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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gie(Steve Barber)씨의 독도 홈페이지는 아래 주소입니다.
http://www.dokdo-takeshim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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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
 
죽도~송도 사이의 거리
 
한국기록과 대조해볼 점
 
서계의 존재 확인

이외 '안용복의 子山島"가 현재의 독도임을 증명해주는 자료
  
태정관의 지령서와 조선국교시말내탐서
  
숙종실록의 사료적 가치
  
于山則倭所謂松島也의 한국 측 기록
  죽도 도해 금지와 일본의 독도 명칭 혼동과의 관련성

일본 분야도(日本分野圖)

죽도송도지도(竹島・松島之圖)

  이번 글에서는 안용복 관련 내용을 다루겠습니다. 언급할 내용이 많으니, 토론내용은 싣지 않겠습니다.

변례집요(邊例集要 卷 17 鬱陵島條) 안용복과 박어둔의 비변사 심문내용

 토론 중에 안용복의 '우산도'는 현재의 독도가 아니라는 발언이 심심치 않게 등장합니다. 그 근거 중 하나로서 제시하는 것이 '변례집요'의 다음 문장입니다.

(민족문화추진위원회에서 국역한 책이 있다는데, 이 부분이 실려있는지는 모르겠네요. 제가 직접 번역합니다. 매끄럽지 못하더라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혹 본문내용을 크게 손상시킬 수 있는 번역이 발견되면 홈 게시판에 연락 바랍니다. 원문은 국사편찬위원회의 기록을 바탕으로 합니다. 독도문서자료실에는 원문과 해석본은 현재 가진 국역본만을 올립니다. 이곳을 클릭)

아마도 안용복이 말하는 우산도는 "안용복이 본래 죽도(Chukdo)를 우산도로 착각하고 있었는데, 1차 일본 도항때, 오키섬를 보고 우산도로 착각했다. 따라서 안용복의 우산도는 독도가 아닌 죽도(Chukdo)로 착각한 오키시마(隱岐島)로 안용복의 진술은 신뢰할 수 없다." 라는 시모조 마사오(下條正男)교수의 낭설에 기초한 것으로 보입니다.

용복의 子山島는 그 후대의 기록에서 숙종실록과 동일내용을 서술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울릉도사실변증설, 성호사설 등에서는 芋山島로 바로잡혀 있습니다.

竹島被捉罪人蔚山居朴於屯·安龍福處,發問目推問,則朴於屯招內,癸酉三月,租二十五石·銀子九兩三錢等物,載持貿魚次,自蔚珍向三陟之際,漂風到泊於所謂 竹島 ,

竹島(울릉도)에서 납치된 '울산'사는 박어둔과 안용복에게 문목(問目)을 만들어 추문(推問)한 즉, 박어둔을 (비변사)안으로 불렀다. (박어둔은) 癸酉(숙종 19년) 3월 조(租) 25섬, 은자(銀子) 9냥 3전 등을 싣고 울진(蔚珍)에서 삼척(三陟)으로 향해갈 즈음, 바람에 표류하여 소위 죽도(竹島)에 닿았다.

而竹島至於伯耆州遠近事段,矣身留駐本島第三日,倭人七八名,不意中乘船來到,執捉矣身,仍自其島,發船經三晝四夜之後,始達伯耆州爲白乎旀,竹島大小周回段,其大,較之於釜山前洋影島,則二倍有餘是白遣,周回則不能詳知,而所見極廣濶是白乎旀,

竹島(울릉도)에서 백기주(伯耆州)까지 가는 멀고 가까운 사단(事段)이 된 것은  본도에 머물러 있은지 3일째에, 왜인 7,8 명이 뜻밖에 배를 타고 와서, 붙잡아 간 일이었다. 이에 그 섬으로부터 배를 출발하여 사흘 낮 사흘 밤(三晝四夜)이 지난 후, 비로소 백기주에 도착했다. 竹島는 크고 작은 둘레 단(段)이 그 크기가 부산 앞바다의 '절경도'에 비교해서 2배가 되고도 남으리라 했는데, 그 주회(둘레)는 상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눈으로 보기에 극히 광활하다고 한다.

