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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도해면허(竹島渡海免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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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정부에서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근거 중 하나가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가 오오야 신키찌(大谷甚吉)와 무라카와 이치베에(村川市兵衛)의 신청에 의해 두 가문에게 1625년에 내준 죽도도해면허(竹島渡海免許)다. 이후 일본은 1625년부터 약 70여 년간 죽도(울릉도)와 독도(松島)를 영유 또는 실효적 점유를 했다 주장하고 있다.
※ 사실
송도도해면허는 따로 발급되지 않았다. 1657년 처음으로 무라카와(村川)家가
松島에 도해하고 난 이후 松島에 대해 거론한 기록이 있으나 여기에
'죽도도해면허'와 같은 문서의 존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1666년 오야家의 배가 조선에 표착했을 때 역시 '죽도도해면허'는 발견되었지만
'송도도해면허'는 발견되지 않았다. 송도도해면허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池內敏의 '竹島渡海と島取藩'島取地域史硏究
제1호, 1999) 이처럼 송도도해면허가 따로 발급이 되지 않은 이유는
죽도도해면허 안에 송도가 포함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독도를 울릉도의
속도로 본 일본의 인식에 말미암은 것이다.
두
사람에게 죽도도해면허를 허가한다는 취지를
돗토리번주
마쯔다이라 신타로우(松平新太郞)에게 전한 '돗토리번사(島取蕃史 제6권
事變志一 466항)'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죽도도해면허를 발급한 시기) 종전까지 이 시기가 1617년 도해면허 신청 바로 다음해인 1618년에 도해면허가 발급된 것으로 알아 왔으나, 이케우치사토시 교수에 의해 1625년이 확실한 죽도도해면허 발급시기인 것으로 수정되었으며, 한일 학자 모두에서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즉 위 죽도도해면허에 서명한 4명의 노중 중에서 도이와 사카이가 노중(老中, 로우주우 ; 막부의 최고위직으로 정무전반을 총괄함)으로 취임한 것은 1622년부터였다. 1618년 당시 이들은 코쇼구미반카시라(小姓組番頭)라는 직책에 있었으므로, 마땅히 죽도도해면허가 발급된 해는 1622년 이후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또한 오오야가의 문서에는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의 시기에 죽도면허를 발급받았다고 하는데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가 장군에 즉위한 해는 1623년이었다. 나고야 대학 '이케우치사토시(池內敏)'교수는 대마도 종가의 사료에서의 1625년이 그 정확한 발급연도를 고증함으로써 한일 양국 모두에서 죽도도해발급시기를 종전 1618년에서 1625년으로 수정하고 있다. 위 죽도 도해면허를 두고 한일 간 가장 큰 입장차를 보이고 있는 부분이 과연 당시의 에도막부가 죽도인 울릉도가 조선령임을 알고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는지에 대한 판단이 엇갈리고 있으며, 죽도도해면허의 성격을 두고도 서로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죽도도해면허에 대한 일본측 주장) 일본에서는 이 도해면허에 대해 에도막부의 공인하에 이루어진 점을 특별히 강조하여 당시의 죽도도해 사업을 정당화하고 있다.(일본 외무성의 가와카미 겐조) 최근 이러한 주장과 아울러, "1625년 시점에서 죽도가 조선령이라는 인식이 없이 요나고(米子)의 두 가문에게 독점적 개발권을 주었다"는 주장이 나와 가와카미 겐조의 의견을 뒷받침하고 있다. 즉, 이전 죽도는 조선의 영토에 속해 있었지만 주민이 없는 무인도였기 때문에 에도막부가 요나고 주민에게 도해면허를 주었다는 것이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의 '쯔카모토다카시(塚本高史)'> 이것은 조선이 포기한 竹島(울릉도)를 일본정부에서 두 가문에게 독점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으므로, 도해면허를 발급한 자체는 일본이 죽도와 송도를 실효지배했다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는 주장이다.
