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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록구병자년조선주착안일권지각서(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와 안용복 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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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의 원문은 손승철 강원대 교수의 '1696년 安龍福의 제2차 渡日 공술자료(한일관계사 자료집 24집 pp.251~300, 2006년 4월)'에서, 국역은 동자료와 나이토 세이추 교수의 중요부분 해석본(울릉도와 독도 부록)을 참고하여 작성했습니다. 전문 국역본과 원문사진은 이곳을 클릭 단, 원문입력은 시간관계상 아래 본문의 것만 올립니다. 숙종실록의 안용복 진술이 사실인지에 대해서 일본 측은 자신들의 기록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어 믿기 어렵다는 견해를 고수해 왔다. 여기서 한 술 더 떠, 안용복을 희대의 거짓말쟁이로 몰아 세계적으로도 그 객관성과 정확성이 검증된 조선왕조실록의 안용복 관련 기록을 전면 부정하고 있다. 그러던 중 2005년 5월 안용복을 둘러싼 한일 학자들 사이의 그동안의 논쟁을 불식시켜줄 중요한 자료가 오키섬의 무라카미가(村川家)에서 발견되었다. 산인추오 신보 5월 17일자에 보도되면서 그 내용이 처음으로 공개되었고, 바로 연합뉴스와 YTN이 보도하면서 한국에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문서는 이와미국(石見國)
오오모리 대관소에서 파견 나온 오키의 재번역인(在番役人)이 안용복
일행을 심문한 기록으로,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으로
안용복 일행이 오키섬에 도착했을 당시의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 숙종실록에는
안용복이 두 차례의 일본행에서 울릉도와 우산도가 조선령임을
주장해 돗토리번으로터 두 섬이 일본령이 아니라는 서계를 받았다는 안용복의
진술이 실려있다. 지금껏 일본 측에서 발견된 기록으로 이 사실을 확인할
자료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이 '원록구병자년조선주착안일권지각서(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에는
안용복이 울릉도와 우산도가 조선령임을 주장했다는 오키도 관리의 기록이
실려있어 숙종실록상 안용복 진술의 진실성을 일본 측 기록에서도
확인하게 되었다. 1696년 5월 18일 안용복 등 11명이 승선한 배가 오키 도고(島後) 니시무라(西村) 해안가에 도착했다. 5월 20일부터 22일까지 오키의 관리가 심문한 결과, 안용복은 竹島와 松島는 조선의 강원도에 속하는 섬으로, 이 두 섬이 표시된 '조선팔도지도'를 가지고 있다고 발언하고 있다. 아울러 돗토리번의 호키(伯耆)에 소송을 하고자 가는 중 바람(표류하여)을 만나, 오키에 들렀다고 밝히고 있어, 숙종실록상 안용복의 진술 모두가 거짓이 아님이 이 문서를 통해 재차 확인되었다. 오키에 도착한 배에 타고 있던 11인을 대표해 박어둔과 김가과 僧뇌헌 3인이 심문에 응했다. 안용복일행은 이때 조선팔도지도 8매를 지니고 입회하였으며, 재번역인이 이 지도의 팔도의 명칭을 베껴 썼다. 재번역인과의 심문은 안용복의 통역으로 그 문답이 이루어졌다. ( 一、右安龍福 雷憲 金可果 三人江在番人立會之時、 朝鮮八道之圖ヲ八枚ニメ所持仕候ヲ出シ申候、 則八道ノ名ヲ書寫、朝鮮ノ詞ヲ書付申候。 三人之內安龍福通詞ニテ 事ヲ問申候得ハ答申候。) 아래는 이때의 심문기록이다.
