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해군의 수로지

 일본해군의 조선수로지

 일본해군은 1880년 3월부터 전세계를 대상으로 한 환영수로지(寰瀛水路誌)의 편찬을 시작했다. 그 가운데 한·러편인 제2권 제2판(1886년)에는 울릉도와 리앙쿠르트 列岩이 실려 있다. 이것은 세계의 수로지여서 그 귀속을 좌우하는 결정적 수단은 아니다.

그러나 1889년3월 이 수로지의 편찬은 중단돼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해역을 중시하는 방침으로 전환했다. 우선 일본영해를 구별해 '일본수로지'로 독립시키고 1892년부터 차례차례 간행했다.

 이 수로지에는 1895년의 시모노세키(下關)조약에 따른 일본의 신영토 대만과 澎湖島, 또 치토리(千鳥)열도 최북단의 占守島까지 실려 있지만 대만의 對岸이나 캄챠카반도는 전혀 포함돼 있지 않다. 즉 이 일본수로지의 취급범위는 어디까지나 일본의 영토·영해에 한정된 것이다.

그리고 중시할 것은 이 수로지의 동해(東海)항목에 리앙쿠르트섬(독도)를 전혀 언급하지 않은 점이다. 당시의 일본해도에는 동도의 위치는 정확히 그려져 있어 그 소재를 알지못한 것은 아니었다. 이 수로지의 1897년판 부도와 이섬이 일본영토에 편입된 후의 수로지 부도를 대조하면 사태는 명백하다. 즉, 1900년 시점에서 일본의 해군수로부 당국은 명백히 동섬을 일본령으로부터 제외하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 일본해군의'조선수로지' 1894년판과 1899년판에는 울릉도와 나란히 '리앙쿠르트 列岩'이 실려있다. 요컨대 19세기말에 일본해군의 수로부 당국이 독도를 조선령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또한 중요한 것은 리앙꼬루도 열암(「リヤンコ-ルト」列岩), 즉 독도를 울릉도를 설명하면서, 그 부속섬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에도막부시대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울릉도와 독도를 표기한 일본지도에는 예외없이 울릉도와 독도가 함께 등장한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일본지도상의 독도는 한국령임을 분명히 한 지도로 볼 수 있다.
 

 

위의 사진이 1883년, 아래가 1886년의 환영수로지

1883년 일본 해군 수로국에서는 일본 최초로 환영수로지(寰瀛水路誌)를 발행하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최초의 수로지인 환영수로지에서는 독도를 "리앙꼬루도 열암(「リヤンコ-ルト」列岩)"이라 하여 울릉도와 같은 항목에 넣어,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보고, "리앙꼬루도"암의 유래, 섬의 위치와 크기, 섬사이의 거리 등을 명시하고 있다.

1883년 3월 1일 , 환영수로지 제 2권 제 5편 조선동안(朝鮮東岸) 속에 "리앙꼬루도 열암(「リヤンコ-ルト」列岩)"(257-258쪽)

    1883년 환영수로지의 독도관련 부분.(크게보기 - 이미지 클릭)

1886년 12월 , 환영수로지 제2권 제2판을 발행하며, 제4편 조선동안(朝鮮東岸) 첫 부분 즉 397-398쪽에서, 독도에 관한 내용을 「リアンコ-ルト列岩」(리앙꼬루도 열암)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リアンコ-ルト’列岩

此列岩ハ一千八白四十九年佛國船‘リアンコ-ルト’號初テ之ヲ發見シ船名ヲ取テ‘リアンコ-ルト’列岩ト名付ケリ其後一千八白五十四年露國‘フリケ-ト’形艦‘パルラス’號此列岩ヲ‘メナライ’及ヒ‘ヲリヴツァ’列島ト稱シ一千八白五十五年英艦‘ホル子ット’號此列岩ヲ探險シテ‘ホル子ット’列島ト名付ケリ該艦ノ艦長‘フォルシス’曰ク該列岩ハ北緯三十七度十四分東經一白三十一度五十五分ノ處ニ位セル濯濯無産ノ二岩嶼ニシテ鳥糞當ニ嶼上ニ充積シ嶼色爲メニ白シ北西微西ヨリ南東微東ニ至ルト長サ共計約一里而シテ二嶼相距ル四分里一ナルモ疑ラクハ一礁脈アリテ之ヲ相連ルナラシ西嶼ハ海而上高サ四百十尺ニシテ形チ糖塔ノ如シ東嶼ハ較*低クシテ平頂ナリ此列島附近水頗ル深キカ如シト雖モ其位置恰モ函館ニ向テ日本海ヲ航上スル船舶ノ直水道ニ當レルヲ以テ頗ル危險ナリトス

