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도도해면허(竹島渡海免許)

 


죽도도해면허

 일본정부에서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근거 중 하나가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가 오오야 신키찌(大谷甚吉)와 무라카와 이치베에(村川市兵衛)의 신청에 의해 두 가문에게 1625년에 내준 죽도도해면허(竹島渡海免許)다. 이후 일본은 1625년부터 약 70여 년간 죽도(울릉도)와 독도(松島)를 영유 또는 실효적 점유를 했다 주장하고 있다.

사실 송도도해면허는 따로 발급되지 않았다. 1657년 처음으로 무라카와(村川)家가 松島에 도해하고 난 이후 松島에 대해 거론한 기록이 있으나 여기에 '죽도도해면허'와 같은 문서의 존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1666년 오야家의 배가 조선에 표착했을 때 역시 '죽도도해면허'는 발견되었지만 '송도도해면허'는 발견되지 않았다. 송도도해면허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池內敏의 '竹島渡海と島取藩'島取地域史硏究 제1호, 1999) 이처럼 송도도해면허가 따로 발급이 되지 않은 이유는 죽도도해면허 안에 송도가 포함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독도를 울릉도의 속도로 본 일본의 인식에 말미암은 것이다.

 임진 왜란(1592∼98년) 전후에 울릉도는 일본군(왜구)에게 노략질을 당하여 폐허가 되어 버렸다. 그러자 조선 조정은 울릉도 공도쇄환(空島刷還) 정책, 즉 울릉도를 비워두고, 울릉도에 들어간 백성들을 육지로 돌아오게 하는 정책을 강화하였다. 이 직후 일본 호키슈(白耆州)의 요나고(米子·현재 돗토리현 서부)에서 해상운송중개업을 운영하고 있던 오오야 신키찌(大谷甚吉)라는 사람이 에찌고(越後)를 다녀오다가 태풍을 만나 조난하여 울릉도에 표류해 닿았다. 오오야 신키찌가 울릉도(죽도)를 답사해 보니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무인도지만 수산 자원이 풍부한 보배로운 섬임을 알았다.

 오오야 신키찌는 이 섬 울릉도에 건너가서 고기잡이를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울릉도는 당시 사람이 살지 않는다 할지라도 조선 영토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울릉도(죽도)에 건너가서 고기잡이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막부(幕府)의 허가가 반드시 필요하였다. 울릉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 외국(外國)의 영토이므로 국경을 넘어 외국으로 건너가 고기잡이를 해도 월경죄로 처벌받지 않으려면 막부의 공식 허가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에 오오야 신키찌는 도쿠가와 막부의 관리들과 친분이 두터운 무라카와 이치베이에(村川市兵衛)와 함께 요나고에 와 있던
아베 시로우고로우(阿倍四郞五郞)의 중개로 1617년에 죽도도해면허(竹島渡海免許)를 신청하여 죽도도해의 허가를 받으려 했다. 그 결과 도쿠가와 막부는 막부의 관리로 당시 돗토리번주(島取蕃主) 마쯔다이라 신타로우(松平新太郞; 池田光政)를 통해 1625년에 '오오야'와 '무라카와' 두 가문에 죽도도해면허를 내주었다.

 두 사람에게 죽도도해면허를 허가한다는 취지를 돗토리번주 마쯔다이라 신타로우(松平新太郞)에게 전한 '돗토리번사(島取蕃史 제6권 事變志一 466항)'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元和三年甚吉越後より歸帆の時漂流して竹島に至る。 時に幕臣阿倍四郞五郞正之檢使として米子に在り、 甚吉卽ち村川市兵衛と共に竹島渡海の許可を周旋せむ事を願ふ。四年兩人江戶へ下り、安部氏の紹介に因つて請願の事幕府の議に上り、五月十六日渡海の免狀を下附せらる。之を竹島渡海の濫觴とす。渡海免許の狀在の如し。

從伯耆國米子竹島江先年舟相渡之由候、然者如其今度致渡海度之段、米子町人村川市兵衛大屋甚吉申上付て、達上聞候之處、不可有異議之旨被仰出候間、被得其意、渡海之儀可被仰付候恐謹言

五月十六日

永井信濃守 尙政 判
井上主計頭 正就 判
上井大
頭 利勝 判
酒井雅樂頭 忠世 判

松平新太郞殿

겐나 3년(1617) 신키찌는 에찌고( 越後) 에서 귀범할 때 표류하여 죽도에 이르렀다. 그 당시 막부의 신하 아베시로우고로우마사유키가 검사로 요나고에 있었다. 신키찌는 바로 무라카와이찌베에와 함께 죽도 도해허가를 알선해 줄 것을 부탁했다. 겐나 4년(1618)에 두 사람은 에도에 가서 아베씨의 소개로 청원의 건이 막부의 의제가 되어 5월 16일에 도해면허장을 받았다. 이것을 죽도 도해의 시작으로 한다. 도해면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호우키국의 요나고에서 죽도로 몇 년 전인가 배로 건넜다 한다. 그러므로 이번에도 그처럼 도해하고 싶다는 건, 요나고의 주민 무라카와 이찌베에와 오오야신키찌의 신청에 대하여, 장군에게 말씀드렸던 바, 이의가 있을 수 없다는 뜻, 분부하신 것을 듣고, 그에게 그 뜻을 이루게 하여 도해의 건, 분부하여 주셨습니다. 감히 삼가 아룁니다.
 5월 16일

