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네현고시 전후의 일본기록속 독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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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산업지
조선개화사
일본민족의 신발전장 만한로령지지
통상휘찬 한국울릉도사정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고시 제40호로 독도를 불법편입하기 이전, 일본에서는 독도를 예외 없이 한국령으로 기록하였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일본정부의 견해를 밝힌 일본 관찬기록에서 너무도 철저하게 독도를 한국령으로 인식했다는 사실이다. 1877년 일본 태정관의 지령서에서는 독도를 일본과 관계가 없는 섬임을 표명했으며, 일본 해군의 수로지 역시 독도를 한국령으로 표기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시기 일본의 관찬지도에서도 독도를 일본령에 포함한 지도는 단 한 장도 보이지 않으며, 시마네현고시의 당사자인 시마네현의 문헌과 지도에서도 독도는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1905년 시마네현 고시로 독도를 일본령으로 불법편입한 이후, 일제강점기 초기 사이에 간혹 독도를 일본령으로 표기한 기록이 몇몇 등장하고 있다.

동아여지도(東亞輿地圖, 1909, 일본 육지측량부)
松江부분 지도와 울릉도·독도부분 확대도(좌측)
"竹島(島根縣隠岐)'와 '鬱陵島(松島) 韓國江原道" 라는 주기가 되어 있다.

 ※사진출처; http://www.tanaka-kunitaka.net/takeshima/9list.html

 이처럼 독도를 일본령으로 표기한 일본 측 기록은 시마네현 고시를 필두로 1910년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한 몇 년 후까지의 기록 속에 나타난다. 그러나 이 시기 일본에서는 이러한 기록조차도 찾아보기가 어려우며, 일본에서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면서는 다시 독도를 울릉도에 부속한 섬으로써 기술한 기록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이것은 시마네현 오키시마에서 약 157.5km나 떨어져 있는 독도를 굳이 시마네현의 관할로 둘 필요가 없었기에, 이전 한일 공통으로 인식했던 것처럼 울릉도의 관할로 다시 복귀시킨 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한국 전체를 자신의 수중에 둔 상황에서 애써 독도를 시마네현 담당으로 둘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위의 동아여지도를 발행한 일본의 육지측량부 또한 일제강점기인 1936년 구역일람도에 독도(竹島)를 시마네현 소속이 아닌 한반도에 포함된 섬으로 기술했다.
이 시기 독도를 일본령으로 기록한 지도는 현재 필자가 알고 있기로, 단 2장에 불과하다.


 이하에서는 1905년 2월 시마네현고시 이전에, 일본에서 독도를 어느 나라의 영토로 인식했는지 명확히 보여주는 독도관련 몇 가지 기록을 소개하고자 한다.


조선산업지(朝鮮産業誌,1910~1911,山口精 著, 寶文館)
이 자료의 사진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이며, 아래 글은 한수당연구자료집을 참고해 구성했고, 일본어 번역은 필자가 직접 했음을 밝힙니다.

중권 제4편 수산업 속에 각도별로 중요어업근거지를 들면서 강원도지역內 울릉도項(135쪽)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鬱陵島より東南の方約三十里 無人の一島あり(ヤンコ)島と呼べるが沿岸の屈曲多く、漁船を泊し風浪を避くるに良し。

울릉도로부터 동남의 방향으로 약 30리에 무인의 한 섬이 있어 얀꼬도(ヤンコ)라고 부른다. 연안의 굴곡이 많아 어선을 정박하여 풍랑을 피하기에 좋다.

 이 책의 범례(凡例)에는 각 관공서에서 조사한 자료를 가지고 각 분야에 걸쳐 일본 통감부 관련 局長 내지 동급의 관리나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교정을 거쳤음을 밝혔다. 이 구절이 실린 제4편 수산업項은 조선총독부의 기사이자 농상공부 식산국(殖産局) 수산과장(水産課長)인 이하라 부니찌(庵原文一)가 교열(校閱)을 하였으므로, 자료의 신뢰도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조산산업지의 독도 관련 기록은 한국을 식민통치한 원년에조차도 일본정부에서 독도를 한국령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증명해 주는 중요한 자료로서 본의 아니게 일본이 시마네현 고시로 독도를 침략했음을 폭로한 중요한 자료라고 할 것이다.

이 책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하여 기술내용의 정확성과 신뢰도를 높이기 위한 편저자의 각별한 노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옆(왼쪽 페이지)은 조선산업지의 교정자(校訂者)와 직위명, 교정분야이다.

本書の記事は悉く周到なる用意を以て編者したるも、尙過誤なきを期する爲め各篇とも斯道專門諸士に依賴し嚴密なる校訂を經たり。

본서의 기사는 모두 용이주도하게 함으로써 편자가 (그렇게)했어도 과오가 없기를 기하기 위해 각 편(篇) 모두 이 분야의 여러 전문가(專門諸士)에게 의뢰하여 엄밀하게 교정을 거쳤다.


