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록구병자년조선주착안일권지각서(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 B

 안용복의 제2차 일본행에 동행한 사람의 명단

'원록구병자년조선주착안일권지각서(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에 기재된 그들이 타고 온 배와 안용복 이외의 인적사항은 다음과 같다. 처음 이름을 써낸 것은 안용복, 이비원, 김가과, 뇌헌, 연습의 5人이며, 문서 끝에 나머지 동행한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이하 '안용복일행 조사보고서'로 표기.

 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
隱岐國島後 

一、朝鮮船壹艘 長 上三丈 下貳丈 幅 中ニ而壹丈貳尺 深サ四尺貳寸

但八拾石程船積可申候
檣 貳本 帆 貳ツ 梶 壹羽 櫓 五挺 蓬 木綿之者 多 貳門艫ニ立申侯 木碇 貳挺 からそ總四房 敷物(に)ざ 犬ノ皮

一、 船中人數拾壹人
俗 安龍福
俗 李裨元
俗 金可杲
俗 三人名不書出年不書出

坊主 雷憲
坊主 雷憲弟子 衍習
坊主 三人名不書出

一、 安龍福 午歲四十三 冠ノヤウナル黒キ笠水精ノ緖 アサキ木綿ノウハキヲ着申候 腰ニ札ヲ壹ツ着ケ申候 表ニ通政太夫 安龍福 年 甲午生 表ニ住東萊印彫入 印判小キ箱ニ入 耳カキヤウジ小サキ箱ニ入 此貳色扇ニ着ケ持申候

一、 金可果 年不書出 冠ノヤウナル黑キ笠木綿ノ細 白キモメンノウハギヲ着申候 扇ヲ持申候

坊主

一、興寺ノ住持雷憲歲五十五  冠ノヤウナル黑キ笠、 木綿ノ紐、 細美ノウハキヲ着、 扇持申候。 己巳閏三月十八日金鳥山之朱印狀雷憲所持仕侯候ヲ出シ申候ニ付、則寫申候 
康熙二十八年閏三月二十日 金鳥山朱印ノ書付 雷憲所持仕ヲ出シ候ニ付、則寫シ申候
箱壹ツ長壹尺 者四寸 高四寸 錠ノカナク在リ 內ニ算木在、 竹ニ而作之申候 カケゴニ硯ヲ仕組申、筆墨在リ

雷憲弟子

一、坊主衍習 歲三十三ト申候


一、조선배 한 척은 길이 3장(약 9.1m), 폭 1장 2척(약3.6m), 길이 4척 2촌(약1.3m)의 80석(石) 들이로, 돗대 2, 노1, 노 5, 닻 2개의 배였다. 선수에는 목면의 기가 2매 있는 것 외에, 나무가 4다발, 방석의 돗자리, 개의 가죽이 있었습니다.

一、배에 탄 사람 11인
속인(俗人) 안용복(安龍福), 俗人 이비원(李裨元), 俗人 김가과(金可果), 俗人 3인은 이름과 나이를 쓰지 않았습니다.
승려 雷憲, 승려 衍習(뇌헌의 제자), 승려 3인은 이름을 쓰지 않았습니다.


一、안용복. 오세(午歲)의 43세이며, 관()처럼 생긴 흑색 갓을 썼고, 수정이 달린 줄, 연두색 목면의 상의를 입었습니다. 허리에는 패를 하나 차고 있었는데 겉에  "통정대부(通政太夫), 안용복, 갑오생(甲午生), 주동래(住東萊)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도장과 작은 상자, 그리고 귀이개를 넣은 작은 상자가 달린 이 2가지 색의 부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一、김가과. 나이를 쓰지 않았습니다.
冠 같은 검은 갓을 썼고, 목면으로 끈을 달았으며, 흰 면의 상의를 입고, 부채를 들었습니다.

