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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록구병자년조선주착안일권지각서(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 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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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복의 제2차 일본행에 동행한
사람의 명단 '원록구병자년조선주착안일권지각서(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에 기재된
그들이 타고 온 배와 안용복 이외의 인적사항은 다음과 같다. 처음 이름을
써낸 것은 안용복, 이비원, 김가과, 뇌헌, 연습의 5人이며, 문서 끝에
나머지 동행한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죽도고의 기록 죽도고 말미에는 "아오야의 '차야큐우스케'가 그때 온 이국선 선원의 기록, 그리고 선박을 표시하는 그림을 소지하고 있다. 다음과 같다(靑屋ノ茶屋兵助ガ許ニ、其時來リ異舶ノ人員之記、並船驗ノ圖ヲ所持セリ、如左)" 라며, 안용복 일행 11인의 명단과 그들이 타고온 배의 그림을 소개하고 있다.
선박표지도(船檢圖)의 설명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어 안용복이 울릉도뿐 아니라 우산도의 영유권까지 주장했음이 드러나 있어, 안용복일행 조사보고서상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안용복 일행이
타고 있던 배에는 조울양도감세장신안동지기(朝鬱兩島監稅將臣安同知騎)라고
쓰여진 깃발이 달려 있었으며, 그 뒷면에 조선 오카지마 마사요시의 죽도고나 인부연표는 저자 자신의 주관이 많이 개입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돗토리번의 기록을 토대로 작성되었음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안용복의 요패내용이나 안용복이 타고 온 배를 묘사한 부분, 안용복의 일본에서의 행적 등에서 다른 기록에서는 찾을 수 없는 내용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문제는 죽도고의 기술내용 중 순수한 돗토리번의 기록과 오카지마 마사요시가 뒤에 첨부한 내용을 가려내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인부연표(因府年表 1696년 6월 6일조)에는 안용복 일행이 아오야에서 1696년 6월 5일부터 12일까지 머무르는 동안의 기록에 명을 내려 '번선이 단단히 묶어두고 이를 경비하게 하였다(番船堅ク付置キ是ヲ警衛ス)'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반면에 이인성이 마을 사람들의 요청에 의해 8장의 서필을 써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보아 마을 사람들과 안용복 일행 사이의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어 앞선 기록과는 서로 대치되고 있다.
또한, 돗토리번이 파견한 유학자와 안용복 일행이 센넨지라는 절에서 나눈 필담에 대해서도 죽도고에는 "죽도의 건에 의해 사신의 배를 보냈으나 명백하지 않다(竹島ノ義ニ依テ使舶ヲ通ゼシトモ明白セス)"고 기록하고 있다. 인부연표에 역시 이때의 일을 "선장 안동지 및 이진사, 그 밖의 한 사람을 아오야의 센넨지에 청하여, 필담을 하였으나, 그 주된 의미가 분명하지 못했다(船長安同知並李進士、外に一人を靑谷の專念寺に請じ、及筆談候へども、其主意明白せぎりし由)"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죽도고와 인부연표의 기록은 이인성이 문장에 능한 달필이었음을 고려할 때, 전혀 사실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안용복의 제1차 일본행에서 서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했다는 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으며[안용복을 화어통사(和語通詞)로 소개], 안용복일행 조사보고서상에서도 안용복의 통역으로 오키 관리의 심문이 진행된다는 점으로 보아도 이때 서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해 글을 써 이야기했고, 그나마 안용복 일행이 주장하는 바를 알아듣지 못했다는 죽도고나 인부연표의 기록은 전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후의 일본 측 기록에는 아오야(靑谷)의 센넨지(專念寺)에서 돗토리번의 유학자와 대담한 이후로, 안용복 일행이 일본어를 모른다는 식의 기록이 계속 등장하여 무언가 중요한 사실을 숨기려 한 흔적이 많이 보이고 있다. 