조선개화사(朝鮮開化史, 1901, 박문관, 恒屋盛服 著)

이 책 제4장 강원도 에서는 울릉도를 설명하면서 울릉도 주위의 크고 작은 6개의 섬 중에서 저명한 섬으로써 우산도와 죽도를 꼽고 있다.

金崗山ノ一支東海ニ入スル六十餘里峙立シテ鬱陵島トナル一ニ蔚陵ト書ス卽チ古ノ于山國ナリ後新羅ニ入ル別名ハ武陵羽陵共ニ字音近キニ因ル大小六島アリ其中著名ナルヲ于山島(日本人ハ松島ト名ク)竹島ト云フ

금강산의 한 지맥이 동해에 들어가 60여 리 떨어진 곳에 우뚝 솟아올라 울릉도가 되었는데, 일설에 울릉이라고 쓰여진 즉, 옛날의 우산국으로 후에 신라에 편입되어 다른 이름으로 무릉·우릉이라고 했는데, 모두가 글자의 음이 비슷한 까닭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크고 작은 6개의 섬이 있다. 그 중 저명한 것을 우산도(일본인은 松島라고 부른다)와 죽도라고 한다.

(중략)

本島ノ日本ト關係ヲ生ジタルハ倭寇以來ノ事ナルガ如シ貝原益幹ハ之ヲ日本ノ所屬ト斷 ジタリ明治十五六年ノ頃日本人某工人ヲ派シテ伐木ニ從事シタルニ韓廷抗議シ日本之ニ讓リテ其所屬論ハ一定シタルモ日本人ノ窃ニ渡航シテ伐木及密貿易ニ從事セルハ猶止マズ貨物賣却ノ時口錢百分ノ二ヲ官ニ納レ木材ニハ船一隻ニ百兩ヲ納レ以テ公然ノ密貿易ヲ營メリ。因ニ記ス今王建陽二年西歷千八百九十七年該島ノ伐木殖林ノ權利露人ノ手ニ歸シ光武三年京城駐在露公使ハ韓廷ニ照會シテ外國人ノ鬱陵道木材盜伐ヲ禁ゼソフヲ迫リ外部亦タ日本公使ニ照會シタレバ日本公使ハ該島ニ在リタル日本人ニ退去ヲ命ジ次デ露ハ工學士及兵士ヲ該島ニ派シ占領ニ類似セル處置ヲ施シタリト云アフ。

본도(울릉도)가 일본과 관계가 생긴 것은 왜구(倭寇) 이래의 일로써, 가이바라 에키켄(貝原益幹)은 이 섬을 일본의 소속이라고 단정했다. 명치 15,6년에 일본인 어느(某) 공인을 파견해서 벌목에 종사하게 하였는데 한국 조정이 (이에)항의하였고, 일본이 이를 양보하여 그(울릉도) 소속을 논하는 것이 하나로 정하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이 몰래 도해하여 벌목과 밀무역에 종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화물 매각을 할 때 구전(口錢)100분의 2를 관리에게 납부하고 목재는 배 1척에 100량을 납부함으로써 공공연히 밀무역을 경영하였다.

덧붙여 적으면, 現王인 건양(建陽) 2년, 서기 1897년에 해당 섬의 벌목과 식림의 권리가 러시아인의 수중으로 돌아가 광무 3년(1899) 경성주재 러시아 공사는 한국조정에 조회(照會)하여 외국인의 울릉도 목재도벌을 금하도록 다그쳤으며, 외부(外部) 또한 일본공사에 조회하여서 일본공사는 해당 섬에 있는 일본인의 퇴거를 명령하였고, 그다음, 러시아 공학사와 사병을 해당 섬(울릉도)으로 파견하여 점령과 유사한 처치를 했다고 한다.

야마토혼조[大和本草]로 유명한 후쿠오카 번의 본초학자이며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貝原益幹이 울릉도를 일본영토로 단정했다는 기록은 본 일이 없다. 에도시기 일본의 어느 학자도 울릉도를 일본령으로 기록한 적은 없다.

 이 기록에서 가장 눈여겨볼 것이 울릉도 주위의 크고 작은 여섯 개의 섬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우산도와 죽도라는 기록이다. 또한, 우산도는 일본에서 전통적으로 독도를 부르던 松島임이 주기 되어 있다.

이 기록을 접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한국 측 기록이 1899년 9월 23일 자 황성신문의 기사로 이 부분의 기록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울진지동해(鬱珍之東海)에 일도(一島)가 유(有)니 왈(曰) 울릉(鬱陵)이라 기(其) 부속(附屬)한 소육도중(小六島中)에 최저자(崔著者) 우산도(于山島) 죽도(竹島)이니 대한지지(大韓地誌)에 왈(曰) 울릉도(鬱陵島) 고우산국(古于山國)이라.