一、승려

 흥왕사(興寺)의 주지 뇌헌. 나이는 55세. 관 비슷한 검은 삿갓을 썼고, 목면으로 끈을 달았습니다. 가늘고 아름다운 실로 짠 상의를 입고 부채를 들었습니다. 기사 윤3월 18일 금오산의 주인장을 뇌헌이 가지고 있다가 내놓자, 곧바로 베껴두었습니다. 강희 28년 윤3월 20일 금오산 朱印이 찍힌 문서를 뇌헌이 가지고 있다가 내 보인 즉 곧바로 베껴 두었습니다. 상자 하나가 길이 1척, 폭 4촌, 높이 4촌이고, (방울)자물쇠가 걸렸는데, 그 안에 대나무로 만든 算木, 벼루와 필묵이 있었습니다. 또 염주는 일본의 선종이 사용하고 있는 것과 같고, 구슬의 수는 열 개 정도였습니다.

뇌헌제자

一. 승려 연습, 나이 33세라고 합니다. 의상은 뇌헌과 같은 모양이었습니다.


1척(尺)은 30.3 cm 이며, 1장(丈)은 10자(尺), 3.03 m이다.
太는 大의 오기.


朝鮮人俗名

李裨元(イビジャン) 金可果(キンサウクハウ)
柳上工(ユシャコウ) 金甘官(キングハングハン)
 ユウカイ 此字相尋候得共書 不申候下■■候歟海度 末度ニ居申候
安龍福(アンヘンチウ)共六人俗

僧名

興旺(フンコソウ)寺 雷憲(トイホン)
 靈律(ヨンユク) 丹責(タンソイ)
 勝淡(スウクハネイ) 衍習(エンスワ)

雷憲弟子
右五人坊主
合拾壹人

원문에는

 

조선인속명

이비원(이비장) 김가과(김사과)
유상공(유사공) 김감관(김간관)
유가이 이자는 물어 보았으나 잘 모르겠습니다.
안용복과 함께 6인의 속인

승명

흥왕사(흥코소우) 뇌헌(도이헌)
영률(영육) 단책(단소이)
승담(수쿠하네이) 연습(엔수와)

뇌헌제자
위 5인 승려
합 11인

 죽도고의 기록

 죽도고 말미에는 "아오야의 '차야큐우스케'가 그때 온 이국선 선원의 기록, 그리고 선박을 표시하는 그림을 소지하고 있다. 다음과 같다(靑屋ノ茶屋兵助ガ許ニ、其時來リ異舶ノ人員之記、並船驗ノ圖ヲ所持セリ、如左)" 라며, 안용복 일행 11인의 명단과 그들이 타고온 배의 그림을 소개하고 있다.

삼품당상신(三品堂上臣)

안동지(安同知)

금조승장석씨(金烏僧將釋氏)

헌판사(憲判事)

진사군관(進士軍官)

이비장(李裨將), 김비장(金裨將)

대솔(帶率)

김사공(金沙工), 유격률(劉格率), 유한부(劉漢夫)

석씨대솔승(釋氏帶率僧)

담법주(淡法主), 습화주(習化主), 율화주(律化主), 책화주(責化主)

 선박표지도(船檢圖)의 설명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어 안용복이 울릉도뿐 아니라 우산도의 영유권까지 주장했음이 드러나 있어, 안용복일행 조사보고서상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次ニ圖スル 船檢元祿九年六月五日、 朝鮮人十一人騎ノ船、靑屋ノ津着ケルトキノ船檢ノ寫ナリ、朝鬱兩島ハ鬱陵島<日本是竹島稱>。 子山島<日本ニテ是ヲ松島ト稱ス>是ナリ、其トキノ船長ヲ安同知ト呼フ
다음 그림의 표지는 원록9년 6월 5일, 조선인 11명이 탄 배로 아오야의 나루에 도착하였을 때 그린 것이다. 조울양도(朝鬱兩島)는 울릉도(일본에서는 이를 竹島라 부른다)·자산도(일본에서는 이 섬을 松島라고 부른다) 이것을 말한다. 그 때의 선장을 안동지라고 부른다.

