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于山則倭所謂松島也"라는 여지지의 인용은 우산도가 독도라는 증거

강계고(疆界考, 18세기 중엽, 신경준) 울릉도條

愚按輿地志云 一說于山鬱陵本一島 而考諸圖志二島也 一則倭所謂松島 而盖二島 俱是于山國也
필자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여지지에 이르길, "일설에 우산 울릉이 한 섬이다"라고도 한다. 그러나 여러 도지(圖志)를 살펴보면, 두 섬이다. 우산도는 왜인들이 송도라고 일컫는 섬으로서, 두 섬은 분명히 다른 섬이다. 이 우산과 울릉을 합쳐 우산국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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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기요람(萬機要覽, 1808년) 軍政編四 해방(海防) 동해(東海)條

輿地志云 鬱陵于山皆于山國地, 于山則倭所謂松島也 
여지지(輿地志)에, ‘울릉ㆍ우산은 다 우산국(于山國) 땅이며, 이 우산을 왜인들은 송도(松島)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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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사(海東繹史) 속편 15권 1책 해동역사지리고(海東繹史地理考, 1823, 한치윤 조카 한진서가 속편으로 완성)

文獻備考云 鬱陵于山皆于山國地 于山島卽倭所謂松島也
문헌비고에 울릉 우산이 모두 우산국땅인데 우산도는 왜가 말하는 소위 송도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1908년 동국문헌비고 보수) 輿地考 울릉도조

輿地志云 鬱陵于山皆于山國地 于山則倭所謂松島也
여지지(輿地志)에 이르길, 울릉과 우산은 모두 우산국지(于山國地)인데, 우산(于山)은 곧 왜(倭)가 말하는 바의 송도(松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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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계고'를 저술한 신경준은 그 후, '동국문헌비고 여지고'에서도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를 '해동역사'에서 재인용하고 있으며, '중보문헌비고 여지고'는 신경준의 '동국문헌비고 여지고'를 보수한 것이다. 그러므로 위 4기록에서의 원전(原傳)은 모두 여지지(輿地志)가 된다. 일본 측에서는 '여지지'가 현존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위 기록 모두를 부정하려 하고 있다. 강계고를 저술한 신경준이 본래 기록을 개찬했다는 주장이다.

실존하지 않는 여지지(輿地志)의 기록에 포함된 일도설(一島說)
 그런데, 여기서 강계고 울릉도조를 보면, 중요한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실존하지 않는 여지지(輿地志)의 기록에 관한 것이다. 우산과 울릉이 두 섬이라는 2島說 뿐 아니라, 고려사지리지등에 언급된 一島說(울릉과 우산이 한 섬이라는)도 같이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록 당시의 인식에 맞는 여지지의 기록만을 채택
 신경준의 강계고에서는 분명하게 우산도가 왜인들이 송도라고 일컫는다는 말을 자신의 소견으로서 쓰고 있다. 또한, 후대 특히 조선정부의 관찬기록인 만기요람(萬機要覽)이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서 역시 一島說에 대한 언급은 없고, 우산과 울릉이 2섬이며, 우산도는 왜인이 송도라고 한다는 여지지의 기록만을 주기 했다.

 이로 보아 후대의 울릉도와 우산도를 거론한 기록은 책 저자의 면밀한 검토 후의 주기내용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만기요람은 왕명에 의해 편찬된 것으로서 통치자인 국왕이 보도록 만들어진 책이며, 증보문헌비고는 조선왕조의 민족백과사전이다.

 그런데 일본 측에서는 여지지의 기록에 1島說만이 존재한 것처럼 확정짓고 있다. 본문에서 '一說于山鬱陵本一島'라고 한 것은 여지지의 기록에 1島說뿐만 아니라 2島說까지 기록되어 있었다는 것이 된다. 신경준은 여지지의 울릉·于山 1島說과 2島說 중 당시의 여러 도지(圖志)를 살펴보고 다른 두 섬이 분명하며, 우산도는 일본에서 말하는 松島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일설(一說)에 우산과 울릉이 본래 한 섬이라고 했다면, 앞선 문구에 2도설을 먼저 설명한 후에 뒤이어 일도설을 설명했거나, 주기를 달아 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여지지에서 역시 당시 조선의 주축이 되었던 울릉도에 대한 지리적 인식으로 울릉과 우산을 두 섬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18세기에 제작된 한국의 거의 모든 지도에서 울릉과 우산 두 섬을 그려넣은 것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다만, 울릉도와 그 주변 섬에 대한 고대의 명칭이 '우산국'이었기에 간혹 우산이란 울릉의 옛 명칭이었다는 기록을 참고해 울릉 이외에 우산은 따로 존재하는 섬이 아닌, 같은 섬임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어 그들의 의견을 주기한 것이었다. 19세기말 울릉도 개척을 위해 울릉도 검찰을 했던 이규원까지도 1882년 4월 고종황제와 대면한 자리에서 우산도를 울릉도로 발언한 기록이 고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물론 울릉도에 도착해 이규원은 이런 자신의 견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게 된다.