                       나가이시나노노카미 나오마사 판
이노우에카즈에노카미 마사나리 판
 도이오오이노카미 토시카쯔 판
사카이우타노카미 타다요 판

마쯔다이라 신타로우 (松平新太郞)
자료출처 ; '獨島와 竹島 (나이토 세이추 著 ;권오엽 ;권정 譯, 2005, 제이앤씨 )' p59~60

  (죽도도해면허를 발급한 시기)

 종전까지 이 시기가 1617년 도해면허 신청 바로 다음해인 1618년에 도해면허가 발급된 것으로 알아 왔으나, 이케우치사토시 교수에 의해 1625년이 확실한 죽도도해면허 발급시기인 것으로 수정되었으며, 한일 학자 모두에서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즉 위 죽도도해면허에 서명한 4명의 노중 중에서 도이와 사카이가 노중(老中, 로우주우 ; 막부의 최고위직으로 정무전반을 총괄함)으로 취임한 것은 1622년부터였다. 1618년 당시 이들은 코쇼구미반카시라(小姓組番頭)라는 직책에 있었으므로, 마땅히 죽도도해면허가 발급된 해는 1622년 이후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또한 오오야가의 문서에는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의 시기에 죽도면허를 발급받았다고 하는데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가 장군에 즉위한 해는 1623년이었다.

나고야 대학 '이케우치사토시(池內敏)'교수는 대마도 종가의 사료에서의 1625년이 그 정확한 발급연도를 고증함으로써 한일 양국 모두에서 죽도도해발급시기를 종전 1618년에서 1625년으로 수정하고 있다.

 위 죽도 도해면허를 두고 한일 간 가장 큰 입장차를 보이고 있는 부분이 과연 당시의 에도막부가 죽도인 울릉도가 조선령임을 알고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는지에 대한 판단이 엇갈리고 있으며, 죽도도해면허의 성격을 두고도 서로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죽도도해면허에 대한 일본측 주장)

 일본에서는 이 도해면허에 대해 에도막부의 공인하에 이루어진 점을 특별히 강조하여 당시의 죽도도해 사업을 정당화하고 있다.(일본 외무성의 가와카미 겐조)  최근 이러한 주장과 아울러, "1625년 시점에서 죽도가 조선령이라는 인식이 없이 요나고(米子)의 두 가문에게 독점적 개발권을 주었다"는 주장이 나와 가와카미 겐조의 의견을 뒷받침하고 있다. 즉, 이전 죽도는 조선의 영토에 속해 있었지만 주민이 없는 무인도였기 때문에 에도막부가 요나고 주민에게 도해면허를 주었다는 것이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의 '쯔카모토다카시(塚本高史)'>  이것은 조선이 포기한 竹島(울릉도)를 일본정부에서 두 가문에게 독점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으므로, 도해면허를 발급한 자체는 일본이 죽도와 송도를 실효지배했다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는 주장이다.

 나이토 세이추 교수 역시 쯔카모토 다카시의 의견을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나이토 세이추교수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막부에서는 다케시마가 조선령 이소다케시마(磯竹島)이지만 공도정책에 의해 무인도가 되어 있고, 물산이 풍부한 섬이기에 쯔시마번이 전부터 영유화를 획책하고 있는 섬이라는 사실 등을 충분히 알고
쯔시마번을 대신해 돗토리번에게 영유화의 기성사실을 만들게 한다는 의미를 담아 신청해 온 요나고 주민 2명에게 다케시마 도해면허라는 특별허가를 내준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獨島와 竹島, 나이토 세이추 著, 58쪽)

(도해면허를 발급할 당시 에도막부의 울릉도 인식)

 1614년(광해군 6년) 6월 일본의 대마도주는 배 2척을 보내 조선의 동래부(東萊府)에 서계를 전했다. 이 서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의 분부로 의죽도(礒竹島)의 형지를 탐색하려 하는데 큰 바람을 만날까 두려우니 길 안내를 내어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에 조선조정(禮曺)에서는 이를 심히 불쾌하게 여겨 동래부사 윤수겸(尹守謙) 으로 하여금 답서하여 꾸짖어 보낸 적이 있다. 대마도와 조선 사이에 같은 안건으로 서신을 주고 받은 적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어 그 이전부터 대마도는 울릉도를 끊임없이 넘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동국문헌비고, 강계고, 만기요람, 변례집요, 증보문헌비고 등의 울릉도조 기록)

변례집요(禮曺 典客司, 헌종대 편찬으로 추정)와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1802, 金健瑞)'를 제외한 다른 기록에서는 동래부사 박경업(朴慶業)으로 나와 있다. 조선통교대기(朝鮮通交大紀 1725, 松浦允任)에는 1614년 7월 2일자 윤수겸(尹守謙)의 답서가 소개되고 있으며, 죽도고(竹島考)에 동래부사 윤수겸과 박경업 두 사람의 답서가 부기되어 있다. 1614년 7월중에 동래부사가 윤수겸에서 박경업으로 교체되어 윤수겸과 박경업 두 사람이 각각 왜에 답서한 것이다. 윤수겸의 답서내용은 이곳을 클릭  박경업의 답서는 아래 증보문헌비고의 기록 중에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을 살펴보자.(원문은 독도문서자료실)
 

