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도1건에 송도(독도)가 포함된 이유

A. 한일 양국에서는 다 같이 松島(독도)를 울릉도의 부속섬으로써 생각했다.
한국의 문헌이나 고지도에는 울릉도와 독도를 모자와 형제의 관계로 기술해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주도와 속도의 관계로 파악해 왔다.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만기요람, 증보문헌비고 등 조선의 관찬 사서에 울릉도와 더불어 우산도를 거론하고 있으며, 고지도에 역시 울릉도와 함께 동해상에 우산도를 그려넣음으로써 울릉도의 속도임을 기록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래에서는 지금껏 한국인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던 일본 측 기록에 보이는 송도(독도)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일본에서의 송도 발견과정과 그 이후 송도(독도)에 대한 인식

 일본에서 송도도해를 시작한 것은 대개 1650년대 중반기로 알려져 있다. 1681년 막부 순검사(巡檢使)에 대한 청원서 중에 오오야 家의 3대 당주인 오오야 큐에몬 카쯔노부(大谷九右衛門勝信)가 "죽도 항로에 둘레가 20町 정도 되는 작은 섬(竹嶋之道筋二貳十町斗廻り申小嶋)을 25년전, 아베 시로고로님이 받도록 주선해 주셔서 배를 건네고 있습니다.(廿五年以前、阿部四郞五朗樣御取持を以排領、船渡海仕候) 라고 말한 적이 있다.(大谷家목록 1-19) 둘레 20정 정도의 작은 섬은 송도로 보이며, 1681년의 시점에서 25년 전인 1656년경부터 송도도해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 문헌사료상 처음으로 송도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사료는 1650년대 초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연대 미상)되는 이시이 무네요시(石井宗悅)의 서장(書狀)이다.

(前略)松島ヘ七八拾石之小舟遣、鐵砲ニ而ミチ打申候ヘ、小島之事ニ候間、竹嶋江ミチにけさり、竹嶋之納所大分候へんと市兵衛望被申候(後略)

송도에 칠 팔십 석 크기의 작은 배를 보내어 철포로 물개를 쏘면, 작은 섬이기 때문에 (숨을 곳이 없기 때문에) 죽도로 물개가 도망가서, 죽도에서 많이 잡을 수 있으니 그렇게 하고 싶다고 이치베에가 말했다.

 강치를 잡는데 송도와 죽도 2섬을 하나의 묶음으로써 이용했음이 드러나 있다. 송도의 이용에 소극적이었던 오오야家와는 달리 무라카와家에서는 송도를 발견한 후부터 송도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두 가문은 1681년 협의를 하여 "송도와 죽도는 이후 함께 하는 일로 한다(松島竹島、以後奇合之所務に仕候)"고 결정하였다. 죽도와 송도를 한 묶음으로써 이용한다는 것으로, 송도만 가지고는 그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기에 두 섬을 함께 이용하려 한 것이다.

이 기록을 통해 일본에서 역시 송도를 발견한 초기부터 조선과 마찬가지로 송도(독도)를 죽도(울릉도)의 부속 섬으로써 인식했다는 한가지 증거가 확보된다.

죽도도해 어업을 경영했던 오오야(大谷)家와 무라카와家, 그리고 아베시로고로의 가신인 카메야마 쇼자에몬(龜山庄左衛門)사이에 서로 주고받은 문서를 보자.

원문과 해석 본은 독도논문번역선Ⅱ(바른역사정립기획단, 다다미디어,2005, 池內敏교수의 竹島渡海와 돗토리번) 27~39쪽에서 발췌, 원문 전문은 독도논문번역선을 참조할 것.)

七月十五日村川市兵衛御越候御狀拜見、殊更畦踏皮三足贈給添候、先以道喜老初各御無事之由目出珍重存候、此表無相替儀、四郞五郞無爲拙者体と無異儀罷在候、可御心安候、如承意春ハ中久久御在江戶候へ共、爲差御馳走も不仕、今更御殘多候、將又竹嶋渡海筋松へ之小舟之儀被仰越候、今度市兵衛方ニ樣子具承候、去年市兵衛舟出候、着舟不申大分之損仕由、於然ハ先市兵衛舟遣候、貴樣重而之番より渡海可然候、其節御越候ハ御直季可承候、

龜山庄左衛門(花押)
大屋道喜樣

아베 시로고로(阿部四郞五郞)의 가신.