山形段,山有三峯,高峻接天是白遣,其餘多是平廣之地,而川水,流出於海是白乎遣,樹木·芦竹·禽獸等物段,有柯重木·柄子木·香木,又有冬栢木是白遣,有大竹,其節甚長,其圍甚大,而直聳叅天是白遣,又有箭竹是乎旀,島中人戶居住事段,卽今雖無居住之人戶,而遺基礎石相連,而空基,多有生蒜之處是白乎旀,本島去伯耆州水路里數事段,矣身被捉入去之時,得水疾,僵臥船中,只 記其三晝四夜之後,得達 伯耆州,而水路里數,不能詳知是白乎旀,此島前後,更無他島云云,安龍福招內,山形草木等辭緣一樣,而末端良中,矣身被捉入去之時,經一夜,翌日晚食後,見一島在海中,比竹島頗大云云,緣由馳啓。

 산의 형상은 3개의 봉우리가 있어 높고 가팔라 하늘에 닿아있으며, 그 나머지는 대부분이 평평한 넓은 토지이고, 물이 흘러 바다로 빠져나간다. 수목(樹木)·금수(禽獸) 등 물단과  가중목·병자목·향목, 또한 동백목이 있으며, 대죽(大竹)은 그 마디가 심히 길며 둘레가 매우 굵고, 기초석이 남아있어 서로 이어져 있으나 터는 비어 있으며, 생마가 나는 곳이 많다고 아뢰었다. 본도(本島)에서 백기주로 가는 수로 리수(水路里數)가 얼마나 되는지는 상세히 알지 못한다고 했는데, 납치되어 갈 때, 뱃멀미를 하여 배 안에 쓰러져 있었기에 단지 三晝四夜후에 백기주(伯耆州)에 도착했다고 기록한다. 이 섬 전후에 다시 다른 섬이 없다고 운운하여, 안용복을 (비변사)안으로 불러, 산의 형태와 초목 등의 모양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야기)끝머리에 잠시, 붙잡혀 갔을 때에 하룻밤이 지난 다음날 늦은 식후에 바다에서 한 섬을 보았으며, (그 섬은) 죽도(울릉도)에 비해 크다고 운운했다. (이상과 같은) 연유의 보고서를 올린다.

 안용복의 1차 일본행(1693.3.18~1693.12.10)때, 그는 일본 어선에 납치되어 요나고(米子)에 구류돼 6주간의 심문을 받습니다. 안용복을 납치한 오오야(大俗)·무라까와(村川)가문 사람들은 돗토리번(島取藩)에 안용복에 관한 선후처치를 요구했죠. 이에 돗토리번(島取藩)은 그 사실을 막부에 보고했고 막부는 "울릉도와 자산도는 일본의 땅이 아니다"라는 서계(書契)를 돗토리번주(島取藩主)에게 써 주게 하여, 나가사키(長崎)·대마도(對馬島)를 거쳐 1693년 12월, 조선으로 안용복을 돌려 보냅니다. 변례집요의 이 기록은 안용복과 박어둔의 조선에서의 비변사 심문내용입니다.

증보문헌비고에는 서계에 울릉도만 기록된 것으로 적고 있으며, 숙종실록에서의 안용복은 울릉도와 자산도 모두를 조선령으로 인정했다는 서계의 존재를 진술합니다.

안용복의 이 진술이 일본 측에서는 거짓임을 주장하고 있으나, 그 진술의 신빙성은 안용복이 요나고에 납치된 시점과 떠날 때, 일본 측으로터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주목하면, 쉽게 판가름이 납니다. 즉 안용복은 요나고(米子)에서 6주간의 심문을 받죠. 그러나, 나가사키(長崎)를 통해 귀국시키라는 막부의 명령이 있은 후, 돗토리번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안용복을 일부러 불러 호의를 표시했으며, 호송할 때는 사자(使者)와 수행원은 물론 의사와 요리사까지 대동시켰고, 수행하는 사자들을 저택으로 불러 주의사항과 청구서 등을 건네줄 정도였습니다. 안용복의 진술이 거짓이라고 판단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위 기록에서 안용복은 죽도(울릉도)에서 호키슈까지 가는 길에 하룻밤이 지난 다음날 늦은 식후에 바다에서 한 섬을 보았는데 이 섬이 죽도보다 크다고 했다는 기록이 나오죠. 대충 계산해 봐도 안용복의 발언으로는 거리상 분명 독도로 보입니다. 그러나, 발언 내용상으로는 온슈(隱州)입니다.

