, 제가 곧 배를 타고 뒤쫓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광풍을 만나 표류하여 옥기도(玉岐島)에 이르렀는데, 도주(島主)가 들어온 까닭을 물으므로, 제가 말하기를, '근년에 내가 이곳에 들어와서 울릉도, 자산도 등을 조선(朝鮮)의 지경으로 정하고, 관백(關白)의 서계(書契)까지 있는데, 이 나라에서는 정식(定式)이 없어서 이제 또 우리 지경을 침범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하자, 마땅히 백기주(伯耆州)에 전보(轉報)하겠다고 하였으나,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습니다.

제가 분완(憤焥)을 금하지 못하여 배를 타고 곧장 백기주로 가서 울릉 자산 양도 감세(鬱陵子山兩島監稅)라 가칭하고 장차 사람을 시켜 본도에 통고하려 하는데, 그 섬에서 사람과 말을 보내어 맞이하므로, 저는 푸른 철릭[帖裏]를 입고 검은 포립(布笠)을 쓰고 가죽신을 신고 교자(轎子)를 타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말을 타고서 그 고을로 갔습니다. 저는 도주와 청(廳) 위에 마주 앉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중계(中階)에 앉았는데, 도주가 묻기를, '어찌하여 들어왔는가?' 하므로, 답하기를 '전일 두 섬의 일로 서계를 받아낸 것이 명백할 뿐만이 아닌데, 대마 도주(對馬島主)가 서계를 빼앗고는 중간에서 위조하여 두세 번 차왜(差倭)를 보내 법을 어겨 함부로 침범하였으니, 내가 장차 관백에게 상소하여 죄상을두루 말하려 한다.' 하였더니, 도주가 허락하였습니다. 드디어 이인성(李仁成)으로 하여금 소(疏)를 지어 바치게 하자, 도주의 아비가 백기주에 간청하여 오기를, '이 소를 올리면 내 아들이 반드시 중한 죄를 얻어 죽게 될 것이니 바치지 말기 바란다.' 하였으므로, 관백에게 품정(稟定)하지는 못하였으나, 전일 지경을 침범한 왜인 15인을 적발하여 처벌하였습니다. 이어서 저에게 말하기를, '두 섬은 이미 너희 나라에 속하였으니, 뒤에 혹 다시 침범하여 넘어가는 자가 있거나 도주가 혹 함부로 침범하거든, 모두 국서(國書)를 만들어 역관(譯官)을 정하여 들여보내면 엄중히 처벌할 것이다.' 하고, 이어서 양식을 주고 차왜를 정하여 호송하려 하였으나, 제가 데려가는 것은 폐단이 있다고 사양하였습니다."

하였고, 뇌헌 등 여러 사람의 공사(供辭)도 대략 같았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우선 뒷날 등대(登對)할 때를 기다려 품처(禀處)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肅宗實錄 권30, 숙종 22년 9월 27일(庚辰)條.(1696)

引見大臣備局諸臣 領議政柳尙運曰 安龍福不畏法禁 生事他國 罪不可容貸. 且彼國解送漂海人 必自對馬島 例也 而直自其處出送 不可不以此明白言及 而龍福姑待渡海譯官還來後 置斷宜矣. 左議政尹趾善亦以爲然 刑曺判書金鎭龜曰 臣以領相之言 往問右議政徐文重 以爲此事所關不輕 自古交隣之事 初似微細 末或至大 對馬島若聞龍福之事 必憾怒我國 宜先通報 而囚龍福等 以待彼中消息 然後論斷 判府事申翼相以爲 通告對馬島 似不可已 而聽其所言後處置 有同禀令 一邊通告 一邊處斷 似當云矣. 上問諸臣 諸臣皆以爲 龍福罪狀難貸 先通島主後 更觀事機而處斷爲宜. 上曰 龍福之罪 決不可貸 亦不可不通告馬島 渡海譯官還來後處之可矣. 尙運請問議于南九萬尹趾完. 允之. 尙運曰 李仁成製䟽 其罪亦重 而若論首從 仁成爲從 宜斷以次律 其餘只爲漁採而去 當置而不論矣. 上可之.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제신(諸臣)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유상운(柳尙運)이 말하기를,