 7월 15일 무라카와 이치베에님이 보내신 서장을 받았습니다. 특히 계답피 3켤레를 보내주시니 황송합니다. 먼저 도키(道喜)님을 비롯하여 모두 무고하시다고 하니 경사스러운 일입니다. 이곳도 아무 일없이 지냅니다.(아베) 시로고님도 저와 다름없이 무고하십니다. 안심하십시오. 봄에 오랫동안 에도에 계셨는데도 별반 대접도 못 해드린 것이 지금까지도 마음에 남습니다. 또, 죽도 항로 중에 있는 송도에 가는 배에 관해 말씀하셔서, 이번에 이치베에님의 상황을 자세히 살폈습니다. 작년에 이치베에님이 도해하셨습니다만 배를 대지 못하여 많은 손해를 보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먼저 이치베에님이 도해하시고 귀하는 그 다음 번에 도해하십시오. 그때 오시면 상세한 내용을 듣겠습니다.(이하 생략)

万治 1년/1658) 9월 7일
카메야마 쇼자에몬(龜山庄左衛門) 인
오오야 도키(大屋道喜) 님(樣)

(大谷家목록 2-33)


무라카와 이치베에님에게 보낸 서장의 사본(村川市兵衛方へ遣書狀之寫)

 오오야 큐우에몬 댁에 가신다고 하니 한 말씀 써 올립니다. 여름에 오셨지만 별반 대접을 해 드리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마음에 걸립니다. 가시는 도중 별 다른 일은 없었는지, 이미 도착하셨는지 걱정이 됩니다. 이곳은 별 일 없습니다. 주인님을 비롯하여 모두 무고하시고 저도 별다른 일 없이 지내고 있으니 안심하십시오.

그러면 죽도 가까이에 있는 작은 섬에 도해하는 것에 관해서 작년 귀하가 말씀하시길, 오오야 큐우에몬 댁은 같은 생각이 아니니 당신만이 보내는 것은 어떨까 라는 말씀을 하여서, 그때 우리들이 당분간은 그러하겠지만 해야 할 일도 정해져 있으니 오오야도 도해하고 싶다는 말을 할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竹嶋近所之小嶋へ小船渡海之儀、去年貴樣被仰候へ、大屋九右衛門方ハ同心無之候間貴樣斗にて可遣哉と被申候間、其節我等申候ハ、當分同心無之候ても定而所務も有之候、大屋も渡海と被申にて可有之候、)

같은 생각이 아니라는 말은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머지 않아 왜 혼자만 도해하느냐고 물을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번에 큐우에몬님이 오셔서 말씀하시길, 이치베에와 함께 작은 배를 보내고자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말하길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3년 전에 무라카와가 많은 손해를 보았다고 하니 내년에도 무라카와의 배를 먼저 보내고, 오오야 큐우에몬님 댁은 오는 丑寅 양년부터 보내고, 그 후에는 선례에 따라 두 사람이 번갈아 도해해야 합니다. 그 섬은 초목도 없는 곳이니 달리 할 만한 일도 없고 강치 기름을 취하는 일 하나만 할 수 있다고 하니, 서로 어려운 일이 없도록 의논하시기 바랍니다.
(万治2年/1659) 9월 8일

카메야마 쇼자에몬(龜山庄左衛門)

오오야 도키(大屋道喜)님(樣)

(大谷家목록 2-25)


 (上略)

 8월 8일의 서신을 보고 먼저 귀하가 무고하다는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합니다.(아베)시로고로가 지난 3월 상순에 병이 들어서 같은 달 16일에 돌아가셨습니다. 여러분과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오신 분이었기에 슬픔이 클 줄 압니다. 상속에 관해서는 생존 중에 막내동생인 곤하치로를 양자로 맞아들이셨고, 이 일은 막부에 이미 보고되었으니 안심하십시오. 병석에 있었을 때 老中님들이 문안오셔서 이것저것 잘 대해주셨으므로 시로고로가 매우 감사해했습니다.
곤하치로에게도 시로고로와 마찬가지로 老中님들이 잘 대해주시고 있으니 안심하십시오. 시키실 일이 있으면 시로고로에게 한 것 같이 시키십시오. 조금도 염려할 것 없습니다.