 신경준은 당시의 여러 도지(圖志)를 살펴본 결과 우산도가 울릉도와는 다른 섬으로, 죽도(Jukdo)가 아닌 일본인들이 松島라고 부르던 독도가 틀림없음을 확인한 것이다. 따라서 신경준의 기록은 18세기 후반기의 조선의 울릉도 및 그 주변 섬에 대한 대표적인 인식이었음에 분명하다.

 유형원(柳馨遠)이 편찬한 전국지리지인 여지지(輿地志, 1622~1673)는 증보문헌비고에서도 거론한 것으로 보아 20세기 초까지 실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는 증보문헌비고가 동국문헌비고를 보수한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적어도 만기요람이 편찬될 당시인 19세기 초반(純祖 8년, 1808)까지는 실존했던 지리서이다. 그런데, 만기요람(萬機要覽)에서 역시 일도설(1島說)에 대한 기록을 배제하고 당시의 지리적 인식에 맞는 이도설(2島說)만을 주기했다. 일본 측에서는 신경준 한 사람이 본래 기록을 개찬한 것처럼 왜곡하고 있으나, 후대 조선왕조의 기록에 신경준과 같은 소견을 보이는 주기내용이 등장한다는 점을 볼 때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임을 알 수 있다.

기록 당시의 지리적 인식에 맞는 여지지의 기록만을 채택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기록이 증보문헌비고 '울릉도'의 기록이다.

于山島·鬱陵島在東三百五十里 一作蔚 一作芋 一作羽 一作武 二島 一卽芋山 '續'今爲島郡

우산도(于山島)·울릉도(鬱陵島) 동쪽 3백 50리에 있다. 울()은 울(蔚)이라고도 하고, 우(芋)라고도 하고, 우(羽)라고도 하고, 무(武)라고도 하는데, 두 섬으로 하나가 바로 우산(芋山)이다. '속' 지금은 울도군(鬱島郡)으로 되었다.

 증보문헌비고 울릉도조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기록으로 우산도(于山島)·울릉도(鬱陵島) 두 섬이 증보문헌비고가 편찬될 대한제국 당시(1903~1908년) 울도군(鬱島郡)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어 우산도는 왜에서 松島라고 한다는 여지지의 기록을 인용함으로써 증보문헌비고 울릉도조가 단순히 이전 기록을 그대로 베껴 쓴 기술내용에 그치지 않음을 보여 주고 있다. 여지지의 기록 중 당시의 지리적 인식에 들어맞는 부분만 인용을 했기 때문이다.

 

결어

 이렇듯, 조선조 기록에서 인용한 사서인 '여지지'가 현존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후대의 이 책의 내용을 인용한 다른 기록을 모두 부정할 수는 없다. 

 이와 더불어, 일본 측에서는 신경준이 숙종실록과 여지지의 기록을 보고 본래 없는 사실을 만들어 낸 것처럼 왜곡을 하고 있다. 모든 사서(史書)·지리서가 이전 기록과 기록 당시의 인식을 합쳐 기술되는 점으로 미루어 이런 일본 측의 주장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망언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또한, 그보다 이전의 숙종실록에 우산도가 송도라고 한다는 같은 내용이 기록되고 있으며, 안용복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는 성호사설,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울릉도사실변증설등에서도 같은 기록이 등장한다. 이런 사실로 보아도 조선왕조의 기록은 분명한 것이다. 한국기록 속의 于山島는 일본인이 당시 독도를 칭했던 松島이다.
수많은 한국의 관찬기록에 동일내용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울릉도와 더불어 우산도가 동해상에 존재했으며, 우산도는 일본에서 松島라고 한다는 지리적 인식이, 한국정부의 공식적이고 일반적인 견해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록이 등장하는 민간의 저서로 1780년대 안정복(安鼎福)이 저술한 잡동사니(雜同散異)가 있다. 잡동사니의 우산도 기록은 1770년 홍봉한 등이 편찬한 동국문헌비고 속의 우산도 설명과 일치한다. 
잡동사니 해방(海防)조 울릉도에 "
輿地志云 鬱陵于山皆于山國地 于山則倭所謂松島也{여지지(輿地志)에 이르길, 울릉과 우산은 모두 우산국지(于山國地)인데, 우산(于山)은 곧 왜(倭)가 말하는 바의 송도(松島)이다}" 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자료사진 ;한수당연구자료집(한상복 저, 2003~2004, 한수당자연환경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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