"안용복(安龍福)은 법금(法禁)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른 나라에서 일을 일으켰으므로,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또 저 나라에서 표해인(漂海人)을 보내는 것은 반드시 대마도(對馬島)에서 하는 것이 규례인데, 곧바로 그곳에서 내보냈으니, 이것을 명백히 언급하지 않을 수 없으나, 안용복은 도해 역관(渡海譯官)이 돌아온 뒤에 처단하여야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좌의정(左議政) 윤지선(尹趾善)도 그렇게 말하였다. 형조 판서(刑曹判書) 김진귀(金鎭龜)가 말하기를,

"신(臣)이 영상(領相)의 말에 따라 우의정(右議政) 서문중(徐文重)에게 가서 물었더니, '이 일은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다. 예전부터 교린(交隣)에 관한 일은 처음에는 작은 듯하다가 끝에 가서는 매우 커진다. 대마도에서 안용복의 일을 들으면, 우리 나라에 원한(怨恨)을 품을 것이니 먼저 통보하고, 안용복 등을 가두고서 저들의 소식을 기다린 뒤에 논단(論斷)해야 할 것이다.' 하고 판부사(判府事) 신익상(申翼相)은, '대마도에 통고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을 듯하나, 그 말을 들은 뒤에 처치하면 품령(禀令)과 같으니, 한편으로 통고하고 한편으로 처단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제신(諸臣)에게 물었다. 제신이 다 말하기를,

"안용복의 죄상은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먼저 도주(島主)에게 통고한 뒤에 다시 사기(事機)를 보아서 처단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안용복의 죄는 결코 용서할 수 없고, 대마도에 통고하지 않을 수도 없다. 도해 역관이 돌아온 뒤에 처치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유상운이 남구만(南九萬), 윤지완(尹趾完)에게 문의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유상운이 말하기를,

"이인성(李仁成)은 소(疏)를 지었으므로 그 죄가 또한 무거우나, 수범(首犯), 종범(從犯)을 논한다면 이인성은 종범이 되니, 차율(次律)로 결단하여야 마땅합니다. 그 나머지는 고기잡이하러 갔을 뿐이니, 버려두고 논하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肅宗實錄 권30, 숙종 22년 10월 13일(丙申)條.

引見大臣備局諸臣 左議政尹趾善曰 安龍福事 問于在外大臣 則領敦寧尹趾完以爲 龍福私往他國 猥說國事 彼或認爲朝廷所使 則事甚可駭 論其罪犯 當殺無疑 而但念馬島之人 從前欺詐者 以我國不得通江戶之故耳 今知別有他路 則必將大生恐㤼 而聞龍福之被誅 則又喜其路之永塞矣 我國之誅龍福 以法則是 以計則非 廢法固不可 失計亦可惜 至於通報島中 梟示館外 以快狡倭之心 未免爲自損之歸云. 領府事南九萬以爲 龍福癸酉年 往鬱島 被虜於倭人 入去伯耆州 則本州成給鬱島永屬朝鮮公文 且多有贈物 出來時 路由馬島 公文贈物 盡爲馬島人所奪云 而不以其言爲必可信矣 今見龍福 再往伯耆州呈文 則前言似是實狀 龍福之冒禁再往 挑出事端之罪 固不容誅矣 然而對馬倭之仮稱鬱陵以竹島 虛托江戶之命 欲使我國 禁人往來於鬱島 其中間欺誑操弄之狀 今因龍福而畢露 此則亦一快事也 龍福之有罪無罪 當殺不當殺 自我國徐當議處 馬島之米布紙减分細ꝯ之事 皆不當擧論矣 至於事係鬱島變幻欺謾之狀 不可不因此機會 使萊府送書馬島 條列詰問 明辨痛斥 彼若更有巧飾不服之言 自我又送書以問曰 汝居兩國間 凡事之無信如此 龍福以漂風殘氓 無國書而自爲呈文 不可取信 固也 自朝廷將欲別遣使臣於日本 審其虛實 汝將何以處之云爾 則馬島倭 必大生恐㤼 服罪哀乞然後 龍福之罪 自我議其輕重而處之 鬱島事 使倭人不敢更有開口 則狡倭嘗試之計 庶可少縮 此乃上策 如不能然 亦宜使萊府 送書島主 先陳龍福擅自呈文之罪 更陳本島虛稱竹島之失 分數開說 委曲措辭 待其回答後處之可也 龍福斷罪之意 決不可語及於書契中 此爲中策 至若馬島用奸欺我之狀 則不問而置之 龍福呈文辨正之罪 則先論而殺之 惟求得免於島主之憾恨 其示弱甚矣 且島主之意 雖內以快其讎爲幸 外必不肯釋然 感謝於我 今後凡事 少有不如意者 必以龍福藉口 爲侮脅我國之語柄 不久 將以鬱島執言 而連續送差 我何以堪之乎 似是下策云. 在外大臣之意 皆以殺龍福爲不可 以南九萬之上策 似難輕議 不罪龍福而專責馬島 則有若自朝家使爲自然矣 安龍福李仁成姑爲仍囚 待首相出仕後處之 其餘脅從 旣傳生議 先爲放釋乎. 上曰 領相出仕後 啇議禀處 諸人先爲放送. 知事申汝哲曰 龍福之事 雖極痛駭 國家所不能爲之事 渠能爲之 功過足以相掩 不可斷以一罪也. 趾善曰 不殺龍福則末世奸民 必多生事於他國者 何可不殺也. 上曰 待領相出仕後處之.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제신(諸臣)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윤지선(尹趾善)이 말하기를,