광해군(光海君)6년(1614)에 왜가 배 2척을 보내어 이르기를, "장차 의죽도(礒竹島)의 형지(形止)를 탐색하려 한다"하고, 또 말하기를, "이 섬은 경상도와 강원도의 사이에 있다"고 하였다. 조정에서는 그들의 외람되고 주제넘은 것을 미워하여 접대하기를 허락하지 않고, 단지 동래부사(東萊府使) 박경업(朴慶業)으로 하여금 답서(答書)하게 하였는데, 이르기를,
"족하(足下)가 이 섬을 함부로 점거함이 불법인 줄 알면서도 참람(僭濫)하게 남의 땅을 엿보니, 이게 진실로 무슨 심사입니까? 이웃 나라의 우호(友好)하는 도리가 아닌가 합니다.
 이른 바 의죽도(礒竹島)란 것은 실로 우리나라의 울릉도로서, 경상도와 강원도의 바다(海洋)에 끼여 있음이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실려 있는데,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대저 신라와 고려 이래로 방물(方物)을 받아 왔으며, 아조(我朝)에 이르러서도 여러 번 도망간 백성을 쇄출(刷出)하여 왔습니다. 지금 비록 폐기(廢棄)하였을망정 어찌 타국 사람이 함부로 들어가 사는 것을 용납하겠습니까?
전일에 보낸 복서(復書, 회답서, 지금 전일의 복서(復書)라는 말을 가지고 본다면, 전에도 벌써 왕복한 사실이 있었던 것이다) 로 이미 대강을 알았을 것이니, 귀도(貴島)에서는 마땅히 두려워하여 도모하던 마음을 고쳐야 할 터인데, 이제 바로 닻줄을 풀어 배를 출발시키겠다고 말하니, 우리 조정을 업신여기고 도리에 어두운 것은 아닙니까?
 
귀도에서 우리나라에 왕래하며 지나다니는 곳은 오직 한 길만이 있으니, 이는 문호(門戶)와 같은 것입니다. 그 밖에는 표류한 배라도 말할 것 없이 모두 적선(賊船)으로 논단(論斷)할 것입니다. 우리 진(鎭)의 연해 장관(將官)들은 오직 약속을 엄수하는 것만 알 뿐이고, 그 밖의 다른 것은 모릅니다. 다만 귀도에서는 영토의 구획(區劃)에 분별이 있음을 살피고, 경계의 한계선은 침범하기 어렵다는 점을 알아서 각별히 신의를 지키도록 스스로 노력하고 힘쓰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면한다면 오히려 유종(有終)의 미(美)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여기에서의 조선조정과 교섭한 주체는 일본 막부가 아닌 대마도(쯔시마) 왜인이었다.

 에도막부가 울릉도에 직접 연관된 기록은 이소다케 야자에몬(磯竹左衛門)의 기록부터이다. 이소다케 야자에몬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집권기에 울릉도로 건너가 벌목을 한 자이다.

 그런데 이 일은 1617년 통신사 종사관으로 일본을 방문한 이경직(李景稷)이 도이오오이노카미(上
井大頭)와 만난 자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시기에 이소다케 야자에몬(磯竹弥左衛門)이라는 사람이 울릉도에 건너와 재목 등을 가지고 돌아왔다고 막부 측에 항의하였다. 이에 조선과의 국교 회복이 중요했던 에도막부는 쯔시마번에 명령하여 이에 대해 조사하게 하였고, 1620년 울릉도에 잠입한 쯔시마번의 밀무역상 야우에몬(弥左衛門), 진우에몬(仁右衛門) 두 사람을 잡아서 처분하였다. 여기서의 도이오오이노카미(上井大頭)는 죽도도해면허에 서명한 노중 4명 중 한 사람으로써 도해면허 발급 당시 에도막부는 竹島를 조선령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1617년 당시 조선 통신사 종사관 이었던 이경직(李景稷)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아주 옛날 히데요시때에 왜인 한명이 있었다. 스스로 磯竹島에 들어갈 것을 자원해서 재목(材木) 및 노위 등을 벌채해 가지고 돌아오고, 또 대와 같은 것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크게 기뻐하여, 그래서 이름을 이소다케 야자에몬(磯竹弥左衛門)이라고 불렀다. 즉시 야자에몬에게 명하여 생활의 밑천으로 하게 하여, 세입을 정하게 하였다. 히데요시의 사후에 야자에몬도 계속해서 사망하여 지금에 와서는 섬에 왕래하는 사람도 없어졌다고 한다. 이것을 들은 이에야쓰(家康)가 듣고, 우선 현재의 상황을 소상히 조사해 올 것을 명하였다. (內藤正中, 竹島(鬱陵島)をめぐる朝關係史,2001. 34~35쪽)

이에 대해서 통항일람에서는 다음과 같이 잠상 두 명을 붙잡아 수도로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통항일람(通航一覽) 卷129 貿易(자료사진; 林휘 等編 國書刊行會, 1912~13, 국립중앙도서관)
통항일람 권 137 조선국부 113 죽도 부당도 제주, 고죽도일건사고(告竹島一件事考)는 곧 독도문서자료실에 전문 수록 예정임

죽도도해면허를 발급할 당시의 에도막부의 울릉도에 대한 인식이 가장 확실하게 드러나는 기록이 에도막부의 외교문서를 집성한 것으로 1853년 편찬된 일본의 대외교섭사료집(對外交涉史料集)인 통함일람 조선국 105 무역條이다.