'원록구병자년조선주착안일권지각서(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의
가치 죽도와 조선 사이는 30리며 죽도와 송도 사이는
50리다. 안용복은 앞서 죽도와 우산도 두 섬이 조선국 강원도에 속해
있음을 밝히고 자산(子山)이 곧 송도(松島)라고 말했다. 이어서 죽도와 송도 사이가
50리※라고 발언함으로써 우산도(=송도)가 현재의 독도임이 명확히 증명되었다. 2. 이 기록으로 인해 숙종실록의 안용복 진술의
신빙성이 검증되는 한편, 한국 역사 속에 등장하는 우산도(혹은 子山島)가 곧 독도임이 다시 한번
증명되었다. 특히 안용복 일행이 소지하고 있던 조선팔도지도※에 우산도가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동안 다소 부정확한 표기로 인해 한국 고지도
속
우산도가 죽도(Chukdo)일 가능성을 제기했던 일본 측 주장은 그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한국고지도속 우산도는 이곳을
클릭 3. 이 문서의 또 한가지 가치는 1693년부터 시작된 한일 간 영토분쟁의 결과 울릉도(竹島)가 조선령임을 확인한 '竹島1件'에 울릉도뿐 아니라 독도(于山島)까지 포함돼 있음이 재차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안용복이 울릉도뿐 아니라 그 부속섬으로서 우산도의 영유권까지 주장한 사실을 일본에서 역시 알고 있었다는 방증이 되기 때문이다. 1877년 태정관의 지령서에서 죽도와 그 외1島인 松島가 일본과는 관계가 없는 영토임을 지령할 때, 죽도1건에 관한 자료를 참조한 것으로 보아도 일본정부에서는 이미 두 차례에 걸쳐 독도가 한국령임을 인정한 것이 된다. 따라서 독도의 일본 고유영토설은 애초부터 성립할 수 없음이 확인되었으며, 자신의 국가가 두 번씩이나 한국의 영토임을 인정한 독도를 무주지로 상정해 편입한 시마네현 고시는 타국의 영토를 침략하는 불법행위가 되는 것이다. 안용복 진술내용의 신뢰성을 확인 1696년 5월 18일 오키에 도착한 안용복 일행은 6월 4일 호키국(伯耆國) 아카사키(赤崎)로 향했다. 그런데, 6월 4일~6월 21일까지 돗토리번 안에서의 안용복일행의 행적은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나, 그 후 8월 6일 귀국할 때까지의 50일간의 기록은 생략되어 있다. 따라서, 해당 기간 일본 측 기록으로 안용복 일행의 행적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안용복일행 조사보고서'에는 안용복이 제2차 일본행에서 그들의 행적을 가늠할 수 있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우선 제2차 일본행에서의 행적에 대한 안용복의 진술내용은 다음과 같다. 숙종실록상 안용복의 진술 내용의 신빙성을 '안용복일행조사보고서'와 대조해 살펴보도록 한다. 숙종실록 숙종 22년(1696) 9월
25일(戊寅)條의 안용복의 진술과 '안용복 일행 조사보고서'와의 대조(원문은
이곳을 클릭) 안용복의 제2차 일본행의 목적 숙종 22년(1696년) 8월 29일(壬子)條에는, 안용복 일행이 제2차 일본행에서 호키슈(伯耆州)에 소송을
하고 돌아왔다 기록하고 있으며, (원문은 이곳을
클릭 ) 안용복은
그 소송이 에도막부의 서계를 마음대로 고쳐 써, 두 나라 사이의
영토분쟁을 야기한 대마도주의 죄상을 치죄하고 제1차 일본행에서
확인받았던 울릉도· 우산도에 대한 영유권 확인소송이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인부연표(因府年表)
1696년, 6월 4일조에서 역시 조선의 배 1척이 돗토리(島取)번에
직소를 위해 들어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나(伯耆國赤崎灘へ朝鮮國の船が着岸した。事前に隱岐國の代官より竹島へ渡海する朝鮮船32艘の內から、伯耆國へ訴訟のため、使いの船を派遣する, という連絡があった船であり、乘組員は11人であった。)소송할 내용의 구체적인 설명은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일본 측에서는 그동안 자신들의 기록에 제2차 일본행에서 안용복이 어떠한
소송을 위해 일본에 건너왔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숙종실록상
안용복의
발언은 신뢰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여 왔다. 그런데, '안용복일행 조사보고서'의
내용을 다룬 나이토 세이추교수의
글을 보면 '안용복일행 조사보고서'에서는 재번역인이 안용복일행에게 하쿠슈(伯州)에 소송할 이유를 상세히 써 내도록 요구했으나,
하쿠슈에 찾아가 자세히 이야기해야 한다며 거부했으므로 그 상세한
소송의 내용은 돗토리번에 전달되지 않았다 하고 있다.