"안용복(安龍福)의 일을 외방(外方)에 있는 대신에게 물었더니, 영돈녕(領敦寧) 윤지완(尹趾完)은 말하기를, '안용복은 사사로이 다른 나라에 가서 외람되게 나라의 일을 말하였는데, 그가 혹 조정(朝廷)에서 시킨 것처럼 하였다면 매우 놀라운 일이니, 그 죄를 논하면 마땅히 죽여야 하는 데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단지 대마도(對馬島) 사람이 전부터 속여 온 것은 우리 나라에서 강호(江戶)와 교통하지 못하였기 때문인데, 이제 다른 길이 따로 있는 것을 알았으니, 반드시 크게 두려움이 생길 것이나, 안용복이 주살(誅殺)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또 그 길이 영구히 막힌 것을 기뻐할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안용복을 죽이는 것이 법으로는 옳겠지만 계책으로는 그릇된 것이므로, 법을 폐기하는 것은 진실로 불가(不可)하나 계책을 잃는 것도 아까운데, 대마도에 통보하고 왜관(倭館) 밖에 효시(梟示)하여 교활한 왜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데 이르러서는 스스로 손상하는 데로 돌아가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영부사(領府事) 남구만(南九萬)은 말하기를, "안용복이 계유년(1693년, 숙종 19)에 울릉도(鬱陵島)에 갔다가 왜인에게 잡혀 백기주(伯耆州)에 들어갔더니, 본주(本州)에서 울릉도는 영구히 조선에 속한다는 공문(公文)을 만들어 주고 증물(贈物)도 많았는데, 대마도를 거쳐서 나오는 길에 공문과 증물을 죄다 대마도 사람에게 빼앗겼다 하나, 그 말을 반드시 믿을 만하다고 여기지는 않았습니다마는, 이제 안용복이 다시 백기주에 가서 정문(呈文)한 것을 보면 전의 말이 사실인 듯합니다. 안용복이 금령(禁令)을 무릅쓰고 다시 가서 사단(事端)을 일으킨 죄는 진실로 주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마도의 왜인이 울릉도를 죽도(竹島)라 거짓 칭하고, 강호의 명이라 거짓으로 핑계대어 우리 나라에서 사람들이 울릉도에 왕래하는 것을 금지하게 하려고 중간에서 속여 농간을 부린 정상이 이제 안용복 때문에 죄다 드러났으니, 이것은 또한 하나의 쾌사(快事)입니다. 안용복에게 죄가 있고 없는 것과 죽여야 하고 죽이지 말하야 하는 것은 우리 나라에서 천천히 의논하여 처치할 것이고, 대마도에 주는 쌀, 베, 종이를 줄이는 자질구레한 일은 다 거론하는 것이 마땅하지 못하나, 울릉도를 변환(變幻)하고 속인 정상에 관계되는 일에 이르러서는 이 기회로 인하여 동래부(東萊府)로 하여금 대마도에 글을 보내어 조목으로 열거하여 힐문해서 명확하게 분별하여 매우 배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들이 만약에 다시 교묘히 꾸며서 승복하여 말하지 않는다면, 우리 나라에서 또 글을 보내어 묻기를, '너희가 두 나라 사이에 있으면서 모든 일에 이렇게 신의가 없으니, 안용복이 풍랑에 표류한 잔약(殘弱)한 백성으로서 국서(國書)가 없이 스스로 정문(呈文)한 것은 진실로 믿을 수 없으므로, 조정에서 따로 사신(使臣)을 일본에 보내어 그 허실(虛實)을 살피게 하려는데, 너희는 장차 어떻게 처치하겠는가?' 