 

 안용복 일행이 타고 있던 배에는 조울양도감세장신안동지기(朝鬱兩島監稅將臣安同知騎)라고 쓰여진 깃발이 달려 있었으며, 그 뒷면에 조선안동지승주(朝鮮安同知乘舟, 조선의 안동지가 승선한 배)라고 기록돼 있다. 밑의 작은 기에는 '起船尾見盛稻又歸古鄕思農時(선미에서 일어서 무성한 벼이삭을 보니 다시 돌아갈 옛 고향의 농사철이 생각난다.)'는 시 구절이 쓰여져 있다.

 오카지마 마사요시의 죽도고나 인부연표는 저자 자신의 주관이 많이 개입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돗토리번의 기록을 토대로 작성되었음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안용복의 요패내용이나 안용복이 타고 온 배를 묘사한 부분, 안용복의 일본에서의 행적 등에서 다른 기록에서는 찾을 수 없는 내용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문제는 죽도고의 기술내용 중 순수한 돗토리번의 기록과 오카지마 마사요시가 뒤에 첨부한 내용을 가려내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인부연표(因府年表 1696년 6월 6일조)에는 안용복 일행이 아오야에서 1696년 6월 5일부터 12일까지 머무르는 동안의 기록에 명을 내려 '번선이 단단히 묶어두고 이를 경비하게 하였다(番船堅ク付置キ是ヲ警衛ス)'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반면에  이인성이 마을 사람들의 요청에 의해 8장의 서필을 써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보아 마을 사람들과 안용복 일행 사이의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어 앞선 기록과는 서로 대치되고 있다.

이나바지(因幡誌)에 실려있는 이인성의 필적


 

죽도고(竹島考)에 실려있는 이인성의 글
조선화전이진사서(朝鮮花田李進士書)라고 서명되어 있다. 아오야 마을 사람들의 요구로 이인성은 8매의 필적을 남겼는데, 그 필(筆)이 지극히 온수(溫粹, 따뜻하고 순수함)하다고 죽도고에 기록되어 있다.(click 확대)

 또한, 돗토리번이 파견한 유학자와 안용복 일행이 센넨지라는 절에서 나눈 필담에 대해서도 죽도고에는 "죽도의 건에 의해 사신의 배를 보냈으나 명백하지 않다(竹島ノ義ニ依テ使舶ヲ通ゼシトモ明白セス)"고 기록하고 있다. 인부연표에 역시 이때의 일을 "선장 안동지 및 이진사, 그 밖의 한 사람을 아오야의 센넨지에 청하여, 필담을 하였으나, 그 주된 의미가 분명하지 못했다(船長安同知並李進士、外に一人を靑谷の專念寺に請じ、及筆談候へども、其主意明白せぎりし由)"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죽도고와 인부연표의 기록은 이인성이 문장에 능한 달필이었음을 고려할 때, 전혀 사실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안용복의 제1차 일본행에서 서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했다는 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으며[안용복을 화어통사(和語通詞)로 소개], 안용복일행 조사보고서상에서도 안용복의 통역으로 오키 관리의 심문이 진행된다는 점으로 보아도 이때 서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해 글을 써 이야기했고, 그나마 안용복 일행이 주장하는 바를 알아듣지 못했다는 죽도고나 인부연표의 기록은 전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후의 일본 측 기록에는 아오야(靑谷)의 센넨지(專念寺)에서 돗토리번의 유학자와 대담한 이후로, 안용복 일행이 일본어를 모른다는 식의 기록이 계속 등장하여 무언가 중요한 사실을 숨기려 한 흔적이 많이 보이고 있다.