그러나 '안용복이 말하는 우산도'는 절대 될 수 없죠. 아래 소개하는 신발견된 문서로 이 주장은 그 명맥을 다했습니다.

우선, 울릉도보다 큰 섬이라고 했어요. 울릉도~ 호키슈(伯耆州)까지 가는 길목에 울릉도보다 큰 섬은 오키도 밖에 없죠. 만일, 오키도가 아니라면, 안용복이 환상의 섬을 본 것이죠.

 일본에서 독도는 일본령이라 외치는 골수왜곡분자 한사람이 있죠. 위에서 언급한 시모조 마사오(下條正男) 교수입니다. 오키에서 무라카미(村上) 가문이 소장하고 있던 새 문서가 발견됨으로써, 어느새 안용복의 우산도는 현재의 독도라 기술한 구절이 실린 글을 썼다네요. 그럼, 2005년에 발견된 이 문서의 내용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록구병자년조선주착안일권지각서(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

 이 문서는 안용복일행이 제2차 일본행에서 오키도에 표류해 오키도 관리의 심문을 받은 내용이 담긴 기록으로 2005년 5월 토바 천황(鳥羽天皇) 화장묘지지기 가문인 무라카미(村上) 가문의 村上助九씨가 자택의 창고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산인추오신보(山陰中央新報)에 기사화 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죠.(이 기록에서는 안용복의 통역으로 심문이 진행됩니다.)

문서 전문·해석본

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와 안용복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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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와 안용복 B

'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의 내용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합니다.

安龍福申候ハ竹嶋ヲ竹ノ嶋とと申朝鮮国江原道 東萊府ノ内鬱陵嶋と申嶋御座候是ヲ竹ノ嶋と申由申候 則 八道ノ圖記之所持仕候松嶋ハ右同道之内子山と申嶋御座候是ヲ松嶋と申由是も八道之圖記申候

(생략)

一、安龍福申候ハ 私乘参候船ハ拾壱人伯州参取鳥伯耆守樣御断之義在之罷越申候 順総布候而当地へ奇申候 順次第泊州渡海可仕候 五月十五日竹嶋出船 同日松嶋着 同十六日松嶋ヲ出 十八日之朝隱岐嶋之內 西村之磯ヘ着 同二十日大久村入津仕候由申候 西村之磯荒磯而御座候付 同日中村入津是□之惡候故 翌十九日彼所出候而同日晩 大久村之內かよひ浦と申所舟懸リ仕二日大久村参懸リ居申候
一、 竹嶋と朝鮮之間三十里竹嶋と松嶋之間五十里在之由申候
一、 安龍福ととらべ 武人四年已前酉夏竹嶋而伯州之舟被連まいリ候とらべも此度召連参り竹嶋殘置申候
総布;  돛이 옛날에 면포나 마포였음을 고려하면 돛이 바람을 듬뿍 받은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보임.
布: 다케시마 연구회에서 공개한 자료에는 布로 되어 있음. 강한 바람을 만나 돛이 꺾였다는 뜻으로 보이므로 강풍에 표류했다는 뜻임.


안용복은 "죽도를 竹의 섬이라고 하는데, 조선국 강원도 동래부 안에 있는 울릉도이다. 竹의 섬이 그려진 팔도의 지도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송도는 위 팔도 가운데 자산이라는 섬이 있는데, 이것을 송도라고 한다. 팔도지도에 기록되어 있다.(생략)

一、안용복이 말하기를 자신이 타고 온 배의 11人은 호키(伯耆)에 가는데, 돗토리번(鳥取藩)의 호키(伯耆) 노카미(守様)에게 "결단할 뜻"이 있어(소송을 하러) (국경을)넘어 왔다고 한다. 순풍을 만나 바람을 듬뿍 받아 당지(오키도)에 들렀다고 한다. 그다음에는 호키로 항해할 예정이다.
다음에 안용복은 호키守様에게 소송을 하러 왔다는 뜻을 직접 밝히며, 오키의 재번역인은 하쿠슈(伯州)에 소송을 하는 이유를 써내도록 요구한다. 따라서 이 말은 "소송을 하려고 왔다"는 뜻이다.