이 부분은 나이토 교수의 오독(誤讀)으로 보인다. 이 구절은 11명 가운데 이름과 나이를 밝히지 않은 사람이 있었기에 하쿠슈(伯州)에 소송문서를 제출할 수 없으니 정확한 나이와 이름을 알아낸 후에 보고서를 올리겠다는 내용이다. 이미 위에서 안용복일행을 심문한 기록에서 호키슈에 소송할 내용이 울릉도(竹島)와 독도(子山島)에 대한 영유권에 관한 것이라는 안용복의 진술이 포함된 상태에서 오키의 관리가 정확한 소송내용을 몰랐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나이토교수가 언급한 구절은 하쿠슈에 소송문서를 제출하기 위해서는 11인 전원의 이름과 나이, 그 외 스님들의 종파에 대한 기록을 문서에 적을 필요가 있는데, 22일 아침까지도 이에 대한 정보를 써 내지 않았다는 것으로 소송내용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부분이다. 전체 문장은 다음과 같다.
22일의 기록을 보면, 안용복일행은 하쿠슈에 소송을 하러 가는 이유를 글(訴訟一卷)로 써 제출하였고, 안용복 일행의 나머지 사람들의 이름을 알아내 보고서 끝에 부록으로 실었으며, 이 기록 모두는 돗토리번에 그대로 전달되었다.
위의 기록에서는, 안용복
일행이 주장하는 바가 모두 세키슈(石州)에 전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세키슈에 보고가 되었다면 당연히 에도막부에서까지 이 일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며, 소송의 당사자인 하쿠슈에도 통보된 것이다. 안용복일행이 소송을 하러 왔다는 사실이 오키로부터 돗토리번에 전달되었다면, 그 소송내용이 무엇인지 역시 모두 통보된 것이다. 죽도고(竹島考)에서는 안용복일행이
오키를 떠나 호키국에 도착했을 당시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오키의 대관으로부터 돗토리번에
연락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안용복 일행조사보고서'상의 모든
기록이 돗토리번에 그대로 전달되었음은 명백하다고 할 것이다. 돗토리번의 어재부일기를
보면, 오키로부터 그 소식이 돗토리번에 도착한 것이 6월 2일로 기록되어
있다. 위 안용복일행조사보고서가 작성된 것이 5월 23일인 것을 고려하면,
이 보고서상의 모든 기록이 돗토리번에 그대로 통보된 것이다. 이상과 같이 '안용복 일행 조사보고서'의 발견으로 숙종실록상의 안용복의 진술내용처럼 이전 제1차 도일(渡日) 당시 일본에서 조선령으로 인정받은 울릉도와 우산도(독도)의 영유권 확인소송이 안용복 일행의 제2차 일본행의 목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 보고내용은 당시 오키가 막부의 직할지였음을 고려하면, 세키슈(石州)를 통해 에도막부에 사건의 전말이 보고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것이다. 1696년 봄, 朝·倭 어부들의 울릉도 대면은 안용복의 거짓말인가? 숙종 22년 9월 25일(戊寅)條에서 안용복은 울릉도에 침입한 왜인들을 꾸짖어 쫓아 내고 그들이 우산도로 도망가자 이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발언하고 있다. 종래 일본에서는 이런 안용복의 진술은 '허위와 과장으로 가득찬 것이며, 범죄자의 공술을 취하여 무비판적으로 적의적록전재(適宜適錄轉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가와카미 겐조)'라며 안용복의 진술 이외에 조선왕조실록 자체까지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아 왔다. 가와카미 겐조가 이러한 주장을 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1696년 1월에 에도막부에서 죽도 도해금지가 내려져 그 해에는
요나고 사람들이 죽도에 도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안용복이 울릉도에서
일본인을 만난 시점은 5월 16일) 그런데 숙종실록상 안용복은 일본인을