 이렇듯, 오카지마 마사요시의 인부연포나 죽도고 등의 일본 측 기술내용은 전후문장을 다시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으며, 저자가 상당부분 죽도는 일본령이라는 사견에서 진실을 왜곡하려 했음을 고려하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숙종실록의 기록

숙종실록 숙종 22년 8월 29일조에 안용복일행의 제2차 도일(渡日)후 조선에 귀국했을 때의 안용복일행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안용복(安龍福) 東萊人 뇌헌(雷憲) 順天僧
유일부(劉日夫) 興海人 승담(勝淡) 順天僧
유봉석(劉奉石) 寧海人 연습(連習) 順天僧
이인성(李仁成) 平山浦人 영률(靈律) 順天僧
김성길(金成吉) 樂安人 단책(丹責) 順天僧
김순립(金順立)

 

 

 

이상 3기록을 대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안용복일행조사보고서
(隱岐)

죽도고
(伯耆)

숙종실록
(조선에 귀국한 후)

안용복(安龍福)

안동지(安同知, 三品堂上臣, 朝鬱兩島監稅將)

안용복(安龍福,東萊人)

유상공(柳上工)

유격률(劉格率, 帶率) 유일부(劉日夫,興海人)

유우카이(ユウカイ)

유한부(劉漢夫, 帶率) 유봉석(劉奉石,寧海人)

이비원(李裨元, 이비장)

이비장(李裨將, 進士軍官)

이인성(李仁成, 平山浦人)

김가과(金可果)

김비장(金裨將, 進士軍官)

김성길(金成吉,樂安人)

뇌헌(雷憲)

뇌헌(雷憲, 憲判事, 金烏僧將釋氏) 뇌헌(雷憲,順天僧)
승담(勝淡) 담법주(淡法主, 釋氏帶率僧) 승담(勝淡)

연습(衍習)

습화주(習化主, 釋氏帶率僧)

연습(連習)
영률(靈律) 율화주(律化主, 釋氏帶率僧) 영률(靈律)
단책(丹責) 책화주(責化主, 釋氏帶率僧) 단책(丹責)

김이관(金耳官)

김사공(金沙工, 帶率)

김순립(金順立)

 제 2차 일본행에 동행한 사람들의 명단을 보면, 僧5인의 명단은 호키를 제외하고 숙종실록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으며, 6인의 속인은 오키와 호키에서 조선조정의 명을 받아 일본에 온 것처럼 보이기 위해 자신의 姓에 관직명을 붙여 제시했다. 물론 숙종실상의 명단이 그 실명이다. 3기록 모두에서 11人이 동일인임을 알 수 있다.


'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에 대한 일본 측 견해(下條正男)

 대부분의 일본 측 학자들도 이 문서의 발견을 통해 안용복 증언중 핵심내용의 신뢰성이 입증되었다는 반응이다. 그러나 일본의 일부 국수주의 학자들의 견해는 다르다. 그 중 시모죠 마사오(下條正男)교수의 견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서론과 결론 부분은 생략. 원문은 이곳을 클릭(pdf파일)

'숙종실록'에 의하면 안용복은 원록 9년(1696년) 일본에 밀항한 후 조선에 귀환(歸還)하여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일본에 건넌 것은 일본의 어민을 쫓아 표착(漂着)했기 때문으로 톳토리번에서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원록구병자년조선주착안일권지각서'를 보면, 울릉도에서는 일본의 어민과 조우한 사실이 없고 오키섬에도 표류하지 않았다. 오키섬에서의 심문에 대하여 안용복은 "돗토리 호키 노카미에게 담판을 지으려고 (일본으로)넘어왔다."(鳥取伯耆守様へお断りの義これ在り罷り越し申し候)라고 그 섬에 온 목적을 밝혔으며, "5월 15일 죽도를 출선하여 동일 송도에 도착했고, 동16일 송도를 나와 18일 아침 오키섬의 니시무라 해안에 도착했다(五月十五日竹嶋出船′同日松嶋へ着き′同十六日松嶋を出て十八日の朝′隠岐島の内′西村の磯へ着く)"라며 순조로운 항해였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문서를 보면, 안용복 일행의 울릉도에서 오키까지의 여정이 순조로운 항해였음을 단정해 파악할 수 있는 글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상세한 행적이 생략된 대강의 여정을 밝히고 있을 뿐이다. 이 기록에 안용복의 숙종실록상 진술내용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숙종실록 안용복의 진술을 부정하고 있다. 마치 안용복이 "울릉도에서 일본어부를 만난 적은 없다.'라고 발언한 것처럼 단정하고 있다. 자신의 상상을 논거로 삼는 학자답지 못한 행태다. 시모죠교수의 말대로면, '안용복일행 조사보고서'에 등장하지 않는 모든 진술은 거짓이 된다는 이상한 논리가 성립하게 된다.