나이토
세이추 교수 역시 쯔카모토 다카시의 의견을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나이토 세이추교수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도해면허를 발급할 당시 에도막부의 울릉도 인식)
1614년(광해군
6년) 6월 일본의 대마도주는 배 2척을 보내 조선의
동래부(東萊府)에 서계를 전했다. 이 서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의 분부로 의죽도(礒竹島)의 형지를
탐색하려 하는데 큰 바람을 만날까 두려우니 길
안내를 내어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에 조선조정(禮曺)에서는
이를 심히 불쾌하게 여겨 동래부사
윤수겸(尹守謙)※
으로 하여금 답서하여 꾸짖어 보낸 적이 있다.
대마도와 조선 사이에 같은 안건으로 서신을 주고 받은
적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어 그 이전부터 대마도는
울릉도를 끊임없이 넘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동국문헌비고, 강계고, 만기요람, 변례집요,
증보문헌비고 등의 울릉도조 기록)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을 살펴보자.(원문은
독도문서자료실)
여기에서의 조선조정과 교섭한 주체는 일본 막부가 아닌 대마도(쯔시마) 왜인이었다. 에도막부가
울릉도에 직접 연관된 기록은 이소다케 야자에몬(磯竹弥左衛門)의
기록부터이다. 이소다케 야자에몬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집권기에 울릉도로 건너가 벌목을 한 자이다. 1617년 당시 조선 통신사 종사관 이었던 이경직(李景稷)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이에 대해서 통항일람에서는 다음과 같이 잠상 두 명을 붙잡아 수도로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통항일람(通航一覽)
卷129
貿易(자료사진; 林휘 等編 國書刊行會, 1912~13, 국립중앙도서관) 죽도도해면허를 발급할 당시의 에도막부의 울릉도에 대한 인식이 가장 확실하게 드러나는 기록이 에도막부의 외교문서를 집성한 것으로 1853년 편찬된 일본의 대외교섭사료집(對外交涉史料集)인 통함일람 조선국 105 무역條이다.
한편, 죽도기사(竹島紀事)
元祿六年(1693년) 9月4日綱에는
다음과 같이 죽도(울릉도)를 두고 조선과의 교섭을 앞둔 시기에 소 요시자네는
에도막부가 죽도를 조선령으로 인식하고 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렇게 볼 때, 죽도도해면허를 발급할 당시 에도막부는
울릉도가 조선령임을 너무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측 기록에서 울릉도에 대한 가장 첫 기록은
귄기(權記)로써, 이미 1004년 당시 울릉도를 고려의 영토로
규정한 일본 관료의 기록이 등장하여 일본에서
역시 일찍부터 울릉도를 한국령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죽도도해면허를 신청한 1617년은,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1598)이 끝난지
불과 십 수년 후의 일로, 죽도도해면허의 신청이
있었을 당시, 일본 에도막부에서 울릉도가
조선령이었음을 모르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본 측의 견해는 아마도 이런 명백한 정황을 무마시키기 위해 옛날 울릉도(竹島)는 조선령이었으나, 무인도화 된 섬이므로 에도막부는 조선령이라는 인식 없이 도해면허를 발급했다는 논리를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에도막부의 죽도도해면허 발급은 사실상의 해적행위였다) 위 자료들에서 보이듯, 일본에서는 도해면허를 발급할때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도 울릉도가 조선령이었음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오야 ·무라카와 두 가문에서 도해면허를 신청했을 당시 에도막부가 왜 조선정부에 죽도에 대해 문의해 보지 않았느냐는 의문이 생긴다. 