하면, 대마도의 왜인이 반드시 크게 두려움이 생길 것입니다. 그런 뒤에 안용복의 죄를 우리 나라에서 그 경중을 의논하여 처치하고, 울릉도의 일은 왜인이 감히 다시 입을 열지 못하게 하면, 교활한 왜인이 시험하여 보려는 생각을 조금 줄일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상책입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또한 동래부로 하여금 도주(島主)에게 글을 보내어 먼저 안용복이 마음대로 정문한 죄를 말하고, 다시 본도(本島)에서 죽도라고 거짓 칭한 잘못을 말하되, 이치를 가려서 타이르고 자세히 조사(措辭)하고서 그 회답을 기다란 뒤에 처치하는 것이 옳겠고, 안용복을 단죄(斷罪)한다는 뜻은 결코 서계(書契) 가운데에 말하여서는 안되니, 이것이 중책(中策)입니다. 대마도에서 간사한 술책으로 우리를 속인 정상은 힐문하지 않고서 버려두고, 안용복이 정문하여 변정(辨正)한 죄는 먼저 논하여 죽인다면, 도주의 원한을 면하고자 하는 것으로 매우 약한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또 도주의 뜻은, 속으로는 원한을 푼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더라도 겉으로는 반드시 분명하게 우리에게 감사해 하지 않을 것이니, 이 뒤로 모든 일에 조금이라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안용복의 일을 핑계거리로 삼아 우리 나라를 모욕하고 협박하는 말의 근본을 삼고 오래지 않아 울릉도의 일로 말을 고집하여 잇달아 차인(差人)을 보낼 것인데, 우리가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이것은 하책(下策)일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외방에 있는 대신의 뜻은 다 안용복을 죽이는 것을 옳지 않다 하나, 남구만의 상책은 쉽사리 의논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안용복을 죄주지 않고 오로지 대마도를 꾸짖으면, 마치 국가에서 시킨 것인 듯할 것이니, 안용복, 이인성(李仁成)은 우선 그대로 가두어 두었다가 수상(首相)이 출사(出仕)하기를 기다린 뒤에 처치하고, 그 나머지 위협 때문에 따른 자는 이미 살리는 의논에 붙였으니, 먼저 석방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상(領相)이 출사한 뒤에 상의하여 품처(禀處)하고, 사람들은 먼저 놓아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지사(知事) 신여철(申汝哲)이 말하기를,