통항일람 조선국부(朝鮮國部) 105 무역條에는 1620년(元和 6년) 일본 에도막부가 죽도에 몰래 들어간 대마도의 잠상 2명을 붙잡아 대마도주 소 요시나리(宗義成)에게 명해 '京師(수도)'로 보내도록 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元和六庚申年、宗對馬守義成、命によりて、竹島(朝鮮國屬島)に於て潜商のもの二人を 捕へて京師に送る(その罪科いま所見なし)、

특히 竹島를 조선국의 속도(竹島 朝鮮國屬島)라고 기록하고 있어 당시 에도막부(江戶幕府)의 울릉도에 대한 인식을 분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전문번역은 이곳을 클릭

 한편, 죽도기사(竹島紀事) 元祿六年(1693년) 9月4日綱에는 다음과 같이 죽도(울릉도)를 두고 조선과의 교섭을 앞둔 시기에 소 요시자네는 에도막부가 죽도를 조선령으로 인식하고 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기사가 나온다.
 
쯔시마의 소 요시자네(宗義眞)는 전에 죽도에 거주한 이소다케 야자에몬(磯竹弥左衛門)의 체포를 쯔시마에 명한 것을 예로 들어, 막부가 죽도를 조선령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을 이야기했다. 막부가 죽도를 톳토리 소속으로 생각했다면 그 체포를 톳토리번에 명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막부에 재확인하고 조선과의 교섭에 들어가야 될 것이라는 의견을 냈다.

此時天龍院公、御近所役加納幸之助を以て被仰出候ハ、竹嶋之儀磯竹嶋とも申、先年大猷大君御大彼嶋江磯竹左衛門仁左衛門と申者居住いたし居候を召捕差出候樣ニと光雲院公[宗義成ー池內敏注]江彼仰付、則此方より彼召捕彼差出たる事在之候、然者竹嶋之儀日本伯之內之嶋と公儀ニ彼思召候ハ伯之太守より左衛門、仁左衛門召捕彼差出候樣ニ可彼仰付之所、御國江彼仰渡候ハ、朝鮮之竹島と彼思召上たる事と相見候間、右之次第一應公儀江御伺相被成、思召之程得と御聞被成候上朝鮮江可被仰懸哉と之御事ニ候所、此時之衆議、公命を以朝鮮江被仰達候ハ、違難ニ及申間敷との事ニ而、押而參判使を以て被仰遣候由なり

이때 텐류인공(天龍院, 終義眞)이 자신을 가까이서 모시는 가노 유키노스케를 보내어 말씀하시길, 죽도는 磯竹嶋라고도 하며, 예전에 다이유대군(德川家光)시대에 그 섬에 이소타케 야자에몬 및 진자에몬이라는 자가 거주하고 있던 것을 잡아 오도록 光雲院公(고운인공, 宗義成)에게 명령하셔서 즉시 우리가 잡아 보내드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죽도를 일본 호키내의 섬이라고 생각하셨다면 막부에서 호키의 태수에게 야자에몬과 진자에몬을 잡아 올리도록 명령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죽도를 조선의 섬이라고 생각하셨던 것처럼 보이니, 위의 건에 대해 일단 막부에 물어보고 장군님의 생각을 잘 들은 후에 조선에 말을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하셨다. 이때의 회의에서 공적인 명령으로서 조선과 교섭하면 어려운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말했으므로 참판사를 보내기로 했다는 것이다.
(독도논문번역자료선 90쪽, 이케우치 사토시 교수의 논문에서 인용, 괄호 안은 인용자의 주기임)

이렇게 볼 때, 죽도도해면허를 발급할 당시 에도막부는 울릉도가 조선령임을 너무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죽도도해면허 전후의 일본에서의 죽도에 대한 인식)

 일본 측 기록에서 울릉도에 대한 가장 첫 기록은 귄기(權記)로써, 이미 1004년 당시 울릉도를 고려의 영토로 규정한 일본 관료의 기록이 등장하여 일본에서 역시 일찍부터 울릉도를 한국령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權記』 1004年 (寬弘元年)條.