울릉도가 무인도화 되어있었음은 분명하나, 조선의 인식은 1614년 대마도의 행태에 대응한 태도에서 보이듯, 울릉도는 조선령으로 다시는 조선의 국경을 함부로 넘지 말라는 단호한 자세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땅히 조선에 문의를 하여, 조선정부의 의견을 구했어야 했지만, 그런 사실은 없었다. 이런 일본 막부의 죽도도해면허에 임해서의 태도는 조선정부 몰래 무인도화된 울릉도에서 얼마 간의 이익을 취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따른 것으로 풀이할 수 있으며, 남의 영토에서 주인 몰래 막대한 이익을 취한 도적질과 다름이 없었다고 보여진다. 현재 일본 측 주장은 이처럼 주인이 존재하는 땅을 현주인(現主人)이 이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의 소유로 만들겠다는 다소 왜구적 행태를 정당화하는 논리와 다름이 없다. 울릉도 공도정책은 이미 한국의 여러 학자들이 설명해 놓았듯, 이 또한 국가 통치권의 행사방식 중 하나로서 울릉도를 영유할 의사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관찬기록으로서 송도가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은주시청합기(1667)의 기록에서도 죽도와 송도를 조선령으로 기록하고 있다. 에도막부에서 죽도도해를 발급한 1625년으로부터 약 40년 후의 기록으로 에도막부의 분명한 인식을 드러내 주는 문헌이다. 자세한 내용은 이곳을 클릭 나이토 세이추 교수의 설명대로 에도막부가 죽도(울릉도)를 영유하고자 도해면허를 발급했다면, 은주시청합기의 기록은 설명할 수가 없게 된다. 1625년 당시에는 막부차원에서 죽도를 영유하기 위해 도해면허를 발급해 죽도 개발사업을 약 70년간 지속적으로 시행했는데, 1667년 시점에서 일본의 관찬기록에는 죽도뿐 아니라 송도까지도 조선령으로 기록한 것이 된다. 이렇듯 죽도도해면허를 발급할 당시뿐 아니라 전후의 에도막부의 인식이 죽도(울릉도)는 조선령이라는 분명한 증거가 있는 이상, 에도막부는 죽도가 조선령이었음을 알고 있었기에, 막부의 영역을 벗어날 때 일본의 선박에 발급했던 도해면허를 받게 하였다는 한국 측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수밖에 없다. 이와 아울러 에도막부의 당시 죽도에 대한 인식은 죽도도해면허의 독특한 성격에서도 찾을 수 있다.
(죽도도해면허의
성격) 당시 일본에서 외국으로 나갈때에는 두가지 종류의 서류중 한가지를 지참해야 했는데, 주인장(朱印狀)과 봉서(奉書)였다. 다른 나라로의 도해를 허가하는 주인장에는 수령자, 도해기간이 없고, 도항할 곳만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통례였으며, 도해가 끝난 후 반납하는 일회성의 서류였다. 이에 대해 봉서선제도의 봉서란 이국으로의 도해허가를 기록한 노중의 문서로 해외에 갈 때 휴대해야 했는데, 죽도도해면허처럼 수령자가 해외에 나가는 본인에게 발급이 되지 않고 돗토리번주 앞으로 발급된 것은 이례적인 일로써, 죽도도해면허는 주인장이나 봉서와는 그 성격이 조금씩 다른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죽도도해면허(竹島渡海免許)는 에도 막부시대의 정식 도해 허가서들과는 달리 유독 울릉도의 것만은 편지형태의 봉서형태로 되어 있다. 또한, 도해면허는 매년 신청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지만, 울릉도의 경우, 1회만으로 끝나고 있었다. 그 뒤는 각자 알아서 시행하라는 의미로 보이며, 이를 위해 도해면허 신청자인 두 가문은 죽도도해면허를 유지하기 위해 막부와의 관계를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도해면허를 발급받은 다음 해인 1626년부터 총 13회에 걸쳐 막부 장군을 알현하였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돗토리번이 죽도와 송도를 자신의 영지로 여기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1695년 12월 25일 자 曾我六郞兵衛의 노중 阿部豊後守의 질문에 대한 답서와 御勘定頭 松平의 물음에 대한 돗토리번의 1693년 5월 22일, 27일 아래 회답서) 이로보아 죽도도해면허는 일본 측 주장처럼 죽도와 송도를 자신(일본)의 영토로 개발할 목적으로 발급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에도막부가 자신의 영토로 개발할 목적이 있었다면, 돗토리번의 죽도와 송도가 자신의 지배지가 아니라는 발언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에도막부에 그런 의도가 있었다면, 죽도를 관할하게 될 돗토리번이 죽도도해 금지령이 내려지기 직전의 해인 1695년 당시까지 막부의 의향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도도해면허는 일본 측에서 죽도와 송도에 대한 실효지배를 운운할 자료는 되지 못한다. 