"안용복의 일은 매우 놀랍기는 하나, 국가에서 못하는 일을 그가 능히 하였으므로 공로와 죄과가 서로 덮을 만하니, 일죄(一罪)로 결단할 수 없겠습니다."

하고, 윤지선이 말하기를,

"안용복을 죽이지 않으면, 말세(末世)의 간사한 백성 중에 반드시 다른 나라에서 일을 일으키는 자가 많아질 것이니, 어찌 죽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상이 출사한 뒤에 처치하라."

하였다.


肅宗實錄 권30, 숙종 22년 10월 23일(丙午)條.

引見大臣備局諸臣 … 承旨兪集一曰 臣頃年奉使東萊也 推問安龍福 以爲伯耆州所給銀貨及文書 馬島人劫奪 今番渠之呈于伯耆州也 以爲馬島人僞稱以二千金贖渠 出送本國爲辭 而欲徵其銀於本國 前後之言 大相違盭 且馬島人 元無以贖銀來徵之事 壬戌約條 亦涉秘密 龍福何以得聞 且倭人皆以爲 竹島卽伯耆州食邑 必不以龍福一言 快稱朝鮮之地 而龍福呈文中 屢稱鬱島之爲本國地 而倭人問答及出送龍福文書 一不擧論 此等事情 極涉可疑 更覈得實後 論罪宜矣. 上從之.


승지(承旨) 유집일(兪集一)이 말하기를,

"신(臣)이 근년 동래(東萊)에 봉사(奉使)하였을 때에 안용복(安龍福)을 추문(推問)하였더니, 말하기를, '백기주(伯耆州)에서 준 은화(銀貨)와 문서(文書)를 대마도(對馬島) 사람이 겁탈하였다.' 하였는데, 이번 그가 백기주에 정문(呈文)한 데에는, '대마도 사람이 2천 금(金)으로 나를 속(贖)하여 본국(本國)에 내보낸다고 거짓말을 하고 그 은은 본국에서 받겠다고 하였다.'고 하였으니, 전후에 한 말이 매우 어그러집니다. 또 대마도 사람은 본디 속은(贖銀)을 와서 거둔 일이 없고, 임술 약조(壬戌約條)도 비밀에 관계되는데, 안용복이 어떻게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또 왜인은 모두 죽도(竹島)가 백기주의 식읍(食邑)이라 하므로, 안용복이 한 번 말하였다 하여 조선 땅이라 쾌히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안용복의 정문 가운데에는 울릉도(鬱陵島)는 본국 땅이라고 여러 번 말하였으나, 왜인이 문답한 문서와 안용복을 내보낸다는 문서에는 일체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정들은 매우 의심스러우니, 다시 핵사(覈査)하여 실정을 알아 낸 뒤에 죄를 논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肅宗實錄 권31, 숙종 23년 2월 14일(乙未)條.(1697)

東萊府使李世載狀啓言 館倭言前島主 以竹島事 再送大差 及其死後 時島主入去江戶 言于關白以竹島近朝鮮 不可相爭 仍禁倭人之往來 周旋之力多矣 以此啓聞 成送書契如何 又問去秋貴國人有呈單事 出於朝令耶. 臣曰 若有可辨 送一譯於江戶 顧何所憚 而乃送狂蠢浦民耶. 倭曰 島中亦料如此 不送差倭 此亦別作書契答之云. 書契當否 令廟堂禀處 備邊司回啓曰 竹島卽鬱陵島一名 是我國地 載於輿地勝覽 日本亦所明知 而前後送差 請改書契措語 未知其間情弊 今乃以禁勿往來 歸功於時島主 顯有引咎之意 朝家大體 不必更責前事 至於漂風愚民 設有所作爲 亦非朝家所知 俱非成送書契之事 請以此言及館倭. 允之.


동래 부사(東萊府使) 이세재(李世載)가 장계(狀啓)하기를,

"관왜(館倭)가 말하기를, '전(前) 도주(島主)가 죽도(竹島)의 일로 두 번이나 대차(大差)를 보내었으며, 그가 죽은 뒤에 이르러서는 현재의 도주가 강호(江戶)에 들여보내어 관백(關白)에게, 「죽도는 조선(朝鮮)에 가까우니 서로 다툴 수 없다.」는 것을 말하게 하고, 인하여 왜인들의 왕래를 금하였으니, 주선(周旋)한 힘이 많았습니다. 이로써 계문(啓聞)하여 서계(書契)를 만들어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또 묻기를, '지난 가을에 귀국(貴國)의 사람이 단자(單子)를 바친 일이 있었는데, 조정의 명령에서 나온 것입니까?'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만약 분변할 수만 있다면 한 사람의 역관(譯官)을 강호(江戶)에 보낼 터인데, 돌아보건대 무엇을 꺼려하여 미치광스럽고 어리석은 포민(浦民)을 보내겠는가?' 하니, 관왜가 말하기를, '도중(島中)에서도 이와 같이 헤아리고 차왜(差倭)를 보내지 않는 것이니, 이것도 따로 서계(書契)를 만들어 답을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서계(書契)를 보내는 것이 타당한지 않은지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禀處)하게 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회계(回啓)하기를,