 또한, 안용복 일행이 오키섬에 표류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 문구는 정확히 해독이 안 되는 것으로써 시모죠 교수는 이 불확실한 부분을 마치 확정된 것으로써 마음대로 단정하고 있다.

安龍福申候ハ、私乘参候船ハ十壹人伯州参取鳥伯耆守樣御斷之儀在之候(越)申候。順風布候當地へ奇申候。順次第泊州渡海可仕候。
 一、안용복의 말에 의하면, 자신이 타고 온 배의 11人은 호키(伯耆)를 거쳐 돗토리번(鳥取藩)의 호키(伯耆) 노카미(守様)에게 단판을 지으려고 순풍을 타고 당지(오키도)에 들렀다고 합니다. 그다음에는 호키로 항해할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원본 사진

다케시마 연구회의 해독본

 참고로 다케시마 연구회에서 내놓은 자료에는 惡布로 해독하고 있다. 惡布로 해석한다면, 숙종실록상 안용복의 진술내용처럼 오키에 표류했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시모죠 교수는 다케시마 연구회 회장으로서, 자신들이 해독한 원문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야 할 것이다.

다만,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숙종실록상 안용복은 왜어부를 우산도까지 따라가 거기서 다시 도망가는 왜 어부를 쫓아간 것으로 진술하고 있다. 그런데 안용복일행조사보고서에서는 우산도(독도)에서 그 다음날 출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안용복의 제2차 일본행은 조선팔도지도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점, 대규모 선단을 꾸려 울릉도로 향한 사실 등을 볼 때, 다분히 사전에 준비된 것임이 틀림없다. 안용복은 그의 상관에게 1693년 울릉도에 표류해 방문한 섬이 산물이 풍부한 섬임을 보고하여 선단을 꾸려 본격적인 어로(漁撈)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이때 안용복은 1693년 울릉도에서 왜어부를 만나 일본에 연행된 경험이 있었고, 월경한 죄로 2년간 옥살이를 치른 후였다. 에도막부의 죽도도해금지령에 대한 소식을 아직 접하지 못한 안용복은 울릉도에 도착하여 어렵을 하고 있는 왜 어부를 다시 만나면,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와 우산도 영유권 소송을 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안용복은 숙종실록상 그의 발언내용처럼 울릉도에 왜 어부가 와있는 것을 발견하고, 우산도까지 따라가 다음 날 일본을 향해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숙종실록 상의 안용복의 진술은 긴 여정을 축약해 진술한 것이라는 점에서 안용복일행이 우산도를 떠난 정확한 시점에 대해서는 숙종실록의 기록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안용복의 진술은 그의 행적에 있어서의 정확한 일시가 생략된 발언으로 우산도에서 왜 어부를 쫓아간 시기가 乃(이에)로 표현되어 있다. 안용복의 제2차 일본행이 사전에 계획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안용복일행 조사보고서'에서 처럼 우산도에서 하루를 기거하고 일본으로 향했을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이 안용복의 증언으로 주목해야 할 사실은 "5월 15일 죽도를 출선하여 동일 송도에 도착했고, 동16일 송도를 떠나(五月十五日竹嶋出船′同日松嶋へ着き′同十六日松嶋を出)"라고 하여 죽도(울릉도)로부터 松島(독도)까지는 그 날중에 도착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숙종실록'에서 안용복은 "일본의 어민을 쫓아 간 다음 날  배를 몰아 松島(독도)에 도착했다. 거기서 고기기름을 다리고 있는 어민의 솥을 막대기로 쳐서 깨트리고 어민은 허둥지둥 도망갔다"와 같이 스스로의 무용담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원록구병자년조선주착안일권지각서'를 보면, 그러한 사실은 확인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행정으로부터도 안용복의 무용담은 성립하지 않는다.  안용복의 증언에 관해서는 당시의 조선정부안에서도 의심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실을 '숙종실록'은 "표류하면 쯔시마번(對馬藩)을 통해서 송환되는 것이 통례이다. 자력으로 귀환했다고 하는 안용복의 증언은 의심스럽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숙종실록 숙종 22년 9월 27일조 이곳을 클릭)