リアンコ-ルト列岩(리앙꼬루도 열암): 이 열암은 1849년 프랑스 선박 「리앙꼬루도」호가 처음 발견하고, 배 이름을 따서 「리앙꼬루도 열암」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 후 1854년 러시아의 프리기트형 함선 「팔라즈」호는 이 열암을 「메나라이」와 「오리우짜」 열도라고 칭했다.

1855년 영국함정 「호르넷도」호는 이 열암을 탐험하고 「호르넷도 열도」라고 명명했다. 이 함정의 포르시즈 함장은 이 열암이 북위 37도 14분, 동경 131도 55분에 위치하는 두 개의 불모(不毛) 암서(岩嶼)로, 새 똥이 쌓여서 하얀 색을 하고 있다.

서북서쪽에서 동남동쪽으로 길이가 약 1리이고, 두 섬 간의 거리는 4분의 1리 정도이고, 초맥(礁脈)으로 연결되어 있다. 서쪽 섬은 표고 410척으로 모양이 당탑(糖塔)처럼 생겼다. 동쪽 섬은 이에 비해 낮고 평평한 정상으로 되어있다. 이 열도 부근은 수심이 깊긴 하지만, 그 위치가 하꼬다데(函館)를 향해 일본해를 항해하는 선박의 직수도(直水道)상에 있어서 상당히 위험하다. (397-398쪽)

1894년 11월일본 해군성은 1889년《환영수로지》 편찬을 중단하고, 이것을일본수로지(日本水路誌), 조선수로지(朝鮮水路誌) 등 국가영토별로 분류하여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독도(리앙코르드列岩)이《조선수로지》와 《일본수로지》 가운데 어디에 포함되는가는 일본 해군성이 독도를 어느 나라의 영토로 인지했는가의 척도가 된다.  

일본 해군성은 이때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간주하여《조선수로지》에 포함시키고《일본수로지》에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일본 해군성 수로국은《조선수로지》를 1894년에 최초로 편찬 발행했는데, 이때 독도를 ‘리앙코르드列岩’이라는 이름으로《조선수로지》 제4편 조선동안(朝鮮東岸)에 포함시켰다. 여기서는「울릉도(일명 송도)는 조선 강원도해안에 위치해 수목이 울창한 섬이고 죽서도는 울릉도 북동측에 바위로 이뤄진 섬」이라고 소개, 조선영토임을 기술하고 있으며, 앞 서 독도를 「リアンコ-ルト列岩」(리앙꼬루도 열암)이라는 이름으로 조선동안에 포함시켰다.(255~257쪽)

 

1894년의 조선수로지(朝鮮水路誌)

 

1899년 2월 , 조선수로지 제 2판이 발행되었는데, 이것은 1894년 제1판의 개정판이다. 제 4편 조선동안에 "리앙꼬루도암(「リヤンコ-ルト」列岩)" 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다.(263-264쪽)
 

リアンコ-ルト列岩

此列岩ハ洋紀一八四九年佛國船‘リアンコ-ルト’初テ之ヲ發見シ稱呼ヲ其船名ニ取ル其後一八五四年露國‘フレガット’形艦‘パラス’ハ此列岩ヲメナライ及ヲリヴツァ列岩ト名ツケ一八五五年英艦‘ホル子ット’ハ此列岩ヲ探險シテ‘ホル子ット’列島ト名ツケリ該艦長フォルシィスノ言ニ據レハ此列岩ハ北緯三七度一四分東經一三一度五五分ノ處ニ位スル二座ノ不毛岩嶼ニシテ鳥糞常ニ嶼上ニ堆積シ嶼色爲メニ白シ而シテ北西?西至南東?東ノ長サ約一里二嶼ノ間距離約二?半ニシテ見タル所一礁脈アリテ之ヲ連結ス○西嶼ハ海面上高サ約四一◦ 呎ニシテ其形棒糖ノ如シ東嶼ハ較低クシテ平頂ナリ○此列岩附近ハ水頗深キカ如シト雖其位置ハ實ニ函館ニ向テ日本海ヲ航行スル船舶ノ直水道ニ當レルヲ以テ頗危險ナリトス