 역시 울릉도 주위의 소육도중(小六島中)에서 가장 두드러진 섬으로 우산도와 죽도를 꼽고 있으며 울릉도와 그에 부속한 섬들을 합쳐 옛날의 우산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개화사에서 역시 우산도와 죽도가 울릉도 주위의 가장 대표적인 섬으로써 기술하였다. 따라서 조선개화사의 우산도와 죽도를 열거한 글은 울릉도에 부속한 섬을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황성신문과 조선개화사 두 기록을 통해 일본에서 주장하듯 우산도가 죽도가 아닌 독도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한가지, 일본 일부의 몰지각한 사람들은 우산도에 일본인이 松島라고 한다는 주기내용을 빌미로 이 문장에서의 우산도는 울릉도라고 억지를 부릴 수도 있다. 책을 저술할 당시(1901년) 일본에서의 울릉도의 공식적인 명칭이 松島라는 이유에 근거한 것이다. 사실 너무도 상식이하의 왜곡이라 대꾸할 가치는 없으나, 다른 자료를 소개하는 차원에서 이에 반론하고자 한다.

1. 전체 글을 읽어보면, 울릉도는 분명하게 그 이름이 울릉도와 무릉, 우릉의 3가지 명칭만으로 한정해 기록하고 있어 억지주장임을 알 수 있다.

2. 또한, 먼저 울릉도를 설명하고 뒤에 크고 작은 여섯 개의 섬을 거론하여, 우산도와 죽도가 울릉도 주위의 섬임을 표현하고 있다. 특히 뒷부분에서 메이지 시기 울릉도에서의 일본인 퇴거 과정을 설명하면서도 송도라는 명칭은 보이지 않는다.

본도(本島), 해도(該島)라는 이름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간에 그 섬이 울릉도임을 밝히고 있어 울릉도의 명칭은 처음부터 끝까지 '울릉도'로 통일되어 있다.

光武三年京城駐在露公使ハ韓廷ニ照會シテ外國人ノ鬱陵道木材盜伐ヲ禁ゼソフヲ迫リ
광무 3년(1899) 경성주재 러시아 공사는 한국조정에 조회(照會)하여 외국인의 울릉도 목재도벌을 금하도록 다그쳐, 

3. 우산도가 나오는 부분의 설명은 한국의 옛기록에서의 울릉도를 설명하면서 나온 것이다. 일본이 전통적으로 독도를 부르던 명칭은 松島였다.

4. 이 책을 출판한 박문관(博文館)에서 발행한 또 다른 서적인 한국신지리(1905)에 역시 독도를 ‘리앙꼬르드島(リヤンコールド)岩, ‘리앙꼬(リヤンコ)島',라는 명칭으로 한국의 영토로써 기록하고 있으며, 역시 박문관에서 발행한 신찬조선지리지(1894)에서도, 동해에 산재한 섬으로써, 울릉도와 우산도를 다른 섬으로 각각 기록하고 있다.

5. 더군다나, 조선후기 지도와 문헌에서도 모두 울릉도와 우산도를 다른 섬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를 일본에서도 알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기록에서의 우산도 옆에 주기 된 송도는 독도의 명칭임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국세견전도(朝鮮國細見全圖,1873,染崎延房)

개정 실측조선전도(實測朝鮮全圖, 1894, 宗孟寬) 于山島가 울릉도의 서쪽에 그려져 있다.

'대일본분현지도(大日本分縣地圖(1908년 초판, 1910년 제5판)' 50매 중의 '朝鮮全圖' 울릉도 독도부분

조선전도(朝鮮全圖,1894)

조선국전도(朝鮮國全圖,1882. 鈴木敬)

 이렇게 19세기 말 일본의 지도들은 울릉도와 우산도를 따로 구분해 표기하고 있다. 특히 소오모칸의 개정 실측 조선전도에서는 일본에서 울릉도를 공식적으로 松島라고 부르기 시작한지 10여 년 이상이 흐른 1894년의 지도로써, 당시 일본에서 여전히 독도를 松島라고 부른 사람이 있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지도이다. 대일본분현지도 중 조선전도에서는 다케시마(竹島)란 명칭으로 변경된 후에도 독도를 조선전도에 포함을 시켜 조선의 영토임을 밝히고 있다.

 이 지도들이 제작된 시기는 조선개화사가 쓰인 전후로써 당시 일본에서 우산도를 울릉도의 다른 이름으로 알았다는 일본 일부의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이처럼 우산도를 시도 때도 없이 죽도(Chukdo), 혹은 관음도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 경우에서와 같이 울릉도로 탈바꿈시키기도 한다. 그들의 주장을 모두 종합해 본다면, 서로 다른 3섬을 우산도라는 동일 명칭으로 불렀다는 상식 이하의 인식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면모를 보이는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역사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논리적 모순으로 인한 공백을 메우고자, 독도의 진실을 왜곡하는 일부 일본인들에 한정된다.

6. 이 책이 쓰여지기 5년 전에 발간된 '조선지명안내(朝鮮地名案內, 1894, 津田仙 저, 學農社)'에서 역시 울릉도와 우산도를 따로 표기하고 있다.

울릉도(Oul-neung-to)와 별도로 우산도(Ou-san)를 다른 지명으로 기록했으며, 朝鮮ノ東方、蔚陵島ノ近傍(조선의 동쪽, 울릉도의 근방)에 있는 섬이라 설명했다.