 숙종실록에는 울릉도에서 왜 어부를 만난 후, 이튿날 새벽에 배를 몰아 우산도로 향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안용복일행 조사보고서'에는 같은 날 송도(于山島)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분명히 숙종실록상 안용복의 발언과는 차이가 난다. 그렇다고 어느 기록이 정확한 것인지 쉽게 확정을 해 안용복의 진술내용을 부정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안용복이 울릉도에 갔을 때 일본어부를 만났을 가능성이 크며(이전 글 참조), 이전 1693년 도일(渡日)한 일로 2년여의 옥살이를 치렀음을 생각한다면, 이때 안용복이 일본어부를 울릉도에서 쫓아냈다는 안용복의 진술은 신뢰할 만하다고 할 것이다. '안용복일행 조사보고서'에 그 내용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거짓말이라는 시모죠교수의 생각은 단순한 자신의 상상에 불과한 것이다. 자신의 논거를 뒷받침해줄 어떤 자료도, 정황제시도 없이 그저 '안용복일행 조사보고서'에 이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이유만으로 거짓이라 하고 있다. 전혀 학자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지 않다.

 숙종실록에서 처음 조선의 조정대신들은 안용복의 진술을 의심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후 대마도와의 교섭과정을 거치면서는 안용복의 진술을 인정하고 있었다.(숙종실록 숙종 22년(1696) 9월 25일조 이곳을 참조) 이런 정황은 도외시하고 시모죠 교수는 조선조정에서 안용복의 진술을 의심했다는 앞선 기록만을 부각시켜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 또한 비변사 심문기록은 안용복뿐 아니라 함께 동행한 나머지 10인 전원의 공술내용과 큰 차이가 없었음이 위 숙종실록 숙종 22년(1696) 9월 25일조 끝에 기록되어 있다.

 '원록구병자년조선주착안일권지각서'에는´안용복의 인품의 터럭을 볼 수 있는(髮髲とさせる?) 에피소드도 기록되어 있다. '숙종실록'에서는 "톳토리번주가 식량과 호위를 붙여 준다고 했지만 거절했다."(위의 숙종 22년(1696) 9월 25일조)고 하지만 '원록구병자년조선주착안일권지각서'에서는 반대로 "쌀(飯米)이 떨어져 저녁식사부터는 먹을 수 없다(飯米に切れ′夕飯より食に絶え候)"라며 오키섬에 신청하고 있다. 이것을 안용복은 "조선에서는 타국의 배가 찾아오면, 음식을 대접하는데(朝鮮にて他国の舟参り候へば馳走いたし候)"라며 식량을 제공 받는 일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에 대해 촌장 与頭右衛門은 '표류한 배에는 식량을 주지만 소송을 위해 왔다면 飯米등은 준비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실제로 배 안을 보니 곤궁한 모습이었으므로 작년의 흉작으로 쌀은 줄어들었지만 악미라도 괜찮다면' 이라며 제공하고 있다.