5월 15일 죽도를 출항, 같은 날 송도에 도착하고, 16일에 송도를 나와 18일 아침에 오키의 니시무라(西村)의 해변에 도착해 20일 오오쿠무라(大久村)의 나루에 들어왔다 한다.

니시무라(西村)해안은 파도가 몰아치는 거친 해변(荒磯)이었기 때문에, 18일 나카무라(中村)나루에 들어갔는데 이 항구는 처음 들렀으므로, 다음날인 19일 그곳에서 나와 그날 밤늦게 오오쿠무라(大久村)의 카요히 포(浦)라고 하는 곳에 배를 멀리 대 놓았다가 20일 오오쿠무라(大久村)에 배를 대고 머물렀다고 한다.

一、죽도와 조선 사이는 30리며 죽도와 송도 사이는 50리다.
一、안용복과 토리베(박어둔) 두 사람은 4년전 유년(酉年)의 여름에 죽도에서 호키의 배로 끌려갔는데 이때 같이 끌려간 토리베는 죽도에 남겨두고 왔다고 한다. 

여기서 4년 전은 1692년 이지만, 酉年은 1693년이다.

 위 기록을 보죠. 5월 15일 竹島(울릉도)를 출발해 같은 날 松島(독도)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송도를 떠납니다. 변례집요에서 안용복이 보았다는 竹島보다 큰 섬이 안용복의 우산도가 아님은 분명해졌죠. 즉, 오키를 본 것이죠. 또한 우산도가 송도(독도)임이 명백해집니다.

 이 문서의 가치는 안용복이 말하는 子山島가 일본에서 독도를 부르던 松島임을 분명하게 증명해 주고 있다는 것이죠. 일본 측 주장대로 죽도(Chukdo)이거나 관음도가 될 수는 없습니다. 안용복은 "죽도와 송도 사이의 거리가 50리"라고 했습니다. 이 문서를 통해, 그동안 일본 측에서 주장해 왔듯이 안용복이 말하는 우산도가 관음도나 죽도는 절대 될 수 없다는 것이 일본 측 기록에서도 확인됩니다. 관음도와 죽도가 아니라면 동해상에 존재하는 섬은 독도밖에 없죠. 아직도 관음도나 죽도로 주장하고 싶다면, 이 기록을 없애 버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면 일본의 독도 옛명칭을 송도라 기록한 모든 기록을 없애야 합니다.


죽도~송도 사이의 거리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습니다. "竹島~松島 사이의 거리가 50里"라고 했습니다. 안용복이 일본어에 능통했으며, 이 문서가 일본 관리가 직접 기술한 것임을 고려하면 여기서의 1里는 4km입니다. 숙종실록에도 오키도를 '玉岐島'라는 일본식 명칭으로 발언한 안용복의 발언이 실려 있습니다. 일본에서 에도시기인 이때에도 해상에서의 1里를 1海里(1해리=1.852km)로 계산하는 사례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里를 1海里로 계산했을 때, 92.6km로 실제거리 87.4km와 거의 일치하네요. 하지만, 일본에서 해상에서의 거리에 1海里를 적용한 것은 이보다 좀 더 후의 일입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1里는 약 4km로 계산해, 50里는 약 200km 정도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동시기의 돗토리번의 고지도(1696년 제작)에서도 竹島~松島 사이의 거리를 40里, 松島~오키도까지를 60里로 표기했습니다. 이 거리를 1里를 4km로 해서 계산했을 경우, 각각 160km(竹島~松島)와 240km(송도~오키도)가 돼서 실제거리와 큰 차이가 나는 터무니없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러나 돗토리번 고지도를 보니 雲州 雲津浦~oki를 18里라 표기 했는데, 1里를 4km로 본다면 72km입니다. 그런데, 실제 거리를 지도를 통해 대충 계산해 보니 130km가 약간 넘더군요. 에도시기 부정확한 거리 표기에서 이와 같은 오차가 생긴 것입니다. 따라서, 안용복의 발언에서의 1里는 저도 혹 1海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4km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돗토리번의 고지도는 oppekepe7의 홈페이지를 참조


한국기록과의 차이점

울릉도~松島까지 가는데 걸린 시간의 문제

 그런데, 위 기록에서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죠. 울릉도~松島까지 가는데 걸린 시간에 관한 것입니다. 기록에서는 '하루 안'에 도착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일본 측에서 이 거리를 문제삼을 수 있겠네요.