《大日本史》(卷 234) 列傳 5, 高麗. “寬弘元年 高麗藩徒芋陵島人 漂至因幡(權記, 高麗藩徒據本朝麗藻 芋陵據東國通鑑. 本書芋陵爲于陵 麗藻迂陵今訂之. 公任集云 新羅宇流麻島人至. 宇流麻島卽芋陵島也) 給資糧 回歸本國(本朝麗藻)”

《大日本史》 第2篇의 5, 寬弘元年 3月 7日條. “(權記) 七日辛卯 參內左大臣就陣給申所宛之 被定……因幡國言上 于陵島人十一人等事 定文在別”;(本朝麗藻)下 餞送部. “高麗藩徒之中 有新羅國迂陵島人”

「寬弘 원년(1004년) 高麗의 藩徒인 芋陵島 사람들이 因幡에 표류하여 도착하였다. (『權記』, 高麗의 藩徒라 한 것은 『本朝麗藻』에 의거하였고, 芋陵이라 한 것은 『東國通鑑』에 의거하였다. 본서는 芋陵을 于陵으로 한다. 『麗藻』에는 迂陵이라 되어 있는데 이제 이를 바로 잡는다. 『公任集』에 이르기를 新羅의 宇流麻島 사람들이 이르렀다. 宇流麻島는 곧 芋陵島이다.) 양식을 주고 본국에 돌려 보내었다. (『本朝麗藻』).」

「『權記』(寬弘원년 3月) 7일 辛卯. ..... 因幡國에서 아뢰기를 于陵島 사람들 11인 등의 일은 문서로 만들어 별도로 보고한다고 하였다. (『本朝麗藻』). 하권 餞送部에는 高麗의 藩徒 가운데 新羅國의 迂陵島 사람들이 있다고 하였다.」

(자료; 독도학회 제공  제4부 獨島領有에 관한 日本側 자료(Ⅰ) 제10장. 德川幕府 시대 이전의 資料 탐구에서 )

여기에 죽도도해면허를 신청한 1617년은,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1598)이 끝난지 불과 십 수년 후의 일로, 죽도도해면허의 신청이 있었을 당시, 일본 에도막부에서 울릉도가 조선령이었음을 모르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조선국지리도(1592년. 1872년 재모사 / 50 x 36cm)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구끼등이 제작한 지도. 팔도총도와 강원도별도에 울릉도와 우산도(于山島-독도)를 표기. 현재 발견된 일본지도 중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식 명칭으로 표기한 최초의 지도이며, 대마도를 우리의 영토로 표시한 최초의 지도이기도 하다. (글, 사진; 독도본부)

 일본 측의 견해는 아마도 이런 명백한 정황을 무마시키기 위해 옛날 울릉도(竹島)는 조선령이었으나, 무인도화 된 섬이므로 에도막부는 조선령이라는 인식 없이 도해면허를 발급했다는 논리를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에도막부의 죽도도해면허 발급은 사실상의 해적행위였다)

 위 자료들에서 보이듯, 일본에서는 도해면허를 발급할때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도 울릉도가 조선령이었음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오야 ·무라카와 두 가문에서 도해면허를 신청했을 당시 에도막부가 왜 조선정부에 죽도에 대해 문의해 보지 않았느냐는 의문이 생긴다. 울릉도가 무인도화 되어있었음은 분명하나, 조선의 인식은 1614년 대마도의 행태에 대응한 태도에서 보이듯, 울릉도는 조선령으로 다시는 조선의 국경을 함부로 넘지 말라는 단호한 자세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땅히 조선에 문의를 하여, 조선정부의 의견을 구했어야 했지만, 그런 사실은 없었다.

 이런 일본 막부의 죽도도해면허에 임해서의 태도는 조선정부 몰래 무인도화된 울릉도에서 얼마 간의 이익을 취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따른 것으로 풀이할 수 있으며, 남의 영토에서 주인 몰래 막대한 이익을 취한 도적질과 다름이 없었다고 보여진다. 현재 일본 측 주장은 이처럼 주인이 존재하는 땅을 현주인(現主人)이 이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의 소유로 만들겠다는 다소 왜구적 행태를 정당화하는 논리와 다름이 없다. 울릉도 공도정책은 이미 한국의 여러 학자들이 설명해 놓았듯, 이 또한 국가 통치권의 행사방식 중 하나로서 울릉도를 영유할 의사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관찬기록으로서 송도가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은주시청합기(1667)의 기록에서도 죽도와 송도를 조선령으로 기록하고 있다. 에도막부에서 죽도도해를 발급한 1625년으로부터 약 40년 후의 기록으로 에도막부의 분명한 인식을 드러내 주는 문헌이다. 자세한 내용은 이곳을 클릭

 나이토 세이추 교수의 설명대로 에도막부가 죽도(울릉도)를 영유하고자 도해면허를 발급했다면, 은주시청합기의 기록은 설명할 수가 없게 된다. 1625년 당시에는 막부차원에서 죽도를 영유하기 위해 도해면허를 발급해 죽도 개발사업을 약 70년간 지속적으로 시행했는데, 1667년 시점에서 일본의 관찬기록에는 죽도뿐 아니라 송도까지도 조선령으로 기록한 것이 된다.

 이렇듯 죽도도해면허를 발급할 당시뿐 아니라 전후의 에도막부의 인식이 죽도(울릉도)는 조선령이라는 분명한 증거가 있는 이상, 에도막부는 죽도가 조선령이었음을 알고 있었기에, 막부의 영역을 벗어날 때 일본의 선박에 발급했던 도해면허를 받게 하였다는 한국 측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수밖에 없다.

 이와 아울러 에도막부의 당시 죽도에 대한 인식은 죽도도해면허의 독특한 성격에서도 찾을 수 있다.