 위에서 시모죠교수가 지적한 숙종실록의 기록은 '안용복일행 조사보고서'에서 안용복이 식량을 거절한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기록이다. 이미 관직을 사칭한 행동이 큰 죄임을 알고 있던 안용복이 조선에 귀국을 하면서 차왜가 호송하는 일을 거절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귀국한 후, 조선조정의 심문을 받게 될 것을 뻔히 알고 있는 상황에서 식량과 차왜(差倭)를 거절한 것이다.

 '안용복일행 조사보고서'상에는 안용복일행이 탄 배에 왜 식량이 떨어졌는지에 대한 이유가 언급되어 있다. 다른 배에 식량을 나누어 실었기에 충분한 식량이 없었으며, 안용복 일행은 사전에 오키에 들를 계획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오키에서 시간이 지체되어 식량이 부족했을 것으로 보인다. 먹을 것이 없어 전원이 밥을 굶게 된 상황에서 식량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모죠교수는 이런 정황으로 안용복의 인품을 거론하고 있는데, 식량이 없어 당장 굶을 상황에서 식량을 요구하는 것이 안용복의 인품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의아할 수밖에 없다. 단순히 안용복의 인격을 헐뜯으려 무리하게 이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숙종실록의 기록과 대비시켜 그의 진술을 부정하여, 안용복의 인격을 깎아내리려 하고 있다.

 이와 같이 본다면 '원록구병자년조선주착안일권지각서'에 보이는 안용복의 진술과 '숙종실록'에 기록된 안용복의 진술에는 큰 격차가 있다. 그 중에서 松島(독도)에 대한 안용복의 지리적 이해는 특필할 가치가 있다. 안용복은 松島를 于山島라고 하여 그 섬을 강원도 동래부에 속한다 라고 했지만, 울릉도와 우산도는 강원도 울진현이 관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래부는 경상도에 있는데 그곳은 노군(櫓軍)으로 배속되어 있던 안용복의 거주지이다.  더 나아가 안용복은 ´울릉도로부터 松島(독도)까지의 거리에 대해 "5월 15일 竹嶋를 출범하여 동일 松嶋에 도착했다.(五月十五日竹嶋出船′同日松嶋へ着き)"라고 하여 울릉도를 출발해 그 날 안에 독도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은주시청합기'에서는´松島(독도)에서 竹島(울릉도)까지 '하루반(一日半)'의 거리에 있다고 하여 안용복의 지리적 인식과는 크게 어긋나 있다.

  은주시청합기에는 죽도~송도까지가 1일 정도 걸린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왠지 시모죠교수는 一日程이라는 문구를 하루半으로 늘려 해석하는 왜곡을 단행하고 있다. 어느 학자도 一日程을 하루半으로까지 늘려 해석하지는 않는다.  

죽도에서 송도까지의 거리

이미 이전 글에서 이 부분을 문제 삼을 수 있다는 글을 올린 적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왜곡의 달인인 시모죠교수가 놓치지 않았다.
이전 글 참조.

 옛 범선으로 죽도~송도까지 하루 안에 도착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1724년 에도막부에 죽도도해가 금지된 전말을 보고하기위해 돗토리번이 제출한 문서인 죽도의 서부 3통중 첫 번째 문서를 보면, 1692년 3월 24일 오키를 떠나 26일 울릉도에 도착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는 오키~울릉도(약 250km)까지 이틀이 걸린 것으로 되어 있다. 죽도(울릉도)~송도(독도)까지가 87.4km인 것을 고려하면, 이틀 모두 항해하는데 소모했다고 가정해도 죽도~송도까지 대략 16시간이 걸렸다는 계산이 나와 하루가 채 안 되는 시간이 걸린것이다.

 특히 오오야큐에몬 선(船)의 선두(배의 책임자)였던 '히라베에(平兵衛)'와 '쿠로베에(黑兵衛)' 두 사람이 쓴 오오야쿠에몬의 선두의 구상서(上書, 진술서)'에는  卯月 16일 오키를 떠나, 동월 17일 오후 2시 울릉도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오오야(大谷)선이 오키에서 오전 6시에 출발했다고 가정하면, 32시간이 걸렸다는 이야기가 돼, 하루하고 12시간이 걸린 셈이다. 따라서 죽도~송도까지는 약 12시간 안팎이 걸린 셈이 된다. 오키에서 출발시각을 0시로 잡는다 해도 오키~죽도까지 38시간으로 죽도~송도까지는 약 13시간이 걸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안용복의 진술은 전혀 문제 삼을 것이 못된다.