이 당시 한일 양국의 거의 모든 기록에 이처럼 우산도는 울릉도와 다른 섬으로 기록되어 있어 우산과 울릉도가 한 섬이라 착각한 것은 극히 일부의 일임을 알 수 있다. 조선개화사의 기록은 우산도가 죽도가 아닌 독도임을 기술한 일본의 기록으로써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이다.


일본민족의 신발전장 만한로령지지(日本民族の新發展場萬韓露領地誌, 寶文館, 罔部福藏 著, 1905)
이 책에 대한 정보는 인조이 재팬 반일 데이터 베이스 회원이신 '벙이'님께서 제공해 주셨습니다.(사진자료 ; 국립국회도서관)

이 책 제1편 한국(조선) 지방지 제11절 강원도 울릉도項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てっせみ島ハ臥達里ノ前洋ニアリ本邦人之ヲ竹島ト稱ス周回三十町餘たぶ女竹繁茂スト雖モ飮料水乏シキヲ以テ移住スルモノナシ。

뎃세미島는 와달리(臥達里)의 앞바다에 있다. 본방인(일본인)은 이 섬을 竹島라 칭한다. 주회가 30여 정(丁) 이며 여죽(たぶ)이 무성하나 음료수가 모자라 그곳으로 이주하는 자가 없다.

竹島ハ明治三十八年二月日本新領土トナリ隱岐島司ノ管下ニ歸ス
竹島는 명치38년(1905) 2월 일본의 새 영토가 되어 오키도사의 소관이 되었다.

1정 = 109m, 30정 =3.27km, 실제 죽도의 둘레는 약 4km

 만한노령지지 본문에서의 竹島는 현재의 댓섬을 설명하고 있다. てっせみ(TESSEMI)島는 댓섬의 일본식 발음으로 보이며, 여죽이 번성한다는 설명으로 여기서의 竹島는 와달리 앞바다의 댓섬인 죽도(Jukdo)가 틀림없다.

 이 책의 저자는 일본에서 1905년 2월 시마네현고시로 불법편입한 다케시마(竹島)를 울릉도 북동쪽의 댓섬(Jukdo)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전부터 댓섬을 죽도(竹島)라고 불렀으며, 1905년 2월 시마네현이 불법편입한 독도가 다케시마(竹島)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바뀌어 불렸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댓섬과 독도를 같은 섬으로 오인한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댓섬인 죽도를 설명하면서 본방인(일본인)이 다케시마(竹島)라 칭한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따로 竹島가 1905년 2월 오키도사의 관할이 되었다는 주기를 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시마네현 고시로 불법편입한 독도를 당시의 일본인은 본래 한국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를 포착할 수 있다. 그들의 주장대로 독도가 본래 무주지이거나 일본의 고유영토였다면, 애써 오키도의 관할로 편입한 '다케시마'란 명칭의 섬을 한국의 강원도를 설명하면서 등장시킬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1905년 당시 일본인들은 시마네현이 불법편입한 독도(竹島, 다케시마)를 한국으로부터 빼앗은 섬으로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만한노령지지에서 저자가 과연 울릉도 코앞의 댓섬과 1905년 시마네현고시로 불법편입한 독도를 같은 섬으로 착각했겠느냐는 '벙이'님의 견해가 있었습니다.

 토론을 하면서 벙이님의 지적은 만한노령지지의 저자가 두 섬을 혼동했다고 생각한다면 그 근거를 확실히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견해임을 알았습니다.

제가 만한노령지지의 저자가 두 섬을 같은 섬으로 착각했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토론 중에 여러 번 밝혔지만, 만한노령지지 전체적으로 위의 주기는 아래 본문의 어떤 단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외는 단 하나도 없으며, 특히 지명에 대한 주기는 정확히 아래 지명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벙이님께서, 그 항목의 울릉도(제11절 강원도 6. 울릉도)에 대한 주기일 수 있다는 지적을 해 주셨습니다.

물론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소항목(小項目)의 주기를 달 때 역시 울릉도라는 지명을 밝히거나, 지명을 아예 생략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략할 때에도 本島 라는 식으로 이 주기가 밑의 소항목인 울릉도에 대한 설명임을 특별히 표시한 사례가 많습니다. 분명한 것은 만한노령지지의 주기에서 지명이 생략된 내용은 밑의 소항목(울릉도)에 대한 주기 내용이며, 주기의 지명은 예외 없이 아래 본문에 등장하는 지명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서만 특별히 혼동할 여지가 있는 동명(同名)의 다른 섬을 주기했다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 이외에는 밑줄을 그어 밑의 본문 내용 중 어떤 지명을 설명하는지 밝히거나 본문에 나오는 지명을 직접 주기에 표기를 했죠. 따라서 저자는 본문내용 중의 竹島(댓섬)를 1905년 시마네현고시로 불법편입한 竹島(다케시마)로 착각한 것이 명확합니다.