실효지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국가의 의사이나, 일본 막부의 인식은 竹島가 외국령(조선령)이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죽도도해면허에 대해 돗토리번이 막부에 제출한 일부
답변서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안용복의 2차
일본행 이후 막부에 제출한 문서)
돗토리번은 죽도와 송도를 자신의 영지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으며, 두 가문의 죽도도해면허에 대해서 무지했음을 알 수 있다. 5월 22일자 서신에서는 봉서의 사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가 한 달 여가 지난 후 봉서의 사본이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한달 사이에 두 가문으로부터 죽도도해면허에 대한 전체적인 상황을 전해들은 것으로 보인다. 만일 에도막부에 죽도(울릉도)를 일본령으로 영위하고자하는 의도가 있었다면, 적어도 두 가문 사람들에게라도 이 사실을 전해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돗토리번은 너무도 명확하게 자신의 영지가 아님을 확언하고 있다. 돗토리번은 죽도도해면허가 에도막부로부터 두 가문에 내려진 이후 죽도도해어업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매년 쌀 천 섬씩을 대여해 주었고, 그 이외 강치기름의 판매권을 부여하였다. 또한 은화(丁銀) 1관 500돈을 그 경비로 제공해 주고 죽도에서 수확한 전복을 팔은 대금으로 청산하게 하였다. 이에 비해 돗토리번은 죽도도해면허에 대해서는 너무도 무지했음이 위 문서에 잘 드러나 있다. 따라서 죽도도해면허는 오오야·무라카와 두 가문의 어업적 이익만을 보장해 주는 도해면허임을 파악할 수 있다. 일본 측 주장대로 죽도를 영유화할 목적으로 발급된 것은 아니었다. 이 서신에서 또 하나 주목할 내용이 주인(朱印)이 없다는 문구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에도막부는 주인장과 흡사한 다소 애매한 성격의 도해면허를 발급한 것이다. 이에 대해 나이토 세이츄교수는 이미 1614년 조선정부에서 대마도 이외에는 일본에서 조선으로 가는 다른 문호를 열지 않겠다는 단호한 자세를 보였기 때문이라 설명하고 있다. 즉 주인장을 발급하게 되면, 죽도를 조선령으로 인정하는 것이 되어, 일본으로서는 조선으로 가는 길이 일본에서 대마도를 거쳐 부산으로 가는 한 길만 남게 되기 때문에 주인장을 발급할 수 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또한, 죽도행을 조선 측이 승인할 리도 없었기에 죽도 도해에 대한 주인장 대신 주인장과 유사한 성격의 도해면허를 발급했다고 한다. 결국은 조선이 잠시 공도정책으로 울릉도에 사람을 비워둔 사이 일본령으로 만들겠다는 의도에서 주인장 대신 도해면허를 발급했다는 설명이 된다. 그러나 이미 이야기했듯, 에도막부가 죽도도해면허를 발급할 때 죽도의 영유화를 그 목적으로 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죽도도해면허(竹島渡海免許)는 봉서와 주인(朱印)의 중간형태를 띠고 있으나, 봉서와 주인장 모두 해외로 갈 때의 허가증이라는 점에서 죽도를 외국령(조선령)으로 인식해 죽도도해면허를 발급했음은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도막부는 죽도가 조선령임을 뚜렷이 인식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의 반발에 대비해 주인을 변형시킨 도해면허를 발급했으며, 이는 명백히 타국의 영토를 침략하는 해적행위에 해당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죽도고증의
다음 기록을 살펴보자.