이렇듯, 오카지마 마사요시의 인부연포나 죽도고 등의 일본 측 기술내용은 전후문장을 다시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으며, 저자가 상당부분 죽도는 일본령이라는 사견에서 진실을 왜곡하려 했음을 고려하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숙종실록의 기록 숙종실록 숙종 22년 8월 29일조에 안용복일행의 제2차 도일(渡日)후 조선에 귀국했을 때의 안용복일행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이상 3기록을 대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제 2차 일본행에 동행한 사람들의 명단을 보면, 僧5인의 명단은 호키를 제외하고 숙종실록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으며, 6인의 속인은 오키와 호키에서 조선조정의 명을 받아 일본에 온 것처럼 보이기 위해 자신의 姓에 관직명을 붙여 제시했다. 물론 숙종실상의 명단이 그 실명이다. 3기록 모두에서 11人이 동일인임을 알 수 있다. '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에
대한 일본 측 견해(下條正男)
우선, 문서를 보면, 안용복 일행의 울릉도에서 오키까지의 여정이 순조로운 항해였음을 단정해 파악할 수 있는 글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상세한 행적이 생략된 대강의 여정을 밝히고 있을 뿐이다. 이 기록에 안용복의 숙종실록상 진술내용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숙종실록 안용복의 진술을 부정하고 있다. 마치 안용복이 "울릉도에서 일본어부를 만난 적은 없다.'라고 발언한 것처럼 단정하고 있다. 자신의 상상을 논거로 삼는 학자답지 못한 행태다. 시모죠교수의 말대로면, '안용복일행 조사보고서'에 등장하지 않는 모든 진술은 거짓이 된다는 이상한 논리가 성립하게 된다. 또한, 안용복 일행이 오키섬에 표류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 문구는 정확히 해독이 안 되는 것으로써 시모죠 교수는 이 불확실한 부분을 마치 확정된 것으로써 마음대로 단정하고 있다. 安龍福申候ハ、私乘参候船ニハ十壹人伯州江参取鳥伯耆守樣江御斷之儀在之候(越)申候。順風一、안용복의 말에 의하면, 자신이 타고 온 배의 11人은 호키(伯耆)를 거쳐 돗토리번(鳥取藩)의 호키(伯耆) 노카미(守様)에게 단판을 지으려고 순풍을 타고 당지(오키도)에 들렀다고 합니다. 그다음에는 호키로 항해할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참고로 다케시마 연구회에서 내놓은 자료에는 惡布로 해독하고 있다. 惡布로 해석한다면, 숙종실록상 안용복의 진술내용처럼 오키에 표류했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시모죠 교수는 다케시마 연구회 회장으로서, 자신들이 해독한 원문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야 할 것이다. 다만,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숙종실록상 안용복은 왜어부를 우산도까지 따라가 거기서 다시 도망가는 왜 어부를 쫓아간 것으로 진술하고 있다. 그런데 안용복일행조사보고서에서는 우산도(독도)에서 그 다음날 출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안용복의 제2차 일본행은 조선팔도지도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점, 대규모 선단을 꾸려 울릉도로 향한 사실 등을 볼 때, 다분히 사전에 준비된 것임이 틀림없다. 안용복은 그의 상관에게 1693년 울릉도에 표류해 방문한 섬이 산물이 풍부한 섬임을 보고하여 선단을 꾸려 본격적인 어로(漁撈)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이때 안용복은 1693년 울릉도에서 왜어부를 만나 일본에 연행된 경험이 있었고, 월경한 죄로 2년간 옥살이를 치른 후였다. 에도막부의 죽도도해금지령에 대한 소식을 아직 접하지 못한 안용복은 울릉도에 도착하여 어렵을 하고 있는 왜 어부를 다시 만나면,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와 우산도 영유권 소송을 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안용복은 숙종실록상 그의 발언내용처럼 울릉도에 왜 어부가 와있는 것을 발견하고, 우산도까지 따라가 다음 날 일본을 향해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숙종실록 상의 안용복의 진술은 긴 여정을 축약해 진술한 것이라는 점에서 안용복일행이 우산도를 떠난 정확한 시점에 대해서는 숙종실록의 기록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안용복의 진술은 그의 행적에 있어서의 정확한 일시가 생략된 발언으로 우산도에서 왜 어부를 쫓아간 시기가 乃(이에)로 표현되어 있다. 안용복의 제2차 일본행이 사전에 계획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안용복일행 조사보고서'에서 처럼 우산도에서 하루를 기거하고 일본으로 향했을 가능성이 크다.