(죽도도해면허의 성격)

 당시 일본에서 외국으로 나갈때에는 두가지 종류의 서류중 한가지를 지참해야 했는데, 주인장(朱印狀)과 봉서(奉書)였다. 다른 나라로의 도해를 허가하는 주인장에는 수령자, 도해기간이 없고, 도항할 곳만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통례였으며, 도해가 끝난 후 반납하는 일회성의 서류였다. 이에 대해 봉서선제도의 봉서란 이국으로의 도해허가를 기록한 노중의 문서로 해외에 갈 때 휴대해야 했는데, 죽도도해면허처럼 수령자가 해외에 나가는 본인에게 발급이 되지 않고 돗토리번주 앞으로 발급된 것은 이례적인 일로써, 죽도도해면허는 주인장이나 봉서와는 그 성격이 조금씩 다른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죽도도해면허(竹島渡海免許)는 에도 막부시대의 정식 도해 허가서들과는 달리 유독 울릉도의 것만은 편지형태의 봉서형태로 되어 있다. 또한, 도해면허는 매년 신청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지만, 울릉도의 경우, 1회만으로 끝나고 있었다. 그 뒤는 각자 알아서 시행하라는 의미로 보이며, 이를 위해 도해면허 신청자인 두 가문은 죽도도해면허를 유지하기 위해 막부와의 관계를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도해면허를 발급받은 다음 해인 1626년부터 총 13회에 걸쳐 막부 장군을 알현하였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돗토리번이 죽도와 송도를 자신의 영지로 여기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1695년 12월 25일 자 曾我六郞兵衛의 노중 阿部豊後守의 질문에 대한 답서御勘定頭 松平의 물음에 대한 돗토리번의 1693년 5월 22일, 27일 아래 회답서) 이로보아 죽도도해면허는 일본 측 주장처럼 죽도와 송도를 자신(일본)의 영토로 개발할 목적으로 발급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에도막부가 자신의 영토로 개발할 목적이 있었다면, 돗토리번의 죽도와 송도가 자신의 지배지가 아니라는 발언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에도막부에 그런 의도가 있었다면, 죽도를 관할하게 될 돗토리번이 죽도도해 금지령이 내려지기 직전의 해인 1695년 당시까지 막부의 의향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도도해면허는 일본 측에서 죽도와 송도에 대한 실효지배를 운운할 자료는 되지 못한다. 실효지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국가의 의사이나, 일본 막부의 인식은 竹島가 외국령(조선령)이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죽도도해면허에 대해 돗토리번이 막부에 제출한 일부 답변서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안용복의 2차 일본행 이후 막부에 제출한 문서)
 

元綠六年五月卄二日御勘定頭松平美濃守殿え差出候書付寫

一 、 伯耆國米子より竹嶋え海上凡百六十里程有之由候例年米子出船雲え參隱岐國え到渡海候て竹嶋え渡申候米子より直竹嶋え渡候儀成申候
、村川市兵衛大屋九右衛門御當地え罷越 御目見被 仰附候節竹嶋鰒獻上仕候
、竹嶋ニて鰒取候運上は無之候伯耆守獻上の鰒も右兩人の町人共手前より相調差上申候
、竹嶋ニて海 驢取候て彼地 ニて 油仕取歸候て商賣仕候尤油の運上も無御座候
一、
竹嶋ははなれ嶋ニて人住居は不 仕候尤 伯耆守支配所ニても無之候 右の通ニて御座候
、竹嶋渡海の儀委細爰許ニて相之不申候
、竹嶋渡海付 御朱印は無之樣覺申候倂相尋從是可申上候幷御奉書の寫も元爰ニ無之候
、竹嶋え渡海の船ニ御紋の船印相立候儀元爰ニて相知不申候
、村川市兵衛大屋九右衛門御當地え罷何候儀何ケ年一度充罷越厚裁畿段爰元ニて 相地不申候
右の通國元え申遣追て可申上候以
五月
二日


  원록 6년 5월 22일 御勘定頭 松平에게 제출한 문서의 사본

、伯耆國 米子로부터 竹嶋에 뱃길로 160리 정도 된다고 하며, 예년과 같이 米子를 출선하여 出雲에 갔다가 隱岐國에 이르러 바다를 건너 竹嶋에 갔습니다. 米子에서 직접 竹嶋로 갈 수는 없습니다.
、村川 및 大屋이 江戶에 와 막부의 장군을 뵙고 분부하신 바대로 竹嶋의 전복을 헌상하였습니다.
、죽도로부터 직접 전복을 잡아 운반하여 상납한 일은 없으며, 伯耆守가 헌상한 전복도 위의 두 상인으로부터 조달한 것을 바친 것입니다.
、죽도에서 海 를 잡아 그 섬에서 기름을 만들어 돌아와 장사를 한다고 했지만 기름을 운반하고 헌상하는 일은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죽도는 이도(離島)로서 사람이 살 수 없으며, 단 伯耆守가 지배하는 곳이 아닙니다. 위와 같습니다.
、죽도로 도해의 일
자세한 사정을 몰라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죽도로의 도해에 대한 朱印은 없는 것으로 말씀드리고 이에 따라 심문하여 이를 허가하도록 말씀드리며, 또한 봉서의 사본도 없습니다.
죽도에 도해하는 배에 紋章의 표시를 세우고 있는 일도 모르는 바임을 말씀드립니다.
村川, 大屋이 강호에 가는 일은 몇 개년에 한 번 가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며, 그 점에 대하여 확실히 안다고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위와 같이 伯耆藩에 통보하는 것이 좋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상