만한노령지지 전체의 주기내용의 지명(地名)은 예외없이 아래 본문의 지명을 설명하고 있다. 지명이 생략된 주기는 본문 중의 소항목의 지명을 주기한 것이다. (오른쪽 사진 ; 울릉도 부분은 아래 통상휘찬의 한국울릉도사정을 정리한 글임을 알 수 있다.)

2. 이 책이 참조한 1902년의 통상휘찬을 보면, 일본인이 부르는 이름으로 독도를 松島, 댓섬(Jukdo)을 竹島라고 표기했습니다. (통상휘찬의 본문내용은 아래 게재)

통상휘찬에서 두 섬을 묘사한 대목을 보죠.

죽도(Jukdo) ;テツセミ島ハ臥達里ノ前洋ニ在り本邦人之ヲ竹島ト俗稱ス周回三十丁餘(タブ)女竹繁茂スト雖モ飮料水ナキヲ以テ移住スルモノナシト云フ

독도 ; 又本島ノ正東約五十海里ニ三小島アリ之ヲリアンコ島ト云ヒ本邦人ハ松島ト稱ス同所ニ多少ノ鮑ヲ産スルヲ以テ本島ヨリ出漁スルモノアリ然レトモ同島ニ飮料水シキニヨリ永ク出漁スルコト能ハサルヲ以テ四五日間ヲ經ハ本島ニ歸航セリ。

그리고, 만한노령지지의 저자가 죽도를 묘사한 구절을 보겠습니다.

죽도 ; てっせみ島ハ臥達里ノ前洋ニアリ本邦人之ヲ竹島ト稱ス周回三十町餘たぶ女竹繁茂スト雖モ飮料水シキヲ以テ移住スルモノナシ。

 죽도(Jukdo)를 묘사한 위 두 책의 설명을 보면 거의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런데 만한노령지지의 문구에서 통상휘찬의 죽도(Jukdo)에 대한 설명에서 보이지 않는 글자가 나옵니다. 乏(핍)자죠. 乏은 부족하다, 모자라다 는 뜻이 있습니다. 만일 와달리 앞바다의 댓섬(Jukdo)을 설명한다면, 이 乏자가 들어가면 올바르지 못한 설명입니다. 죽도(Jukdo)에는 물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습니다.

통상휘찬에는 '죽도(Jukdo)에 물이 없어서 이주하는 사람이 없다'고 정확히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만한노령지지의 저자는 물이 부족해서 이주하는 사람이 없다고 기술하고 있죠.
그런데 통상휘찬 독도를 설명한 글을 보면, 문제의 乏자가 등장합니다. 모두 아시듯 독도에는 물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니죠.

이렇듯 만한노령지지의 저자는 竹島라는 섬을 설명하면서, 통상휘찬의 죽도(Jukdo)와 독도 두 섬에 대한 정보를 혼용해 쓴 것입니다.

 이것은 만한노령지지의 저자인 오카베 후쿠죠(罔部福藏)가 통상휘찬 상의 죽도(Jukdo 본문에서는 竹島, テツセミ島)와 독도(본문에서는 リアンコ島, 松島)를 같은 섬으로 착각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또, 통상휘찬에서 竹島(Jukdo)는 와달리의 앞바다에 위치한다고 했습니다. 그곳은 울릉도의 동쪽이죠. 그런데, 통상휘찬에서는 독도를 정동쪽에 있다고 했습니다. 기술내용이 서로 비슷해 같은 섬으로 착각할 여지가 있었던 것입니다. 즉, 오카베 후쿠죠(罔部福藏)는 통상휘찬 413쪽의 竹島(Jukdo)와 416쪽에 나오는 독도(리앙코島)가 다른 섬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거죠. 따라서 그는 만한노령지지에서 시마네현고시로 편입한 竹島(다케시마)를 본문 중에서 설명한 것이고, 당연히 1905년 2월 일본에서 편입한 섬이라고 주기를 했던 것입니다. 비록 통상휘찬 상의 죽도(Jukdo)를 설명한 글을 인용했으나, 오카베 후쿠죠(罔部福藏)는 그 섬이 독도인 시마네현고시의 다케시마(竹島)로 알고 있었던 겁니다.

3. 본문과 상관없는 동일 명칭의 다른 섬을 바로 위의 주기에 따로 설명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당연히 혼동의 여지가 있다면, 아래 본문의 竹島와 주기하는 竹島가 다른 섬이라는 간단한 언급이 없을 수가 없죠.