위에서
소개한 일본의 관찬기록인 은주시청합기(1667) 국대기(國代記) 4권 지부군효화산록기(知夫郡燒和山綠起)에
역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죽도도해면허를 주인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시기는 죽도도해면허를 받아 두 가문에서 죽도에 출어할 때의 기록으로 이 시기에 조차 죽도도해면허를 외국에 도해할 때 발급하던 주인장으로서 인식하고 있다. 죽도도해면허에서 한가지 더 주목할 것은 울릉도의 일본에서의 명칭이 도해면허를 발급할 당시 기죽도에서 죽도로 바뀐 사실이다. 일본은 그 이전 울릉도를 기죽도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런데, 도해면허를 발급하면서 죽도라는 명칭으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이 당시 일본에서의 울릉도에 대한 명칭이 등장하는 기록으로 이수광의 지봉유설, 변례집요의 기록이 있으며, 죽도 도해면허 이전의 일본 측 기록에서 역시 울릉도를 기죽도로 호칭하고 있었다. 이렇게 울릉도의 명칭이 기죽도(磯竹島, 礒竹島)에서 죽도(竹島)로 바뀐 것은 위에서 언급했듯, 조선 측의 눈을 속이기 위한 임기응변으로 보인다. 즉, 기죽도라는 이름으로 도해면허를 발급한다면, 조선에서 역시 기죽도가 울릉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반발할 것을 예상하고, 이전 중국 측 기록에 등장하는 죽도라는 명칭으로 바꿔 도해면허를 발급함으로써 조선의 시선을 피하고자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결어 이상 살펴본 것처럼 죽도도해면허를 발급할 당시 일본의 에도막부는 죽도(울릉도)가 조선령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죽도·송도도해면허를 발급한 에도막부의 행위는 남의 영토를 침략한 사실상의 해적행위에 불과했다. 도해면허 자체가 현재의 여권과 같은 증명서였다는 점에서도 에도막부가 죽도와 송도를 외국령(조선령)으로 인식했음은 너무도 뻔한 사실이다. 따라서 죽도도해면허는 죽도와 송도에 대한 역사적 권원이 한국에 있음을 증명해 주는 자료가 된다. 최근 일본에서는 에도막부가 죽도도해면허를 발급할 당시 죽도가 무인도화 되었으므로 조선령이라는 인식없이 죽도의 영유화를 목적으로 도해면허를 발급했다고 하는 새로운 논리를 구성해 죽도경영사업을 시행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일본이 에도막부의 공인하에 죽도를 실효지배했다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죽도도해면허 전후의 일본 관찬기록에 죽도(울릉도)가 조선령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죽도도해면허 자체가 외국으로의 도해를 허가했던 증명서라는 점과 돗토리번이 죽도를 자신의 관할지로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그 근거가 희박한 주장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죽도도해면허는 일본의 일반인이 울릉도에 갈 수 있는 면허가 아닌 돗토리번의 오오야(大谷) 무라카와(村川) 두 가문에 한정한 도해면허였다. 당시의 일본 측 기록을 보면 죽도도해면허가 내려질 당시인 1625년에 다른 일본인 또한 울릉도에 도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죽도도해면허는 오오야, 무라카와 두 가문에게 독점적으로 울릉도에 도해할 수 있는 권리를 준 것에 불과하며, 일본측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에도막부가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령이라고 인정한 것은 아니다. 거꾸로 도해면허를 발급함으로써 죽도가 외국령인 조선령이었음을 인정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것이다. 송도는 죽도의 부속 섬으로서 죽도1건의 결과, 죽도도해금지령을 내렸다면, 마땅히 송도도해금지령까지 포함되었음은 자명하다고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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