5월 22일

※1693년 6월25일

同年六月 七日 松平美濃守殿え差出候書付の寫

伯耆國米者程人村川市兵衛大屋九右衛門竹嶋え渡海始候儀元和四年阿 倍四郞五郞殿御取持を以 渡海罷遊御免棄節より右貳人 御目見被  仰村候事
右嶋え渡海付御朱印は無御座候 松平新太郞伯耆國領知の節渡海の儀付被成御奉書候則寫懸御目候
、右嶋え渡海船ニ御紋の舟印御免被遊相立候儀不分明候え共右貳人先祖より至爾今相立申候先年竹嶋え渡海の船朝鮮國え流着候節 御紋の舟印立候付日本舟と見志申對馬國え送越彌子え罷歸候由於座候
、右町人御當地え罷下侯儀四五年壹度充壹人替替罷越候其節は寺社御奉行衆え御案內申 御目見の儀奉願 御牧見被 仰附以後時服拜領仕由   以上


동년 6월 27일 松平에게 제출한 문서의 사본

비망록

伯耆國 米子의 상인 村川과 大屋이 竹嶋에 도해를 시작한 일에 대하여 元和 4년 倍四郞五郞의 주선으로 도해할 수 있는 공인이 된 그때부터 위의 두 사람이 막부의 장군을 뵈올 때 하명하신 일

一、위의 섬에 도해에 관하여
一、
朱印이 없습니다. 松平이 伯耆國을 영유하여 지배할 때 도해의 일에 관하여 봉서가 만들어져 곧 사본을 보셨습니다.
、위의 섬에 도해하는 배에 단 紋章의 표시가 공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의 입장이 불투명하기에 위 두 사람의 조상으로부터 지금까지의 서로의 입장을 말했습니다.
몇 해전에 죽도로 도해한 배가 조선국에 표착하였을 때 伯州의 藩主 松平가의 문장을 배의 표시로 세우고 있었더니 일본 배로 알아차리고 對馬國으로 송환하여 米子로 돌아오게 된 바 있습니다.
、위 상인이 江戶에 오는 바 4,5년에 한 번씩 교대로 왔습니다. 그때는 寺社御奉行 휘하의 관리 즉 무사가 안내하였습니다. 장군을 뵐 것을 원하여 뵙게 되었고 장군이 하명을 하신 후 철에 맞는 옷을 拜領하였습니다.
※1693년 7월 29일

이상 독도자료총람 (김병렬著 1997, 다다미디어) p288~293

  돗토리번은 죽도와 송도를 자신의 영지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으며, 두 가문의 죽도도해면허에 대해서 무지했음을 알 수 있다. 5월 22일자 서신에서는 봉서의 사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가 한 달 여가 지난 후 봉서의 사본이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한달 사이에 두 가문으로부터 죽도도해면허에 대한 전체적인 상황을 전해들은 것으로 보인다. 만일 에도막부에 죽도(울릉도)를 일본령으로 영위하고자하는 의도가 있었다면, 적어도 두 가문 사람들에게라도 이 사실을 전해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돗토리번은 너무도 명확하게 자신의 영지가 아님을 확언하고 있다.

 돗토리번은 죽도도해면허가 에도막부로부터 두 가문에 내려진 이후  죽도도해어업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매년 쌀 천 섬씩을 대여해 주었고, 그 이외 강치기름의 판매권을 부여하였다. 또한 은화(丁銀) 1관 500돈을 그 경비로 제공해 주고 죽도에서 수확한 전복을 팔은 대금으로 청산하게 하였다. 이에 비해 돗토리번은 죽도도해면허에 대해서는 너무도 무지했음이 위 문서에 잘 드러나 있다. 따라서 죽도도해면허는 오오야·무라카와 두 가문의 어업적 이익만을 보장해 주는 도해면허임을 파악할 수 있다. 일본 측 주장대로 죽도를 영유화할 목적으로 발급된 것은 아니었다.

 이 서신에서 또 하나 주목할 내용이 주인(朱印)이 없다는 문구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에도막부는 주인장과 흡사한 다소 애매한 성격의 도해면허를 발급한 것이다.

 이에 대해 나이토 세이츄교수는 이미 1614년 조선정부에서 대마도 이외에는 일본에서 조선으로 가는 다른 문호를 열지 않겠다는 단호한 자세를 보였기 때문이라 설명하고 있다. 즉 주인장을 발급하게 되면, 죽도를 조선령으로 인정하는 것이 되어, 일본으로서는 조선으로 가는 길이 일본에서 대마도를 거쳐 부산으로 가는 한 길만 남게 되기 때문에 주인장을 발급할 수 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또한, 죽도행을 조선 측이 승인할 리도 없었기에 죽도 도해에 대한 주인장 대신 주인장과 유사한 성격의 도해면허를 발급했다고 한다.