 이렇게 만한노령지지는 1905년 시마네현고시로 불법편입한 竹島(다케시마)를 한국의 영토에 기술하여 그 섬이 1905년 시마네현고시로 약탈한 섬임을 본의 아니게 폭로해 놓은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이에 대해 다른 의견이 있으신 분은 게시판에 연락 바랍니다. 그리고 자료를 제보해 주시고 토론에 응해 주신 벙이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만한노령지지의 竹島가 독도임이 더욱 명확해졌으며, 통상휘찬과 같은 귀중한 자료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통상휘찬(通商彙纂, 1902.10.16 일본 외무성 통상국, 元眞社)의 한국울릉도사정(韓國鬱陵島事情, 1902. 10. 10 부산주재 일본영사관에서 일본에 보낸 보고서)
사진자료 ; 다나카 쿠니타카의 홈페이지 

 위 만한노령지지는 1902년 일본 외무성 통상국(通商局)에서 펴낸 통상휘찬(通商彙纂) 부록의 한국주재 일본 영사관의 보고서인 한국울릉도사정(韓國鬱陵島事情 제七漁業ノ狀況)을 그대로 옯긴 책이다. 만한노령지지의 죽도(Jukdo)에 대한 기술내용은 통상휘찬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며, 그 이외 울릉도에 대한 설명 역시 통상휘찬의 내용을 정리한 글이다.

이 책은 일본 외무성 통상국의 기록으로써, 일본정부의 관찬기록이며 한국 부산 주재 일본 영사관의 보고서라는 점에서 1902년 당시 일본정부가 독도를 어느 나라의 영토로 인식했는지 명확히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아래 해석은 본인이 직접한 것으로 오타나 오역이 있으면 게시판에 연락바랍니다.

 

◎ 韓國鬱陵島事情
地勢、在島韓民ノ狀況、物産、船舶碇泊場、本邦在留人槪況、商況、漁業ノ狀況、氣候、傳染病、組合規約
(外務省通商局)
第一、鬱陵島ノ地勢
鬱陵島ハ江原道蔚鎭ヲ距ル四拾里前洋ニ在ル一孤島ニシテ周回九里半餘其形狀不等三角形ニ似タリ全島ノ海岸ハ斷巖絶壁ニシテ渚濱ク隨テ大船巨舶ヲ入ルヘキ良港ナク僅ニ道洞苧洞其他二三ノ小灣小曲江アルノミ而シテ沿岸ノ海底ハ多クハ岩石ニシテ船舶ノ投錨碇泊ニ便ナラスト云ヘリ。
地勢ハ山岳連亘シテ平地坦路至テ小シ往昔ハ全島森々タル樹木繁茂シ盡尙ホ暗キノ觀アリシモ今ヤ島民ノ繁殖スルニ從ヒ海岸附近ハ一體ニ伐木開拓シテ農作地トナセリ。
テツセミ島ハ臥達里ノ前洋ニ在り本邦人之ヲ竹島ト俗稱ス周回三十丁餘(タブ)女竹繁茂スト雖モ飮料水ナキヲ以テ移住スルモノナシト云フ。又亭石浦ノ海上ニ雙燭石及島牧ノ島嶼アリ。周回二十丁本邦人之ヲ觀音島ト稱シ其岬ヲ觀音崎ト云ヒ其間ヲ觀音ノ瀨戶と乎へり。又雙燭石ハ三岩高ク樹立スルニヨリ三本立ノ名アリ。其他周圍ノ海岸ニ數簡ノ峻巖アリシモ一モ名稱ナク唯タ光岸ノ前面ニ俵島アレトモ至ヲ小島ナリトス。(以下省略)

한국 울릉도사정
지세, 재도 한국인의 상황, 물산, 선박 정박장, 본방 재유인 개황, 상황(商況), 어업의 상황, 기후, 전염병, 조합규약
(외무성 통상국)
제일、 울릉도의 지세
울릉도는 강원도 울진에서 40리 거리의 앞바다에 있는 일 고도(孤島)로서 주회(둘레)가 9리 반 여이며 그 형상이 고르지 않아 삼각형과 비슷하다. 전도(全島)의 해안은 깎아지른 듯한 바위의 절벽이고 물가를 따라 대선(大船), 거박(巨舶)이 들어가기 좋은 항구가 없다. 겨우 도동 저동 기타 두세 곳의 작은 만(灣)과 작은 곡강(曲江)이 있을 뿐이고 연안의 해저 대부분은 암석에 선박이 닻을 내려 정박하기 편하다고 한다.
지세는 산악이 연이어 뻗쳐있어 평지와 탄탄대로는 적고, 예전에는 온 섬이 수풀로 우거져 수목이 번무하여 온통 어둡게 보이기도 했으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도민(島民)이 많아짐에 따라 해안 부근은 모두 벌목·개척하여 농작지가 되었다.
뎃세미도(テツセミ島)는 와달리 앞바다에 있는데 본방인(일본인)은 이 섬을 죽도(竹島)라고 속칭한다. 주회 30여 정에 여죽이 번무하고 음료수가 없어 누구도 이주하는 자가 없다고 한다. 또 정석포(亭石浦)의 해상에 쌍촉석과 섬 목장의 도서가 있다. 주회 20정이며, 본방인(일본인)은 이 섬을 관음도라 칭한다. 그 갑(岬)을 관음기(觀音崎) 라고 하며 그 사이를 관음의 뇌호(瀨戶)라고 부른다. 또 쌍촉석(雙燭石)은 3개의 바위가 높이 서 있음으로부터 삼본립(三本立)이라는 이름이 있다. 기타 주위의 해안에 수간(數簡)의 가파른 바위가 있는데 명칭이 없고, 오직 광안(光岸)의 전면에 표도(俵島)라고도 하는 섬에 이르기까지 작은 섬이 있기도 하다.