또 내년부터 죽도 안에 있는 송도에 귀하의 배가 도해할 것이라는 것에 대해 예전에 시로고로가 老中님에게 사전 허락을 받았습니다.(將又來年より竹嶋之內松嶋へ貴樣舟御渡之筈ニ御座候旨、先年四郞五郞御老中樣ヘ得御內意申候、)

도해 순서를 정해서 이치베에님과 귀하에게 증명서를 드리겠으니 이치베에님과 의논하시어 그 증명서대로 하십시오. 이치베에님도 귀하도 그 증명서에 조금도 위배됨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万治 3년/1660) 9월 5일
카메야마 쇼자에몬(龜山庄左衛門) 인
오오야 큐우에몬(大屋九右衛門) 친전(樣)

(大谷家목록 2-34, 大谷氏舊記)

 무라카와家는 이미 1657년 단독으로 송도도해를 시도했고 이에 대해 오오야家와의 사이에 견해차가 있었다. 이에 두 가문 사이의 중재를 막부의 노중(老中) 아베 시로고로(阿部四郞五郞)에게 요청하게 되는데, 위 문서들은 이 과정에서 두 가문과 아베의 가신인 카메야마 쇼자에몬(龜山庄左衛門), 3자가 서로 주고받은 서신이다.

竹嶋渡海筋松嶋(죽도 항로 중에 있는 송도),竹嶋近所之小嶋(죽도 가까이에 있는 작은 섬), 竹嶋之內松嶋(죽도 안에 있는 송도)라고 표현하고 있다. 일본에서 처음 송도를 발견한 때로부터 송도를 죽도의 부속된 섬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죽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했다면 한일 양국 모두 죽도의 부속 섬으로 인식한 송도 역시 포함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1696년 에도막부가 돗토리번에 송도에 대해서 질문하는데, 이때 小谷伊兵衛가 막부에 제출한 竹嶋의 書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一、伯耆米子より出雲雲津점*道程拾里程。
一、出雲
雲津より隱岐燒火山道程貳拾三里程。
一、隱岐
燒火山より同福浦七里程。
一、福浦より松島
え八十里程。
一、松島より竹島
え四十里程。
 以上
子正月卄五日※

別紙

一、松嶋え伯耆國より海路百貳拾里程御座候事。 
一、松嶋より朝鮮えは八九十里程も御座候樣及承候事。
一、松嶋は何れの國え附候嶋こても無御座由承
候事。
一、松嶋え獵參候儀竹嶋え渡海の節通筋こて御座候故立寄
獵仕侯他領より獵參候儀は不承候事尤出雲國隱岐國の者は米子のものと同船こて參候事。
以上
正月卄五日

*독도자료총람에는 자로 나오는데迨자의 이형자인 로 보임.
※ 1696년 2월 27일.


별지

一、松嶋에서 伯耆國까지 海路 120리 정도 됨
一、松嶋에서 조선까지는 8, 90리 정도나 된다고 하며 또 그렇게 듣고 있음.
一、송도는 어느 나라에 부속되어 있는 섬인가 하면 부속된 나라가 없다고 듣고 있음
一、松嶋에 사냥을 하러 갔는데 竹嶋로 도해할 때 길목이었기 때문에 들려서 사냥을 했음. 他領地에서 사냥을 하는 것은 동의할 수 없는 것인데 그렇다고는 하지만 出雲國과 隱岐國의 사람이 米子 사람과 같이 배로 가고 있음

이상

(이하 생략)

1월 25일

독도자료총람 299쪽에서 인용.

 이 기록을 통해 우리는 일본에서 처음 송도를 발견했을 때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오오야·무라까와 두 가문은 죽도인 울릉도로 가면서 그 길목에서 송도를 발견한 것이다. 또한, 일본의 어느 國(구니)에도 속해 있지 않다는 답변이 실려 있어 본래 일본에서는 울릉도로 도해하면서 죽도와 송도를 일본영토로 인식하지 않고 있었음이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일본인들은 송도를 발견한 처음부터 송도(독도)를 죽도(울릉도)의 부속 섬으로써 인식하게 되었고, 이러한 인식은 그 후 계속되어 일제강점기에까지 이어지게 된다.

에도막부가 쯔시마번 에도 번저에 죽도와 송도가 각각 어떤 섬이냐는 문의에 답한 대마번의 회답문서에 역시 원록연간의 문서를 들어, 松島를 죽도 근처의 섬(竹島近所ニ松島)으로 기술했다.

※이 문서는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된 대마도종가문서(문서번호 No.4013)에 실려있으며, 이훈교수는 이 문서가 1722년 이와미 주민이 죽도도해를 했을 때의 문서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케우치 사토시 교수는 1722년 이와미 주민의 죽도도해 사실은 없었음을 이유로 들어 天保 7년(1836년)의 자료로 보고 있다.