비슷한 시기에 편찬된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1667년)에는 竹島(울릉도)~松島(독도)까지의 거리가 배를 타고 1일정도 걸린다고 했습니다.
"
戍亥間行二日一夜有松島、又一日程有竹島"
"(오키도에서)
북쪽으로 배로 두 낮 하루밤 거리를 가면 송도(당시의 독도)가 있고, 송도(松島, 독도)로부터 하루낮 거리에 죽도(竹島, 울릉도)가 있다"

 은주~독도까지(A)가 157.5km이고, 울릉도~독도까지가 87.4km로 그(A의) 절반을 조금 넘는 거리입니다. 그럼, 울릉도~독도까지는 은주~독도까지 2일 걸렸다는 내용에 비추어, 충분히 하루안에 갈 수 있는 거리라는 계산이 성립하죠. 바다에서 바람만 잘 만나면 그 항해시간은 크게 단축이 됩니다. 또한 위 기록에서 안용복일행은 순풍을 만나 오키에 들렀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도 충분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역풍만 아니라면 충분히 가능한 것이죠. 여기에 당시 조선의 선박 제조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고 평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 안용복이 하루만에 울릉도(竹島)에서 송도(독도)까지 갔다는 기록은 분명한 사실로 보입니다. 또한, 울릉도 주위의 죽도(Jukdo)가 그가 말하는 우산도가 아니라는 사실도 함께 엿볼 수 있죠. 죽도(Jukdo)는 울릉도에서 최단거리로 약 2km 이내에 있는 곳에 있어서. 안용복 일행이 하루밤을 기거할 곳이 전혀 못됩니다. 만일 왜인을 쫓아 들어간 섬이 죽도(Jukdo)라면, 하룻밤을 보낼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거리에 관한 기록은 전혀 문제 삼을 것이 못됩니다.

송도(독도)를 떠난 시기

 문제는 송도에 도착 후, 그 다음 날인 16일 떠났다는 기록입니다.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떠났다는 기록과 달리 숙종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倭等收聚載船 擧帆回去 渠仍乘船追趂(왜인들이 거두어 배에 싣고서 돛을 올리고 돌아가므로, 곧(이에) 배를 타고 뒤쫓았습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안용복은 이 조사서에 언급되어 있듯이 돗토리번에서 받은 막부의 서계를 품속에 간직하고 있었으며, 팔도지도 8매(枚)까지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팔도지도와 같은 것을 당시에는 아무나 소유할 수 없었죠.
일본에 항의할 모든 준비를 해서 일본으로 간 것이죠. 이렇게 대규모 선단(선원 수 40여 명의 규모
)을 꾸렸다는 것을 보아 안용복의 제2차 일본으로의 도해는 사전(事前)에 계획된 것임이 분명합니다. 서둘러 松島에서 왜인을 좇을 이유가 전혀 없었죠. 이 기록과 숙종실록의 안용복의 발언은 모든 면에서 서로 일치하고 있습니다.

인부연표 1696년 6월 4일조의 기록을 보면 32척의 대선단을 꾸려 울릉도로 향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 기록은 안용복이 직접 조직한 선단만이 아니라 다른 조선인의 배 또한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숙종실록의 40여 명의 규모로 기록된 것은 처벌받을 것을 의식해 안용복 일행이 축소해 진술한 것으로 보이며, 이에 관해서는 위 안용복일행조사서의 기록이 정확한 것으로 생각된다.
 
一、舟数十三艘ニ 人壱艘九人十人十壱人十弍三人十五人程宛乘リ竹嶋迄※參候由 人数之高問候も一圓不申候
 
一、배의 수는  13척. 사람은 1척에 9명, 10명, 11명, 12·3 명, 15명 정도씩 승선하여 죽도에 이르렀다 한다. 사람數  를 물으니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한 배에 12명씩 승선한 것으로 계산하면 안용복은 약 144명 정도의 인원에 배 13척의 선단을 꾸려 울릉도로 향한 것이다.