만나 오키까지 쫓아갔다고 진술하고 있으므로 안용복의 진술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또한 죽도도해금지령을 내렸다는 에도막부의 뜻을 구두로 조선 측에 전달한 것이 1696년 10월의 일이고, 문서로 정식 통고한 것이 1697년 2월이라는 점에서, 안용복이 울릉도에서 일본어부를 만난 1696년 5월에는 조선 조정까지도 에도막부의 이런 결정을 접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朝·倭 양국 어부 모두가 1696년 봄에는 아직 죽도도해금지령에 대한 정보를 접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양국 어부들이 울릉도에서 서로 예년과 같이 조업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안용복의 진술은 그 신빙성이 있는 것이다. 안용복이 돗토리번주와 대면한 일과 이인성에게 소를 쓰게 해 에도막부에 전달한 일 숙종실록 숙종 22년 9월 25일조에는 안용복이 제2차 일본행에서 돗토리번주와 대좌하여 1차 일본행때, 울릉도와 우산도가 조선령임을 확인받았는데, 대마도주가 서계를 빼앗고, 위조한 사실 등의 죄상을 간파쿠에게 알리겠다하고 이인성에게 소를 지어 올리도록 했다고 진술한 내용이 실려있다. 대개 일본에서는 안용복이 돗토리번주와 대좌한 사실은 거짓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으나, '안용복 일행 조사보고서'에서의 안용복이 통정대부라는 호패를 차고 있었으며, 조선조정의 뜻을 받들어 소송을 하러 왔다는 안용복의 발언으로 보아 돗토리번주와의 대좌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통정대부는 정 3품의 고관으로써 조선 통신사 일행을 국빈으로 대우했던 당시 일본에서의 정세를 본다면 돗토리번주와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 대좌했다는 안용복의 진술은 신뢰할 만하다고 할 것이다. 이인성에게 소를 지어 올리도록 했다는 사실은 숙종 23년(1697) 2월 14일(乙未)조에 대마도주가 '지난 가을에 귀국(貴國)의 사람이 단자(單子)를 바친 일이 있었는데, 조정의 명령에서 나온 것입니까?' 라는 질문을 동래 부사(東萊府使) 이세재(李世載)에게 질문한 기록이 있어 분명하게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안용복이 이인성에게 소를 쓰게 해 돗토리번을 통해 에도막부에 전달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이로 인해 안용복의 진술은 모두 사실임이 재차 확인되고 있다. (숙종 23년(1697) 2월 14일(乙未)조의 기록은 이곳을 클릭). 돗토리번으로부터 받은 서계의 존재여부 - 이전 글 참조
안용복의 인물상 안용복일행조사보고서에는 오키에
도착한 안용복의 형색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안용복이 통정대부(通政太夫)라는 호패를 차고 있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이로 보아 이 호패는 관직을 가칭하여 울릉도와 우산도 영유권 주장을 하고자 안용복이 위조한 호패이다. 숙종실록 숙종 22년 9월 25일조에는 안용복이 호키슈(伯耆州)로 갔을 때, "푸른 철릭[帖裏]를 입고 검은 포립(布笠)을 쓰고 가죽신을 신었다"고 진술했는데. 위 기록에서 가죽신에 대한 언급이 빠져 있다는 것만 빼고 그 행색이 같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나이토 세이추교수는 '안용복 일행조사보고서'상 그들이 타고 있던 배 안의 도구 중에 관복이나 가죽신이 없었다는 이유를 들어 숙종 22년 9월 25일조 안용복의 진술은 사실이 아니라 하고 있다.(?) 하지만 위 기록 중 통정대부(通政太夫)라는 호패를 차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오키에서의 안용복은 관복에 가죽신을 신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안용복이 착용하고 있던 의복과 신발에 대한 고려 없이 배 안의 물건 중에 관복과 가죽신이 없었다는 이유로 숙종실록상 이 부분 안용복의 진술을 거짓이라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더구나 에도시기 표류한 선박의
모든 품목를 빠짐없이 기록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하나 아래의 안용복
일행이 타고 온 선박에 실려있는 물건을 조사한 '조선주재지도구지각(朝鮮舟在之道具之覺)'에는
밥을 지었던 솥이나 수저 등의 가재도구 등이 빠져 있다. 이 기록이
안용복 일행이 타고 온 배안의 모든 물건을 기재했다고 확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안용복 일행이 타고 온 배에 실려 있던 물건은 조선주재지도구지각(朝鮮舟在之道具之覺)이라는 항목을 따로 마련해 기록했는데, 아래와 같다.