리앙코르드列岩

이 열암(列岩)은 서기 1849년 프랑스 함선 ‘리앙코르드’號가 처음으로 이를 발견하여 함선의 이름(船名)을 취해서 리앙꼬루도列岩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 후 1854년 러시아 프레가트型 함선 ‘팔라스’號는 이 列岩을 마날라이 및 오리우사列岩이라고 칭하였다. 1855년 영국함선(英艦 )호르넷드호(號)는 이 열암(列岩)을 探險하여 호르넷드列岩이라고 이름 붙였으며, 함장 홀시스노의 말에 의거하면 이 列岩은 북위 37도 14분, 동경 131도 55분에 위치하는 두 개의 불모의 바위섬으로서 鳥糞이 항상 섬 위에 堆積하여 섬의 색이 이 때문에 하얗다. 北西微西로부터 南東微東에 이르는 길이는 약 1里이고 두 섬간의 거리는 0.25里로서 보이는 곳에 一礁脈이 있어 이를 연결한다. 西嶼는 해면으로부터 높이가 약 410?으로서 형상은 糖塔과 비슷하다. 東嶼는 이에 비교해 낮고 평평한 頂上으로 되어 있다. 이 列岩 부근의 수심은 상당히 깊을지라도 그 위치는 函館을 향하여 日本海(東海-인용자)를 항해하는 선박의 直水道에 當하므로 상당히 위험한 것이다.

1907년 3월에 조선수로지 제2개판이 발행되었는데, 이것은 조선수로지 제3판에 해당한다.제5편 조선동안은 1905년까지의 조사 결과들을 정리하였으며,  독도에 관한 기사도 종전의 것과 달리 편집되었다.

독도를“竹島(Liancourt Rocks)”로 나타내고, 한인(韓人)들은“獨島”라 쓰고, 일본인(日本人)들은“리양꼬島”라 하며, 매년 여름 물개 사냥을 하러 울릉도에서 온 수십 명의 사람들이 가건물을 짓고 매회 약 10일간 임시로 거주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시마네현 고시 제40호」 2년후에 해군성 수로부에서 간행한 조선수로지에는 울릉도를 반원형섬으로 수목이 울창하고 竹島[Liancourt rocks]는 한개의 바위로 이뤄진 섬으로 조선땅으로 표기하고 있다. (451-454쪽)

1911년 12월 개정된 조선수로지가 출판되었는데, 책의 제목이 일본수로지(日本水路誌) 제6권으로 변하였다. 1910년 대한제국이 문을 닫고, 일본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조선수로지가 일본수로지에 포함된 것이다. 명칭만 일본수로지로 바뀌었으며, 그 내용은 1907년 판과 거의 똑같다. 현재의 일본 외무성은《조선수로지》는 수로지이기 때문에 소속영토의 개념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일본 해군성 수로국은 세계수로지인《환영수로지》 체제를 해체하여 각국별로 수로지를 편찬할 때 국가영토별로 했으며,《조선수로지》는 조선영토의 水路를 묶어 편찬한 것이었다.

이 사실은 우선 일본 해군성 수로국은 조선이 독립국일 때까지는《조선수로지》를 독립해 편찬하다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조선수로지》 발행을 중단하고, 1911년부터는《일본수로지》에 포함시켜 제6권으로 편찬하면서 그것이 영토의 ‘병합’ 때문임을 밝히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본서(本書)는 조선전안(朝鮮全岸)의 수로(水路)로서 明治 43년 조선(朝鮮)을 我帝國에 병합(倂合)시켰기 때문에《日本水路誌》 第6卷이라고 題하여 간행(刊行)한다.

1933년 1월 , 일본수로부가 발간한 조선연안수로지(朝鮮沿岸水路誌)제1권 제3편 「조선동안」 86,87쪽에도 「울릉도와 죽도는 행정구역상 경상북도에 속해 있고 3개면 9개동으로 인구는 1만1천2백31명」이라며 한국영토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림자료: 독립기념관, 크게보기 - 이미지 클릭)