松島之儀元祿年御老中阿倍豊後守樣より御尋之節、竹島近所ニ松島と申嶋有之此所江も日本人罷渡漁仕候段、下々風說ニ乘段答申上候由、留書ニ相見申候、竹島同樣日本人罷渡致漁候儀御停止之嶋とハ被考候得共、差極候儀者御答仕兼候、朝鮮地圖を以相考候得者、蔚陵于山二島有之と相見申候、右竹島江彼國漁民共罷渡且木材多島と相聞候付、爲舟造罷渡候由ニ而住居之者ハ無之由ニ御座候、尤彼國役人時々見分致渡海候と相聞申候、尤も當時ハ如何ニ御座候哉、差極候儀難申上候、
(以下略) 

송도에 관해 元錄때 老中 아베님이 문의하셨습니다. 그때 대답하길, 죽도 근처의 송도라는 섬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풍문에 의하면 이곳에도 일본인이 배를 타고 가서 어로를 한다고 합니다, 라고 회답한 것이 보관된 서류(留書)에 남아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죽도와 마찬가지로 일본인이 배를 타고 가서 어로를 하는 것을 금지한 섬이라고 생각하나, 정확하게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조선 지도를 보면 울릉과 우산 두 개의 섬을 볼 수 있는데 위의 죽도에 그 나라 어민들이 도해하고, 또 목재가 많은 섬이라고 듣고 배를 만들기 위해 간다고 하며 사람이 살고 있지는 않다고 합니다. 그 나라 관리가 때때로 시찰을 위해 도해한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이하 생략)

 이렇듯 일본에서 송도를 죽도의 부속 섬으로써 생각했다면 마땅히 죽도 1건으로 죽도에의 도해금지를 명령했다면, 송도가 포함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뿐 아니라 일본의 기록 역시 우산도(송도)는 죽도와 함께 등장한다. 한국과 일본의 어느 기록에도 송도(독도, 우산도) 단독으로 표시된 기록이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은 만큼 독도는 울릉도의 일부분으로써 다루어져 온 것이다.

 죽도가 조선의 영토로 결정된 것은 분명하나 상세한 사정은 잘 모르겠다는 회답으로 보아 이케우치 사토시교수의 주장대로 이 문서의 연대는 1836년이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즉, 죽도와 송도에 100여 년 이상 가보지 못했기에 일본에서는 19세기 들어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지리적 인식이 희미해져 있었다. 그런 이유로 19세 중엽부터 일본에서는 독도와 울릉도에 대한 명칭혼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나머지 일본에서 송도를 죽도의 부속 섬으로써 묘사한 자세한 기록은 이전 글을 참조

B. '죽도 1건'에서 안용복의 활동이 중요한 이유

 안용복일행 조사보고서 상에서 안용복은 죽도뿐 아니라 우산도의 영유권까지 주장했다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나 있다. 안용복은 제2차 일본행에서 이인성으로 하여금 소를 쓰게 해 에도막부에 전달했다. 이때는 이미 죽도도해금지령이 내려진 이후이나, 에도막부는 안용복의 소장을 통해 울릉도에 독도까지 포함되어 있었음을 인지한 상황에서 조선조정에 그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이미 돗토리번을 통해 죽도와 송도가 일본령이 아님을 여러 번에 걸쳐서 확인했기 때문이다.

 조선조정이나 일본조정이나 그 관심은 울릉도였다. 목재와 전복, 강치, 인삼이 풍부한 울릉도가 관심의 대상이었지 일개 바위 섬에 불과한 독도는 두 나라 정부 모두 울릉도에 부속한 섬으로써만 인식하고 있었을 뿐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물론 조선조정에서는 우산도(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써 인식하여 울릉도만 거론하면 당연히 우산도까지 포함한 것으로써 생각했다. 그렇다 해도 죽도 1건에 우산도가 포함되어 있음을 공문서에 기록해 두지 않으므로 해서 훗날 일본에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빌미를 제공한 셈이 되었다. 여기서 안용복의 진가가 발휘된다.

안용복은 제1차 일본행에서 역시 울릉도 이외,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한 것으로 진술했다. 이에 관해서는 일본 측 기록인 죽도기사에 다음과 같은 안용복의 진술내용이 남아있다.