 당시와 같은 범선은 바람만 잘 만나면 시간당 7.5~8km정도의 속도로 항해가 가능하다고 한다. 따라서 순풍을 타면 울릉도~독도(87.4km)까지는12시간 이내에도 도착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오히려 이 기록으로 안용복이 말하는 우산도는 현재의 죽도(Chukdo)가 아닌 독도임이 분명함을 알 수 있다. 울릉도에서 최단거리로 약 2km 이내에 있는 물이 없는 죽도라면 하룻밤을 기거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마땅히 코앞의 울릉도로 돌아와 하룻밤을 묶었을 것이다. 또, 울릉도에서 쫓겨난 왜 어부들이 울릉도에서 뻔히 보이는 죽도(Chukdo)로 도망갔을 리도 없다.

시모죠교수는 안용복이 우산도를 강원도 동래부에 속한다고 발언한 것을 문제시하고 있다. 울릉도와 우산도는 강원도에 속한 섬이 분명하며, 안용복이 그가 거주하는 동래부가 경상도에 속해 있음을 몰랐을 리가 없다.

 여기서 동래부를 거론한 것은 안용복이 울릉도와 우산도에 대한 지리적 인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호키슈에 소송을 하기 위해 도일한 만큼 자신이 거주하는 동래부를 언급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안용복이 지리적 인식이 모호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으로 ,시모죠교의 왜곡해석은 그의 말대로 특필할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이다.

지리적 인식이 모호해 앞선 기록에서 죽도~송도 사이의 거리가 50리이며, 우산도가 일본에서 송도라고 한다는 것까지 정확히 언급을 했는가?

결어

 이상 살펴본대로 시모죠 교수의 '안용복일행조사 보고서'를 논평한 글을 보면, 이 문서로 숙종실록상 안용복의 진술을 부정할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이 문서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숙종실록상의 안용복의 진술내용중  그의 일행이 도일(渡日)한 목적과 안용복의 우산도가 독도임이 일본 측 기록에서도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록은 안용복이 일본에서 울릉도뿐 아니라 독도인 우산도의 영유권까지 주장했다는 숙종실록상 그의 진술이 사실임을 뒷받침해 주는 가장 중요한 자료중 하나이다.

 시모죠교수는 이 문서의 이러한 핵심에 대한 언급은 회피하고 있다. 그는 이전 안용복이 말하는 우산도가 현재의 죽도(Chukdo)라는 주장을 해왔다. 진정한 학자라면 자신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먼저 인정하고 수정하는 것이 예의이다. 그런 발언은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숙종실록상 안용복의 진술이 사실임을 증명해 주는 자료를 별로 중요하지 않은 대목을 거론하며 애써 트집을 잡고 있다. 이러한 면모는 학자로서의 자세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그는 역사학자라기보다는 독도를 일본령으로 만들기위한 정치공작에 참여하고 있는 정치인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핵심을 먼저 이야기한 후에 세부사항을 거론하는 것이 정상적인 학자의 태도이다. 시모죠교수의 글 중 어디에도 안용복이 말하는 우산도가 독도임을 언급한 글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안용복의 진술은 100% 거짓말이다"라는 결론을 미리 내놓고, 특별한 증거자료없이 무리하게 숙종실록상 안용복의 진술을 부정하고 있다. 이 문서의 발견으로 이미 자신의 이전 학설이 무너져 내린 상황에서도 여전히 안용복의 진술은 모두 거짓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는 왜 한국 측에서 뿐아니라 같은 일본학자로부터도 자신의 논리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학자가 없는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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