갑(岬); 바다 쪽으로 부리 모양으로 길게 쑥 내민 육지

 만한노령지지의 댓섬인 죽도(Jukdo)에 대한 설명은 이 부분을 그대로 옮겼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 한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죽도와 관음도라는 명칭을 일본인이 두 섬을 부르던 호칭이라는 기록이다. 이미 죽도는 1882년 이규원 일행의 울릉도 외도와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서 한국인이 댓섬을 부르던 한자식 명칭으로 나와 있으며, 일본수로지나 수로잡지 등을 보면, 일본인은 죽서도 라는 이름으로 죽도와 구분을 하였다.

필자의 생각으로 이 글에서의 죽도와 관음도는 한국식 한자표기명을 울릉도의 일본인이 쓰고 있는 것을 보고 일본인이 그 섬을 부르는 호칭으로 생각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이 글에 나오는 울릉도 주위 바위나 섬에 대한 호칭은 그 후, 1908년의 한국수산지, 1905년의 울릉도 망루배치도에도 같은 이름으로 일부 기록되어 있다. 특히 위 글에서 깍새섬을 일본인이 관음도라고 부른다고 했는데, 그 갑(岬)※을 관음기(觀音崎)라고 기록하여 본래 한국에서의 깍새섬의 한자표기명이 관음도(觀音島)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국 울릉도 사정의 저자가 한국주재 부산 영사관이었고, 이 외 같은 섬의 이름이 나오는 한국수산지 역시 한국 통감부에서 펴낸 것으로써 모두 한국에 직접 주재하던 사람들이 이 글을 썼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울릉도 주위의 섬과 바위에 대한 한국에서의 한자식 표기명을 일본인이 그대로 가져다 썼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일본 외무성 통상국의 '한국울릉도사정' 독도 관련 부분(416쪽)은 다음과 같다.

第七漁業ノ狀況
本島ノ漁業季節ハ例年三月ヨリ九月迄ニシテ收穫物ハ鮑、鰒、天草、海苔、若芽ノ數種ニ過キス、漁業者ハ多ク能本ノ天草、島根ノ隱岐、三重ノ志摩地方ヨリ渡來ス而シテ韓人漁夫ハ皆無ノ有樣ナレトモ每年全羅道三島地方ヨリ多數ノ漁夫等渡來シテ海岸ニ滿生スル若芽ヲ採收セリ本年ハ天草ノ隱岐漁業者都合水潛器船八隻道洞ヲ本據ト定メ又地摩ノ蜑船二隻天ノ草海士舟一隻ハ苧洞ニ假小屋ヲ構ヘ何レモ全島ノ海岸ヲ巡漁セルモ今年ハ昨年ニ比シ餘程不漁ナルニヨリ利潤カラサル多見込ナリト云ヘリ、又本島ノ正東約五十海里三小島アリ之ヲリアンコ島ト云ヒ本邦人ハ松島ト稱ス、同所ニ多少ノ鮑ヲ産スルヲ以テ本島ヨリ出漁スルモノアリ然レトモ同島ニ飮料水乏シキニヨリ永ク出漁スルコト能ハサルヲ以テ四五日間ヲ經ハ本島ニ歸航セリ。

제7. 어업의 상황

본도(本島)의 어업계절은 평년에는 3월에서 9월까지이며, 수확물은 전복, 복어, 우뭇가사리, 김, 미역의 몇 종류에 불과하다. 어업자는 대부분 구마모토(熊本)현의 아마쿠사(天草)、시마네현의 오키(隱岐)、미에(三重)현의 시마(志摩) 지방에서 건너 오는데, 한인어부는 아무도 없는 상태지만 매년 전라도 삼도(三島)지방으로부터 다수의 어부 등이 도래하여 해안에 꽉차 자라는 미역을 채취했다.
올해는 아마쿠사(天草)의 오키(隱岐) 어업자조합이 수잠기선(水潜器船) 8척으로 도동을 본거지로 정하고, 또 시마(志摩)의 단선(蜑船) 2척과 아마쿠사(天草)의 해사선(海士船) 1척이 저동에 임시 소옥을 지어 놓고 모두가 전도(全島)의 해안을 돌며 어업도 하는데, 금년에는 작년에 비하여 고기가 잡히지 않게 되어 이윤이 많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고 한다.
또 본도(本島)의 정동쪽으로 약 50해리(약 92.6km)에 3개의 작은 섬이 있다. 이 섬을 '리앙코島' 라고 하는데, 본방인(일본인)은 '松島'라고 칭한다. 동소(同所; 독도)에 다소의 전복이 산출됨으로써 본도(本島; 울릉도)에서 출어하는 자가 있다. 그럼에도 동도(同島 ; 독도)에는 음료수가 모자라 오랫동안 출어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아 4,5일간이 지나서는 본도(울릉도)에 귀항했다.