(숙종실록 숙종 22년 9월 27일조 이곳을 클릭) 숙종실록에는 울릉도에서 왜 어부를 만난 후, 이튿날 새벽에 배를 몰아 우산도로 향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안용복일행 조사보고서'에는 같은 날 송도(于山島)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분명히 숙종실록상 안용복의 발언과는 차이가 난다. 그렇다고 어느 기록이 정확한 것인지 쉽게 확정을 해 안용복의 진술내용을 부정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안용복이 울릉도에 갔을 때 일본어부를 만났을 가능성이 크며(이전 글 참조), 이전 1693년 도일(渡日)한 일로 2년여의 옥살이를 치렀음을 생각한다면, 이때 안용복이 일본어부를 울릉도에서 쫓아냈다는 안용복의 진술은 신뢰할 만하다고 할 것이다. '안용복일행 조사보고서'에 그 내용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거짓말이라는 시모죠교수의 생각은 단순한 자신의 상상에 불과한 것이다. 자신의 논거를 뒷받침해줄 어떤 자료도, 정황제시도 없이 그저 '안용복일행 조사보고서'에 이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이유만으로 거짓이라 하고 있다. 전혀 학자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지 않다. 숙종실록에서 처음 조선의 조정대신들은 안용복의 진술을 의심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후 대마도와의 교섭과정을 거치면서는 안용복의 진술을 인정하고 있었다.(숙종실록 숙종 22년(1696) 9월 25일조 이곳을 참조) 이런 정황은 도외시하고 시모죠 교수는 조선조정에서 안용복의 진술을 의심했다는 앞선 기록만을 부각시켜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 또한 비변사 심문기록은 안용복뿐 아니라 함께 동행한 나머지 10인 전원의 공술내용과 큰 차이가 없었음이 위 숙종실록 숙종 22년(1696) 9월 25일조 끝에 기록되어 있다.
위에서 시모죠교수가 지적한 숙종실록의 기록은 '안용복일행 조사보고서'에서 안용복이 식량을 거절한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기록이다. 이미 관직을 사칭한 행동이 큰 죄임을 알고 있던 안용복이 조선에 귀국을 하면서 차왜가 호송하는 일을 거절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귀국한 후, 조선조정의 심문을 받게 될 것을 뻔히 알고 있는 상황에서 식량과 차왜(差倭)를 거절한 것이다. '안용복일행 조사보고서'상에는 안용복일행이 탄 배에
왜 식량이 떨어졌는지에 대한 이유가 언급되어 있다. 다른
배에 식량을 나누어 실었기에 충분한 식량이 없었으며,
안용복 일행은 사전에 오키에 들를 계획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오키에서 시간이 지체되어 식량이 부족했을 것으로
보인다. 먹을 것이 없어 전원이 밥을 굶게 된 상황에서 식량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모죠교수는 이런 정황으로
안용복의 인품을 거론하고 있는데, 식량이 없어 당장 굶을
상황에서 식량을 요구하는 것이 안용복의 인품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의아할 수밖에 없다. 단순히 안용복의 인격을 헐뜯으려
무리하게 이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숙종실록의
기록과 대비시켜 그의 진술을 부정하여, 안용복의 인격을
깎아내리려 하고 있다.