"죽도(竹島)는 바로 울릉도(鬱陵島)의 다른 이름이며, 이는 우리 나라의 땅으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기재되어 있는 것을 일본(日本)에서도 분명하게 알고 있는데, 전후(前後)에 차왜(差倭)를 보내어 서계(書契)의 내용을 고쳐 달라고 청하니, 그간의 실정과 폐단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왜인들을 왕래하지 못하도록 금하는 것을 현재의 도주(島主)에게 공(功)을 돌리니, 인책(引責)하는 의도가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으나, 조정의 대체(大體)로 보아 지난 일을 다시 책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풍랑에 표류된 어리석은 백성에 이르러서도 설사 저지른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역시 조정에서 알 바가 아니니, 모두 서계를 만들어 보낼 일이 아닙니다. 청컨대 이것을 관왜(館倭)에게 말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肅宗實錄 권31, 숙종 23년 3월 27일(戊寅)條.(1697)

引見大臣備局諸臣 領議政柳尙運右議政崔錫鼎禀奏文撰出事 … 尙運曰 安龍福在法當誅 而南九萬尹趾完 皆以爲不可輕殺 且島倭送書 歸罪前島主 而鬱島則禁倭往來 無他端 而猝然自服 似不無所由 龍福不可輕先處斷 其意盖以倭人折服 爲龍福之功也. 上意亦以爲然 命减死定配. 憲府屢啓爭之 不從.


유상운(柳尙運)이 말하기를,

"안용복(安龍福)은 법으로 마땅히 주살(誅殺)해야 하는데, 남구만(南九萬), 윤지완(尹趾完)이 모두 가벼이 죽일 수 없다고 하고, 또 도왜(島倭)가 서신을 보내어 죄를 전(前) 도주(島主)에게 돌리고, 울릉도(鬱陵島)에는 왜인의 왕래를 금지시켜 다른 흔단이 없다고 하면서 갑자기 자복(自服)하였으니, 까닭이 없지 않을 듯하므로, 안용복은 앞질러 먼저 처단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뜻은 대체로 왜인의 기를 꺾어 자복시킨 것을 안용복의 공(功)으로 여긴 것입니다."

하니, 임금의 뜻도 그렇게 여겨 감사(減死)하여 정배(定配)하도록 명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여러 번 아뢰면서 다투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肅宗實錄 권31, 숙종 23년 4월 13일(壬戌)條.(1697)

引見大臣備局諸臣 … 尙運曰 鬱陵島事 今已明白歸一 不可不間間送人巡撿. 上命間二年入送.

유상운이 말하기를,

"울릉도(鬱陵島)에 대한 일은 이제 이미 명백하게 한 곳으로 귀착되었으니, 틈틈이 사람을 보내어 순시하고 단속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2년 간격으로 들여보내도록 명하였다.


肅宗實錄 肅宗 28年(壬午, 1702년) 5月 己酉(28일)條.

三陟營將李浚明 倭譯崔再弘 還自鬱陵島 獻其圖形及紫檀香․靑竹․石間硃․魚皮等物. 鬱陵島間二年 使邊將輪回搜討 已有定式 而今年三陟當次 故浚明乘船于蔚珍竹邊津 兩晝夜而還歸 比濟州倍遠云.

삼척 營將 李浚明(이준명)과 倭譯 崔再弘이 울릉도에서 돌아와 그곳의 圖形(도형)과 紫檀香(자단향)․靑竹(청죽)․石間朱(석간주)․魚皮(어피) 등의 물건을 바쳤다. 울릉도는 2년을 걸러 邊將을 보내어 번갈아 가며 찾아 구하는 것이 이미 定式으로 되어 있었는데, 올해에는 三陟이 그 차례에 해당되기 때문에 이준명이 蔚珍 竹邊津에서 배를 타고 이틀낮밤 만에 돌아왔는데, 제주보다 갑절이나 멀다고 한다.


肅宗實錄 肅宗 31年(乙酉, 1705년) 6月 乙巳(13일)條.

鬱陵島搜討回還時 平海等官軍官黃仁建等十六名 渰死. 上命擧恤典.