1. 리앙코島인 독도를 한국의 울릉도를 설명하면서 등장시키고 있다. 독도를 울릉도의 속도로 묘사한 것으로써, 독도에 전복 채취를 위해 울릉도에서 출어하는 사람이 있으며, 물이 부족해 오랜 기간 독도에 머물지 못한다고 기록하였다. 이때 독도에 출어한 사람이 일본인인지 한국인지 알 수 없으나, 독도(리앙코도)를 일본령으로 보았다면 한국의 울릉도를 설명하면서 굳이 이 섬을 등장시킬 이유가 없다는 데에서도 한국주재 영사관은 독도를 한국령으로 보았던 것이 분명하다. 일본에서 역시 독도를 처음 발견한 후부터 울릉도의 속도로 인식했으며, 이러한 인식은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 독도는 어업에 있어서도 단독으로 이용하기에는 부적합하여 울릉도와 함께 이용되어 두 섬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1894, 1899, 1907년 울릉도의 속도로 독도를 묘사하여 조선수로지에 포함시킨 일본 해군의 기록과도 일치하는 것으로 당시 일본 정부가 독도를 한국령으로 인식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일본인의 독도에서의 강치잡이는 1903년부터 본격화된다. 1904년 일본 군함 니타카(新高)호의 기록에는 독도에 건너와 어로를 하는 사람이 일본인인지 한국인인지 정확히 특정하지 않고, 한인들은 그 섬을 독도라 부르고 일본인은 리앙코島라 부른다고 하여 한일 양측이 두 섬을 부르는 호칭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이때 한국과 일본의 어부 모두가 독도에 출어했을 가능성이 높다.1907년 조선수로지에서 역시 독도에서 강치잡이를 하는 어부를 일본인과 한국인을 구분하지 않고 島民이라 표현했다. 이것은 일본의 강치잡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03년 이후에도 일본인과 한국인 모두 독도에 출어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일본인만 독도에 출어했다면, 당연히 '本邦人' 혹은 '일본어부' 라고 기록했을 것이다.

 한국울릉도사정의 위 기록은 1902년의 보고서로 아직 일본인의 독도 강치잡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이다. 따라서 이때 독도에 나가 어업을 했던 사람은 한국인일 가능성이 높다.
1899년 9월 울릉도에 파견됐던 외무성 서기 이타카 유켄조(生高雄謙三)의 보고에 따르면 "현재 토착민의 인구는 2천여명, 5백 여세대로 농부와 어부가 각각 절반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울릉도사정에서는 1901년의 조사로 울릉도 한국인의 수를 3340명으로 기록해 2년 만에 1000명 이상의 급속한 인구증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중 절반 가까이가 어업에 종사했다면, 1902년 당시 독도에 출어한 사람은 한국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울릉도사정 본문에서 역시 독도에서의 강치잡이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전복이 산출된다고 했는데, 이에 관해서는 환영수로지 제2권 제2판(1886년 12월)에 울릉도를 설명하면서 그 산물로 전복을 거론하며, 조선인이 배를 제조해 이 물산을 본지에 보내고 다량의 갑각류를 수집해 말린다는 기록이 있어, 조선인의 어업 중 그 주류를 이루었던 것이 전복잡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때 독도에 출어한 어민은 한국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2. 특히, 이 보고서에는1902년 당시 일본이 독도를 松島라고 부른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명칭혼동을 이유로 19세기 말 죽도와 송도 두 섬을 한국령으로 기록한 일본의 자료를 부정하는 일본 측 주장과는 크게 대치되는 기록이다. 일본에서는 이미 1882년부터 울릉도를 松島라 부르기로 공식적으로 확정했다. 그러나 위 기록처럼 20세기 초까지도 일본 외무성에서는 독도를 일본인이 松島(마츠시마)라 한다고 기록했다.

3. 이 글에서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은 독도를 3개의 섬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는 동도와 서도 2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멀리서 독도를 바라보면 동도와 서도 이외에 탕건봉으로 말미암아 혹은 동도(東島)가 두 개의 봉우리로 나뉘어 있어서 어느 위치에서 바라보아도 3개의 봉우리가 뚜렷이 보인다. 따라서 독도를 삼봉도(三峰島)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었음을 이 기록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동도를 두 개의 섬으로 파악한 듯 하다.
성종실록의 삼봉도에 대한 기록은 이곳을 클릭.

일본해군의 군함신고행동일지(軍艦新高行動日誌) 속 독도

세 개의 봉우리가 뚜렷하다.

(사진자료; http://www.dokdo-takeshima.com/dokdo-navy.html)
Steve Barber씨의 독도 홈페이지

꼭 한번 방문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1860년에 그려진 독도의 모습(프랑스 수로지)

조선연안수로지(1933년)의 독도

이 이외 러시아와 일본 해군의 조선동해안도에서 역시 3개의 봉우리가 뚜렷한 독도의 그림을 싣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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