竹島: 이 섬은 東海上의 한 小群嶼로서 시마네현에서 대략 80해리, 鬱陵島에서 東南東方으로 約 50해리에 위치하며, 1련餘의 狹水道를 사이에 두고 東西로 相對하는 두 섬과 그 周圍에 碁布하는 幾多의 小嶼로서 이루고 있다. (제 92쪽 대면 대경도 제25와 제26 참조). 그 西方島는 海面上 높이 약 157m로서 棒糖形을 이루며, 東方島는 비교적 낮고 그 頂上에 平坦한 場所가 있으며, 또 주위의 諸小嶼는 대개 편평한 岩으로서 僅僅히 水面에 露出하여 그 중에서 큰 것은 수 십 평에 이른다. 두 섬은 모두 瘠瘦(척수)의 禿岩(독암)으로서 海風에 暴露되어 한 그루의 樹木도 없고, 東方島에 있어서 겨우 野草가 자라날 뿐이다. 또 島岸은 斷崖絶壁으로서 軟質의 石層으로 되어 奇觀의 洞窟이 많으며 거의 攀 (반제)치 못한다. 그리고 이 洞窟과 小嶼는 海驢의 群棲所이다. 이 섬 附近은 水深이 깊고, 東方島의 南端에서 北西方 約 9련의 곳에서 106m의 水深이었다고 한다. 然而나 이 섬은 그 位置가 東海를 항해하는 선박의 航路에 가까움으로써 夜間에는 危險하다. 島上의 平地: 島上은 平地가 적고 두 섬 간의 兩側에 狹隘(협애)한 平坦의 餘地가 2-3個所 있으나 모두 海濤의 侵襲을 不免한다. 東方島는 그 頂上에 平坦한 곳이 있으나 여기에 올라가는 徑地가 없으며, 다만 섬의 南端에서 北西風을 遮蔽하는 10-13 평방미터의 小平地가 있을 뿐이다. 西方島는 그 東西에 山崖가 있는데 그 상반부는 거의 直立하여 있으나, 하반부는 경사가 약간 완만함으로서 그 반까지 도달할 수 있으며 그 부근의 堅岩을 開鑿하면 東風이외의 諸風을 遮蔽할 수 있는 平地를 獲得할 수 있을 듯 하다. 島上에는 前記와 같이 家屋을 建築할만한 地域이 극히 稀少하다. 每年 夏季가 되면 海驢獵을 爲하여 鬱陵島에서 渡來하는 者가 수 십 명이라 하며, 또 春季로부터 和布(미역)及 전복 등의 採取로 수 십 명의 漁夫가 渡來하여 島上에 小屋을 만들어 每回 約 10일간 假居한다고 한다. 淡水: 西方島의 南西隅에 한 동굴이 있는데 그 天蓋를 이룬 岩石으로부터 摘出하는 물은 그 量이 若干 많으나 雨水의 滴下에 比等함으로써 汲取에 困難하다. 其他 山頂에서 山腹에 따라서 數個所에 適瀝하는 물과 湧水가 있으나, 그 徑路는 海驢의 糞尿로 因하여 종종 汚染되어 一種의 惡臭를 가지며, 도저히 음료수로는 적당치 않다. 海驢獵을 위하여 渡來하는 漁夫는 島中의 물을 汲取하여 煮炊(자취)함에 사용하나 飮料로선 他地方에서 渡來하는 것을 使用한다고 한다.

位置: 竹島의 東方島 南端은 1908년(檀紀 4241年)의 측정에 의하면 북위 37도 14분 18초, 동경 131도 52분 33초에 있다.

조선연안수로지에 수록된 울릉도(좌)와 독도(우)의 전경

1945년 6월 조선연안 간이수로지(朝鮮沿岸 簡易水路誌) 제1권 46~49쪽

해방직전인 1945년 6월 발행된 「조선연안」 제1권 제2편 47,48쪽에도 "죽도는 일본 시마네현에서 대략 86해리, 울릉도에서 동남쪽으로 약 50해리 떨어진 조선동해안에 딸린 섬으로 기술했다.

1952년 1월 해군본부 수로관실에서 간행한 韓國沿岸水路誌는 한국전쟁 중 급히 발행하느라 鬱陵島及竹島(獨島)라고 하였으며, 제1권에 있는 독도에 대한 설명이 있다. 우리말로 출판된 최초의 수로지 속에 담겨진 내용이지만, 한국전쟁이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긴급히 작성되어야 했기에, 내용은 거의 1933년 판을 우리말로 옮기는 수준이었다.