울릉도를 搜討하고 돌아올 때에 평해 등 고을의 군관 黃仁建(황인건) 등 16명이 익사하였는데, 임금이 恤典(휼전)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肅宗實錄 肅宗 34年(戊子, 1708년) 2月 甲辰(27일)條.

副司直金萬埰上疏 ... 仍陳鬱陵島設鎭 以作海防 慶尙左兵營 移之安東 移置水使於今之左兵營等事. 上 褒以爲國之誠 疏本下廟堂 使之稟處.

부사직 金萬埰(김만채)가 상소하여, (...) 말하기를, 인하여 울릉도에 鎭을 설치하여 海防을 만들고, 慶尙左兵營을 安東에 옮기고, 水使를 지금의 좌병영에 옮겨 설치하는 것 등의 일을 진달하였다. 임금이 나라를 위하는 정성을 기리고 疏本을 묘당에 내리어 품처하도록 하였다.


肅宗實錄 肅宗 36年(庚寅, 1710년) 10月 甲子(3일)條.

司直李光迪 上疏屢萬言 極論固守都城之計 仍陳內守七策 外禦六策 其內守之策七條 (...) 五曰 遣御使巡撫海防也 近來海防之疎虞 無處不然 舟楫雖存 櫓卒不備 浦戶流亡 立代無人 僉使萬戶 雖受防布 而一自減數之後 絶無代立者. 至如永宗鎭所屬水卒 散在遠地 島中浦民 多屬於各衙門之陸軍. 湖西水虞候所管戰船 皆在數日程海港 而張空券瞭望而已. 且東海 古有水宗 而船舶不通 故革罷諸鎭矣. 數十年來 水宗大變 而倭船比比魚採於鬱陵島 誠可寒心. 亟宜分遣御使於東西海浦 舟楫之不完者 申飭改造 櫓卒之未備者 督令責立 革罷之鎭依前復說 已減之防布 依前準給 水軍之在山郡者 從便換定 爲今日之急務也.


사직 李光迪(이광적)이 상소하여 수만 마디의 말로 都城을 굳게 지키는 계책을 극론하고, 이어 內守하는 일곱 가지 방책과 外禦(외어)하는 여섯 가지 방책을 진계하였다. 내수하는 일곱 조목에 이르기를, (...)

5. 御史를 보내어 海防을 巡撫하게 하는 일입니다. 근래에 해방이 소홀하여 그렇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舟楫(주즙)이 비록 있다 하더라도 櫓卒(노졸)이 갖추어지지 아니하였고, 浦戶(포호)가 流亡(유망)하였으나 대신 세울 사람이 없습니다. 僉使(첨사)․萬戶(만호)가 비록 防布(방포)를 받으나, 한 번 그 액수를 줄인 후부터는 전혀 대신 설 자가 없습니다. 永宗鎭에 소속된 水卒과 같은 경우에 이르러서는 먼 지방에 흩어져 있고, 섬 안의 浦民은 각 아문의 육군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호서의 水軍虞侯가 관장하는 전선은 모두 여러 날 노정의 항구에 있어 맨주먹으로 요망할 따름입니다. 또 동해에는 예부터 水宗이 있어 선박이 통행하지 않으므로, 여러 鎭을 혁파하였는데, 수십년 이래로 수종이 크게 변하여 왜선은 자주 울릉도에 들어가 어물을 채취하니, 진실로 한심하게 여길 만합니다. 마땅히 빨리 어사를 동해와 서해의 해변에 나누어 보내어서, 舟楫이 완비되지 못한 것은 신칙해서 개조하도록 하고, 노졸이 갖추어지지 못한 경우는 독촉해서 세우도록 할 것이며, 혁파한 鎭은 전례에 의하여 다시 설치하고, 이미 줄인 防布는 전례에 의하여 준급하며, 山郡에 있는 水軍은 순편함에 따라 바꾸어 정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입니다.


肅宗實錄 肅宗 40年(甲午, 1714년) 7月 辛酉(22일)條.

備邊司因江原道暗行御史趙錫命書啓 令江原道臣守令 講究軍保 團束節目 蓋錫命 以爲平蔚之距鬱陵島不遠 倭往來頻數 而東沿一帶八百餘里之間 只有數鎭海防 疎虞誠甚可慮云故也.