 결국은 조선이 잠시 공도정책으로 울릉도에 사람을 비워둔 사이 일본령으로 만들겠다는 의도에서 주인장 대신 도해면허를 발급했다는 설명이 된다. 그러나 이미 이야기했듯, 에도막부가 죽도도해면허를 발급할 때 죽도의 영유화를 그 목적으로 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죽도도해면허(竹島渡海免許)는 봉서와 주인(朱印)의 중간형태를 띠고 있으나, 봉서와 주인장 모두 해외로 갈 때의 허가증이라는 점에서 죽도를 외국령(조선령)으로 인식해 죽도도해면허를 발급했음은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도막부는 죽도가 조선령임을 뚜렷이 인식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의 반발에 대비해 주인을 변형시킨 도해면허를 발급했으며, 이는 명백히 타국의 영토를 침략하는 해적행위에 해당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죽도고증의 다음 기록을 살펴보자.
죽도고증에서는 죽도도설(竹島圖說)을 인용해 도해면허를 발급하는 과정에서 주인을 하사했다는 기록을 하고 있다.
주인(朱印)이 외국 무역을 공인하는 증명서인 이상, 일본에서는 울릉도(竹島)와 독도(松島)를 외국령 즉 조선령으로 인식했음은 분명하다. 이렇듯 후대의 기록에서 조차 일본인들 스스로 죽도도해면허를 주인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四年幕府光政ノ請ヲ以テ兩商ヲ江戶ニ召シ竹島渡海御免ノ朱印ヲ賜フ、其文如左、
4년, 막부가 光政의 청으로 두 상인을 江戶에 불러 竹島 渡海를 윤허하는 朱印을 내렸다. [竹島圖說]

 위에서 소개한 일본의 관찬기록인 은주시청합기(1667) 국대기(國代記) 4권 지부군효화산록기(知夫郡燒和山綠起)에 역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伯耆國 之大賈村川民 自官賜朱印 致大船於磯竹島
伯耆國의 대상인(大商) 무라카와(村川)사람들이 관으로부터 주인장(朱印狀)을 하사받아 磯竹島에 큰 배를 보냈다.

 죽도도해면허를 주인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시기는 죽도도해면허를 받아 두 가문에서 죽도에 출어할 때의 기록으로 이 시기에 조차 죽도도해면허를 외국에 도해할 때 발급하던 주인장으로서 인식하고 있다.

죽도도해면허에서 한가지 더 주목할 것은 울릉도의 일본에서의 명칭이 도해면허를 발급할 당시 기죽도에서 죽도로 바뀐 사실이다. 일본은 그 이전 울릉도를 기죽도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런데, 도해면허를 발급하면서 죽도라는 명칭으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이 당시 일본에서의 울릉도에 대한 명칭이 등장하는 기록으로 이수광의 지봉유설, 변례집요의 기록이 있으며, 죽도 도해면허 이전의 일본 측 기록에서 역시 울릉도를 기죽도로 호칭하고 있었다.

 이렇게 울릉도의 명칭이 기죽도(磯竹島, 礒竹島)에서 죽도(竹島)로 바뀐 것은 위에서 언급했듯, 조선 측의 눈을 속이기 위한 임기응변으로 보인다. 즉, 기죽도라는 이름으로 도해면허를 발급한다면, 조선에서 역시 기죽도가 울릉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반발할 것을 예상하고, 이전 중국 측 기록에 등장하는 죽도라는 명칭으로 바꿔 도해면허를 발급함으로써 조선의 시선을 피하고자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결어

 이상 살펴본 것처럼 죽도도해면허를 발급할 당시 일본의 에도막부는 죽도(울릉도)가 조선령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죽도·송도도해면허를 발급한 에도막부의 행위는 남의 영토를 침략한 사실상의 해적행위에 불과했다. 도해면허 자체가 현재의 여권과 같은 증명서였다는 점에서도 에도막부가 죽도와 송도를 외국령(조선령)으로 인식했음은 너무도 뻔한 사실이다. 따라서 죽도해면허는 죽도와 송도에 대한 역사적 권원이 한국에 있음을 증명해 주는 자료가 된다.  

 최근 일본에서는 에도막부가 죽도도해면허를 발급할 당시 죽도가 무인도화 되었으므로 조선령이라는 인식없이 죽도의 영유화를 목적으로 도해면허를 발급했다고 하는 새로운 논리를 구성해 죽도경영사업을 시행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일본이 에도막부의 공인하에 죽도를 실효지배했다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죽도도해면허 전후의 일본 관찬기록에 죽도(울릉도)가 조선령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죽도도해면허 자체가 외국으로의 도해를 허가했던 증명서라는 점과 돗토리번이 죽도를 자신의 관할지로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그 근거가 희박한 주장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죽도도해면허는 일본의 일반인이 울릉도에 갈 수 있는 면허가 아닌 돗토리번의 오오야(大谷) 무라카와(村川) 두 가문에 한정한 도해면허였다. 당시의 일본 측 기록을 보면 죽도도해면허가 내려질 당시인 1625년에 다른 일본인 또한 울릉도에 도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죽도도해면허는 오오야, 무라카와 두 가문에게 독점적으로 울릉도에 도해할 수 있는 권리를 준 것에 불과하며, 일본측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에도막부가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령이라고 인정한 것은 아니다. 거꾸로 도해면허를 발급함으로써 죽도가 외국령인 조선령이었음을 인정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것이다. 송도는 죽도의 부속 섬으로서 죽도1건의 결과, 죽도도해금지령을 내렸다면, 마땅히 송도도해금지령까지 포함되었음은 자명하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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