한국수산지(韓國水産誌, 1908)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설치한 한국통감부의 차관조차 독도를 한국땅으로 인정. 통감부(統監府)에서 1908년 간행한 '한국수산지(韓國水産誌) '에도 독도가 '다케시마'로 표기되어 있다. 즉, 통감부는 다케시마(竹島)를 한국의 영토로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대한제국 농상공부 수산국이 간행한 전4권의 '韓國水産誌' 제2권, pp.281~285에 수록된 기사(記事)로서 독도를 울릉도 등과 함께 강원도에 속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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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章 江原道 (…) 本道の地は 北緯三十六度三十九分乃至三十九度十分, 東經百二十六度四十一分乃至百二十九度二十九分 間に位しで(…)東方一帶日本海に沿へり. (…) 島嶼は 國島, 牛島, 猪島, 荒島, 松島, 竹島 , 無路島, 德山島, 卵島等ありで就中國島大なり. 竹島及無路島は箭竹の産地どしで名あり.」

제2장 강원도 (…) 본도(本島)의 땅은 북위 36도 39분 내지 39도 10분, 동경 126도 40분 내지 129도 29분 사이에 위치하여 (…) 동쪽 일대는 동해(東海)에 연(沿)하여 있다. (…) 도서(島嶼)는 국도(國島) , 우도(牛島) , 저도( 猪島) , 황도, 울릉도(松島) , 죽도(竹島 ), 무로도(無路島) , 덕산도(德山島) , 앙도(卵島) 등이 있으며, 그 중 '국도(國島)'가 크다. 竹島 및 무로도(無路島)는 전죽(箭竹, 화살대)의 산지(産地)로서 이름이 있다.

주; 여기서의 竹島가 독도를 지칭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죽도가 전죽(箭竹)의 산지로서 명성이 있다는 설명으로 보아, 울릉도 북동쪽의 Jukdo(竹嶼島)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한국수산지의 울릉도지도에는 댓섬인 Jukdo를 일본식 명칭인 竹嶼島(죽서도)로 표기하고 있다. 또한 1907년의 조선수로지를 보면, 일본정부는 시마네현 고시 이후, 독도를 竹島(다케시마)로 호칭한 것이 틀림없으나, 그 이후에도 松島와 竹島의 명칭은 혼동되고 있는 사례가 적지 않았으며, 독도를 "리앙꼬루도암(「リヤンコ-ルト」列岩)"으로 호칭하는 경우도 많았다.

 한국수산지에서의 竹島가 어떤 섬인지는 정확히 특정할 수 없다고 보인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 글에서의 竹島가 울릉도, 松島가 독도를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분명한 것은 1908년,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독도의 호칭이 다케시마(竹島)였다는 것이며, 전통적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일컫는 명칭이 竹島와 松島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당시 농상공부 차관이며 통감부 참여관(參與官)이었던 기우치쥬지로(木內重四郞)가 이 책의 서문에서 '수산국 관리들이 (조선) 13도의 연안, 도서 및 하천을 돌아다니며 수산에 관한 실상을 조사하여 이사청(理事廳)과 수산조합소속의 기술원과 협력해서 족답(足踏)하기 일년 남짓, 이리하여 수집한 재료의 경개(梗槪)를 기록하여 제목을 붙인 것이 한국수산지라고 한다'고 설명한 점으로 볼 때 이는 통감부의 공식적인 견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수산지에는 울릉도 전도(제3책 제3장 경상도편 제15절 鬱島郡704~705p)가 소개되어 있다. 주목할 만한 사항이 관음도에 鼠項島(서항도)라는 명칭이 붙여져 있다는 것이다. 이 울릉도 전도에는 댓섬인 죽도의 명칭이 일본식 명칭인 竹嶼島(죽서도)로 표기되어 있는 것을 제외하면,  亭石浦(정석포), 孔岩(공암), 羅洞(나동,羅里洞)등의 한국식 명칭이 붙여져 있어, 鼠項島(서항도)는 대한제국 당시 관음도의 본래 명칭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島項이라는 한국식 명칭에 대해서 일본측에서 부여한 새로운 명칭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竹島라는 한국식 명칭이 竹嶼島(죽서도)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당시 이규원의 계본초와 같이, '관음도'에는 섬의 분명한 명칭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일본측 주장대로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의 石島가 '관음도'가 될 수 없는 근거이다.

이렇게 볼 때 일본이 주장하는 1905년 무주지 선점을 바탕으로 한 소위 시네마현 고시에 의한 독도 영유권 주장은 명백한 허구임이 입증되며, 일본 스스로도 권위있는 정부간행물인 해군성 수로지에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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