안용복의 출신 안용복과 거의 동시기의 실학자인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안용복은 동래부 전선(戰船)에 예속된 노군이니, 왜관에 출입하여 왜어에 능숙하였다(安龍福者 東萊府戰船櫓軍也)"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증보문헌비고에는 처음 동래(東萊)의 안용복은 예능노군(隸能櫓軍)으로서 왜(倭)말을 잘하였다.(初東萊安龍福 隸能櫓軍 善倭語)라 기록하고 있어, 안용복은 군에 소속되어 있는 노를 젓는 수군(水軍)이었으며, 왜관에 출입하여 왜어에 능숙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죽도고에 역시 안용복은 자신을 "アンピンシヤ(안핑샤)"라고 했는데, 죽도고의 저자인 오카지마 마사요시는 '핑샤(ピンシヤ)'를 군대의 총지휘관을 보좌하는 비장(裨將)이라는 무관계급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제2차 일본행 때의 기록으로 안용복 일행 모두가 관직을 가칭하고 있어 전혀 신뢰할 수는 없다. 이와는 반대로 죽도고에는 제1차 일본행 때의 안용복이 차고 있던 요패에 그가 사노비 출신이라는 기록이 등장한다. 요패의 앞면에는 "東萊 私奴 用卜 年三十三 長四尺一寸 面鉄髭暫生 疵無 主京居吳忠秋(동래 사노 용복 나이 33세, 키 4척1촌, 얼굴은 검고 수염이 약간 나 있으며 상처는 없다. 서울에 거주하는 오충추를 주인으로 두고 있다.)" 라고 적혀 있으며, 뒷면에는 "庚午 釜山佐自川一里 第十四銃三戸(경오 부산 좌자천1리 제14통 3호)"라고 쓰여 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사노비인 그가 어떻게
1696년 대규모 선단을 꾸려 울릉도에 갈 수 있었을까? 그러나, 천인출신인 그가 13척의
대규모 선단을
꾸려 울릉도에 가는 일이 가능한 일일까? 숙종실록에는 40여 명 정도가 제2차
일본행때 안용복과 함께 울릉도로 향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나머지
사람들의 처벌을 피하고자 안용복일행이 축소 보고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인부연표나 죽도고 등에는 울릉도로 간 조선의 배가 32척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수치는 순수하게 안용복이 구성한 배만이 아니라
다른 곳의 배도 섞인 것으로 보인다. 위의 오키의 '안용복일행조사보고서'에는
배 1척에 8~15명까지 승선한, 13척의 선단이 함께 울릉도로 향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규모가 정확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규모의 선단을 꾸린 일은 안용복의
출신이 천인이라면 사실상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안용복이 왜관을 드나들며 倭語를 익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의 왜관은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조선의 관리와 소수 왜와 교류한 한정된 상인들에 불과했다. 즉, 안용복은 倭와 관련한 상업적인 일에 관련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죽도고에는 안용복이 그의 요패를 사기 위해 은 40목을 들였다는 안용복의 진술이 기록되어 있으며, 안용복은 이어서 "이것이 없으면 조선에서 사람으로 행세하기가 어렵다"라고 한 기록이 있다. 따라서, 위 죽도고의 요패는 왜관을
드나드는 상인들의 출입증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안용복의
신분은 사노(私奴)가 아닌 오충추(吳忠秋)라는 사람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상인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것이다. 또한, 숙종실록에 그가 천인 출신이라는 기록이 단 한 구절도 보이지 않는다는 데에서도 안용복의 출신은 천인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천인으로서, 많은 사람을 이끌고 일본에 건너가 조선조정의 명을 받은 것처럼 꾸며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했다면, 그러한 일은 당시로써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대사건이었다. 만일 안용복이 천인이었다면, 그 대사건의 주인공인 안용복을 거론하면서 그가 천출임을 강조하는 발언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숙종실록에는 안용복의 출신이 천인이라는 사실이 단 한마디도 거론되지 않았다. 따라서 안용복은 오충추라는 상인 밑에서 왜관을 드나들며 왜와 교류했던 평민 출신의 상인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할 것이다. 또 한 가지 가능성이 있다면, 왜관에서 왜인들과의 언어소통을 위한 통역을 담당하던 역인이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둘 수 있다. 