この度參候島より北東に大きなる嶋これあり候。かの地逗留の內、ようやく二度、これを見申候。彼島を存じたるもの申候は、于山島と申し候通り申し開き候。終に參りたる事はこれ無く候。大方路法一日路これ有るべく候。

이번에 섬으로부터 북동쪽에서 커다란 섬을 보았습니다.  그 땅 안에 머무르며, 드디어 이 섬을 두 번 보았다고 합니다.  이 섬을 알고 나서, 우산도라고 부른다고 들었다 합니다. 그것을 끝으로 본 일은 없습니다. 대방로법으로 하루 거리에 있습니다.

 시모죠 마사오 교수는 엉뚱하게도 안용복이 본 섬이 울릉도 북동쪽에 있다는 발언만을 부각시켜 이때 안용복이 본 섬이 죽도(댓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울릉도나 울릉도 근처 바다에서 독도의 위치를 약간 혼동할 여지는 얼마든지 존재한다. 이런 이유로 한국의 고지도에서는 우산도를 울릉도의 동쪽이나 북동쪽에 그려넣은 사례가 많았다. 울릉도에서 뱃길로 하루 걸리는 섬은 독도밖에 없다. 또한, 안용복은 울릉도에 있는 동안 두 차례에 한정해서 우산도를 보았다고 말하였다. 댓섬인 죽도(Chukdo)는 언제나 울릉도에서 목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모죠 교수의 해석은 그야말로 아전인수격의 왜곡 해석인 셈이다.

 안용복의 이 발언에서는 독도를 조선어부들 사이에서 우산도라고 불렀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어, 한국 기록 속 우산도는 독도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이러한 안용복의 진술은 오키에서 발견된 안용복의 문서에서 또 한 번 증명됨으로써, 이젠 누구도 안용복이 말하는 우산도가 독도임을 의심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안용복은 제2차 일본행에서뿐 아니라 제1차 일본행에서 역시 울릉도와 더불어 우산도의 영유권을 주장함으로써 당시 일본 측에서도 죽도(울릉도)에 우산도가 부속되어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확증을 제시해 주고 있다. 안용복의 두 차례에 걸친 일본행에서 안용복의 주장은 두 번 모두 에도막부에 전달되었으므로, 1696년 일본의 에도막부에서 죽도를 조선령으로 인정했다면, 그 결정에는 당연히 우산도까지 포함이 된 것이었다.

C. 일본의 독도 명칭혼동이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도 죽도 1건에 독도가 포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독도(송도)에의 도해를 금지하지 않았다면, 일본에서 서양의 잘못된 지리적 전거를 그대로 수용한 결과, 독도의 명칭이 두 번씩이나 바뀐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독도에 가지 못했기에 이런 명칭상 혼동이 일어난 것이다.

D. 일본에서는 1877년 태정관 지령서를 통해 다시 한번 원록년간의 죽도 1건에 송도가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죽도(울릉도)외에 1島인 송도(독도)가 일본영토와는 무관한 섬임을 밝힘으로써, 일본정부는 두 차례에 걸쳐 독도가 조선령임을 확인해 주었다.

결어

 이상과 같은 이유로써 1693부터 1696년까지의 조선과 왜 양국 사이의 울릉도 영유권분쟁의 결과 일본에서 울릉도가 조선령임을 인정한 죽도 1건에는 울릉도(竹島)뿐 아니라 우산도(독도, 송도)까지 포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용복의 활동이 한국에서 특히 부각되는 이유는 그가 한일 양국 정부 사이의 영토분쟁에서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던 우산도(독도)까지 함께 그 영유권 주장을 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안용복에 관한 자료로 말미암아 자칫 역사의 뒤안길에 묻힐 뻔 했던 독도까지 죽도1건에 포함돼 있음이 증명되고 있다. 또한, 안용복의 활동 이후, 조선에서는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지리적 인식이 점차 뚜렷해져 갔으며, 울릉도의 가장 대표적인 부속 섬으로써 왜인들이 송도라고 부르는 섬이 우산도임을 기록해 그 섬이 독도임을 분명히 기록해 두었다. 이 모두가 안용복의 공이다. 일본에서는 죽도 1건에서 안용복이 차지하는 비중을 너무 과대하게 선전한다고 한국을 자국 중심주의적인 역사관을 탈피하지 못한 국가로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안용복은 현재에도 우산도가 독도가 아니라는 일본의 독도 역사왜곡을 바로잡는데 그 일등공신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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