은주시청합기에는 죽도~송도까지가 1일 정도 걸린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왠지 시모죠교수는 一日程이라는 문구를 하루半으로 늘려 해석하는 왜곡을 단행하고 있다. 어느 학자도 一日程을 하루半으로까지 늘려 해석하지는 않는다. 죽도에서 송도까지의 거리 옛 범선으로 죽도~송도까지
하루 안에 도착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특히 오오야큐에몬 선(船)의 선두(배의 책임자)였던 '히라베에(平兵衛)'와 '쿠로베에(黑兵衛)' 두 사람이 쓴 오오야쿠에몬의 선두의 구상서(口上書, 진술서)'에는 卯月 16일 오키를 떠나, 동월 17일 오후 2시 울릉도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오오야(大谷)선이 오키에서 오전 6시에 출발했다고 가정하면, 32시간이 걸렸다는 이야기가 돼, 하루하고 12시간이 걸린 셈이다. 따라서 죽도~송도까지는 약 12시간 안팎이 걸린 셈이 된다. 오키에서 출발시각을 0시로 잡는다 해도 오키~죽도까지 38시간으로 죽도~송도까지는 약 13시간이 걸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안용복의 진술은 전혀 문제 삼을 것이 못된다. 당시와 같은 범선은 바람만 잘 만나면 시간당 7.5~8km정도의 속도로 항해가 가능하다고 한다. 따라서 순풍을 타면 울릉도~독도(87.4km)까지는12시간 이내에도 도착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오히려 이 기록으로 안용복이 말하는 우산도는 현재의 죽도(Chukdo)가 아닌 독도임이 분명함을 알 수 있다. 울릉도에서 최단거리로 약 2km 이내에 있는 물이 없는 죽도라면 하룻밤을 기거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마땅히 코앞의 울릉도로 돌아와 하룻밤을 묶었을 것이다. 또, 울릉도에서 쫓겨난 왜 어부들이 울릉도에서 뻔히 보이는 죽도(Chukdo)로 도망갔을 리도 없다. 시모죠교수는 안용복이 우산도를 강원도 동래부에 속한다고 발언한 것을 문제시하고 있다. 울릉도와 우산도는 강원도에 속한 섬이 분명하며, 안용복이 그가 거주하는 동래부가 경상도에 속해 있음을 몰랐을 리가 없다. 여기서 동래부를 거론한 것은 안용복이 울릉도와 우산도에 대한 지리적 인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호키슈에 소송을 하기 위해 도일한 만큼 자신이 거주하는 동래부를 언급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안용복이 지리적 인식이 모호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으로 ,시모죠교의 왜곡해석은 그의 말대로 특필할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이다. 지리적 인식이 모호해 앞선 기록에서 죽도~송도 사이의 거리가 50리이며, 우산도가 일본에서 송도라고 한다는 것까지 정확히 언급을 했는가? 결어 이상 살펴본대로 시모죠 교수의 '안용복일행조사 보고서'를 논평한 글을 보면, 이 문서로 숙종실록상 안용복의 진술을 부정할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이 문서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숙종실록상의 안용복의 진술내용중 그의 일행이 도일(渡日)한 목적과 안용복의 우산도가 독도임이 일본 측 기록에서도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록은 안용복이 일본에서 울릉도뿐 아니라 독도인 우산도의 영유권까지 주장했다는 숙종실록상 그의 진술이 사실임을 뒷받침해 주는 가장 중요한 자료중 하나이다. 시모죠교수는
이 문서의 이러한 핵심에 대한 언급은 회피하고 있다.
그는 이전 안용복이 말하는 우산도가 현재의 죽도(Chukdo)라는 주장을 해왔다. 진정한 학자라면 자신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먼저 인정하고 수정하는 것이 예의이다. 그런 발언은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숙종실록상 안용복의 진술이 사실임을 증명해 주는
자료를 별로 중요하지 않은 대목을 거론하며 애써 트집을 잡고
있다. 이러한 면모는 학자로서의 자세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그는 역사학자라기보다는
독도를 일본령으로 만들기위한 정치공작에 참여하고 있는 정치인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핵심을 먼저 이야기한 후에 세부사항을 거론하는 것이 정상적인
학자의 태도이다.
시모죠교수의 글 중 어디에도 안용복이 말하는 우산도가 독도임을 언급한
글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왜 한국 측에서 뿐아니라 같은 일본학자로부터도 자신의
논리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학자가 없는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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