비변사에서 강원도 암행 어사 趙錫命의 서계로 인하여 강원도의 道臣과 수령으로 하여금 軍保를 단속하는 절목을 강구하게 하였다. 대개 조석명이 "平海․蔚珍은 울릉도와 거리가 멀지 않고 倭船의 왕래가 빈번한데, 관동 연해의 일대 8백여 리 사이에 다만 두서너 鎭營이 있을 뿐이니, 海防의 허술함이 참으로 매우 염려가 된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肅宗實錄補闕正誤 肅宗 40年(甲午, 1714년) 7月 辛酉(22일)條.

江原道御使趙錫命 論嶺東海防疎虞狀略曰 詳聞浦人言 平海蔚珍 距鬱陵島最近 船路無少礙 鬱陵之東 島嶼相望 接于倭境. 戊子壬辰 異攘帆穡 漂到高杆境 倭船往來之頻數 可知. 朝家雖以嶺海之限隔 謂無可憂 而安知異日生釁之必由嶺南 而不由嶺東乎. 綢繆之策 不容少緩. 廟堂請依其言 飭江原道 團束軍保.


강원도 어사 趙錫命이 영동 지방의 海防의 허술한 상황을 논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浦人의 말을 상세히 듣건대, ‘平海․蔚珍은 울릉도와 거리가 가장 가까와서 뱃길에 조금도 장애가 없고, 울릉도 동쪽에는 섬이 서로 잇달아 倭境에 접해 있다'고 하였습니다. 무자년과 임진년에 모양이 다른 배가 高城과 杆城 지경에 표류해 왔으니 倭船의 왕래가 빈번함을 알 수 있습니다. 朝家에서는 비록 산과 바다가 격해 있어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하지만, 후일의 변란이 반드시 영남에서 말미암지 않고 영동으로 말미암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방어의 대책을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고 하였다.

묘당에서 그 말에 따라 강원도에 신칙하여 軍保를 단속할 것을 청하였다.


肅宗實錄 肅宗 43年(丁酉, 1717년) 3月 壬申(17일)條.

江原監司李晩堅馳啓 乞停今年鬱陵島搜討 備局覆奏以爲 近年搜討 不過往見空島 當此凶歲 不可重貽民弊 請故令停止. 上從之.

강원 감사 李晩堅(이만견)이 치계하여 올해에 울릉도를 搜討하는 일을 정지하기를 청하였는데, 備局에서 覆奏(복주)하기를, “근년에 수토하는 것은 빈 섬을 가서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이런 흉년에 민폐를 많이 끼칠 수는 없으니, 우선 정지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肅宗實錄 肅宗 44年(戊戌, 1718년) 2月 己酉(30일)條.

王世子引接大臣備局諸宰. 領議政金昌集言 咸鏡監司李坦狀本 乞令內寺奴婢 納米免賤 以補賑資 宜許其請. 江原監司金相稷狀本言 目今賑政方張 請姑停鬱陵島年例搜討 亦宜許之. 東萊府使趙榮福 狀陣通信使及期差出之意 宜分付該曺 姑待接慰官文報 差出使臣. 世子竝從之.


왕세자가 대신들과 備局의 여러 재상들을 인접하였다. 영의정 金昌集이 아뢰기를, "함경도 감사 李坦(이탄)의 狀本(장본)에 ‘內寺(내시)의 노비들에게 바치고 면천하게 하여 그 곡식을 賑濟(진제)할 밑천에 보충하게 해 주소서’ 하였으니, 그 청을 허락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강원도 감사 金相稷(김상직)의 장본에 ‘지금 진휼하는 정사가 바야흐로 확장되고 있으니, 잠시 울릉도를 연례로 授討하는 것을 정지시켜 주소서’ 하였으니, 또한 허락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동래 부사 趙榮福(조영복)의 장본에 통신사를 시기에 맞추어 차출하라는 내용으로 호소하였으니, 마땅히 해조에 분부하소서. 그리고 우선 접위관의 보고서를 기다렸다가 사신을 차출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세자가 모두 그대로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