무엇보다 천인이라면, 그의 2차 일본행에서 대규모 선단을 꾸린 일을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게 된다. 대개 일본에서는 죽도고의 요패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 안용복의 출신을 노비로 확정하여 안용복 진술의 신뢰성을 깍아내리고 있다. 그러나, 왜관의 출입이 가능한 사람이 한정되어 있었다는 점 등을 고려한다면, 안용복은 노비가 아닌 상인이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사실 안용복의 출신이 사노이든 상인이든 양반이든 그것이 그의 진술의 신뢰성을 판가름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만, 울릉도와 독도를 대마도의 흉계로부터 지켜낸 영웅호걸인 안용복이라는 인물에 대한 연구가 꾸준히 이루어져 안용복에 관한 정확한 정보가 발굴되기를 바랄 뿐이다. 안용복의 제1·2차 일본행 때의 나이 안용복일행 조사 보고서에는 갑오년생(1654년)으로 1696년 당시 42세로 기록되어 있으나 울릉도와 우산도의 영유권 주장을 위해 위조한 호패로 전혀 신뢰할 수는 없다. 죽도고에 안용복이 찼던 호패에는 庚午(경오, 1660년)생으로 1693년 당시 33세로 기록되어 있어, 이 호패의 연령이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제2차 일본행때의 안용복의 나이는 36세로 자신이 오세(午歲)인 것을 고려해 여기에 6살을 더해 호패를 만든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인부연표 1693년 6월 4일조에서의 기록에서는 1693년 당시의 안용복의 나이를 42세로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아마도 안용복이 제2차 일본행에서 제시한 호패를 기초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朝鮮人アンピンシヤ(東萊の人、年42歲、和語通詞である)とトラヘ(蔚山の人、年34歲)。 이렇게 볼때, 죽도고의
호패의 기재사항을 토대로 안용복이 1693년 제1차 일본행 때의 나이는
33세였으며, 1696년 제2차 일본행을 감행했을 당시에는 36세였다. 죽도고의
기록 중 박어둔의 호패내용(울산에 사는 염전의 役을 담당하던
평민)이 얼마 전, 한국의 방송※에서 규장각에 소장된 1687년 울산부
호적에서 확인한 결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안용복의 연령
또한 죽도고 호패의 기재내용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안용복의 성격을 묘사한 일본 측 기록 1693년 안용복의 제1차 일본행에서 안용복과 박어둔을 요나고에서 돗토리번으로 호송할 때의 인부연표의 기록(5월 28일자)을 보면, 이번에 온 이객 중에 포악한 자가 있다고 들었으니(此到の異客の內に暴惡の者これ有る由相聞候故なり。), 이들을 구경하러 나오지 말라는 돗토리번의 지시가 있었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竹島考에 역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어 안용복을 성질이 난폭한 사람으로써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돗토리번에서 무분별하게 타국인의 행렬을 구경하러 나오는 사람들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고 생각된다. '안용복 일행 조사 보고서'를 보면 재번역인의 심문이 끝난 후, 안용복 일행은 정성이라며 재번역인에게 말린 전복 5포를 오오쿠무라(大久村) 쇼우야(匡屋)에게 1포를 보내려 했다는 기록이 등장하고 있어, 죽도고와 인부연표의 기록과는 사뭇 다른 안용복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어디에도 안용복의 성격이 포악하다는 등의 기록은 없으며, 오히려 상당히 호의적인 행적을 보이고 있다. 인부연표와 죽도고의 기록은 저자의 개인적인 감정이 섞여 있거나 위에 언급한 대로 돗토리번이 구경꾼이 모여드는 것을 막기 위해 허위 정보를 유포했을 가능성이 크다.
안용복에 대한 연구는 아직 너무도 미흡하다. 무엇보다 국내에서 그의 출신이나 성향 등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고 있는 상태다.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수반되었으면 한다. 가끔 1693년 안용복이 울릉도에 있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竹島라는 이름이 울릉도의 다른 이름임을 알지 못했던 조선조정에서 선뜻 대마도주의 요구에 응하는 불행한 사태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그럼으로써 제2의 대마도가 탄생해 그 이후로 조선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왜구의 소굴로 전락되지 않았을까? ※다음 글은 조사 보고서상 함께 승선한 11인의 명단을 죽도고·숙종실록의 기록과 비교해 보고, 시모죠 마사오(下條正男) 교수의 '안용복일행 조사 보고서'를 논평한 글의 비판을 중심으로 게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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