숙종실록의 안용복의 "渠仍乘船追趂"라는 짧은 언급으로는 안용복이 송도를 바로 그날 떠났는지 다음 날 떠났는지 특정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渠仍는 "이에" 정도로 해석이 되며 또는 아예 생략하고 해석을 해도 크게 잘못된 해석이라고 보이지 않는군요.

만기요람에는 이 부분을 "倭大驚走 龍福轉至伯耆州 言其狀 (왜인들은 매우 놀라 달아나 버렸다. 용복은 그 길로 백기주(伯耆州)로 가서 그 사실을 말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倭擧帆走 龍福追之 漂迫于玉岐島 轉至伯耆州(왜인들이 돛을 올리고 달아나므로 용복이 뒤쫓아 가는 도중 옥기도에 표류하다가 다시 백기주에 당도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증보문헌비고에는 이 부분 기록이 생략되어 있고, 바로 백기주에 도착한 것으로 되어 있네요.
 
모든 기록에서 안용복의 진술은 긴 시간의 여정을 축약해 발언한 것으로 보아 사실 이 부분 기록도 별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안용복이 받았다는 서계의 존재 확인

 이 문서상 한가지 더 중요한 사실이 등장합니다. 바로 안용복이 1차 일본행에서 에도 막부로부터 받았다는 서계(書契)의 존재입니다. 일본 측에서는 안용복을 거짓말쟁이로 몰아 서계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일본 측 기록에 서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이유가 가장 큽니다.

 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에는 1693년 그가 에도막부로부터 받았다는 서계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있습니다. 소송할 이유로써 서부(書付)를 제시한 것으로 보아 안용복의 1차 일본행때 막부로부터 받은 서계가 분명합니다. 오키도 관리는 그 서부를 베껴 써, 필사본을 호키슈(伯耆州)에 전보(轉報)하겠다고 합니다. 이 기록 역시 숙종실록의 안용복의 발언과 일치하죠.

一, 四年以前癸酉十一月日本而被下候物共書付帳壱冊出シ申候則写之申候

 4년 전인 癸酉년(1693년) 11월 일본에서 받았던 서부(書契) 한권을 품 속에서 꺼냈다. 그리고 (오키도 관리가)그것을 필사했다.

書付(다케쯔케); "江戶時代、 將軍や 老中の命令を傳えた公文書" (에도시도에 장군이나 노중(老中)의 명령을 전하는 공문서)-일본어 사전 코지엥의 기록

 계유년은 원록 6년으로 울릉도에서 요나고(米子)로 안용복이 연행된 시기와 일치합니다. 안용복은 제1차 일본행에서 에도막부 간파쿠(關白)의 명에 따라 돗토리번(島取藩)으로부터  "울릉도와 子山島가 영구히 조선에 속한다"라는 書契와 은화(銀貨)를 받았는데, 대마도(對馬島)에서 빼앗겼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안용복의 서계는 안용복이 만들어낸 거짓말이라고 해 왔죠.

이 에도시대 막번체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 주기합니다. 에도시기 에도(江戶)막부는 전국의 약 1/4에 해당하는 넓은 영지(領地)외에도 교토(京都), 오오사카(大坂), 나가사키(長崎) 등의 주요한 도시를 직접 지배했습니다. 또한 도쿠가와(德川) 일족과 가신(家臣:후다이 다이묘)에게는 영지를 나누어 주었는데 이를 藩(한)이라 합니다. 因幡과 伯耆는 당시 돗토리번(島取藩)의 관할이었습니다.

 안용복이 관명을 사칭했고, 조선정부에서 죄인으로 처벌을 받았다는 이유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었죠.[가와카미 겐조(川上 健三)] 그러나, 숙종실록에는 안용복의 공을 일정부분 인정하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가 처벌을 받은 죄목(罪目)은 관직 사칭과 국가의 허락 없이 국경을 넘었다는 월경죄에 불과합니다. 울릉도와 우산도에 대한 그의 행동에 대해서는 어느 기록에서도 그의 죄에 포함한 기록은 없습니다. 오히려 안용복의 공(功)으로 울릉도를 지킬 수 있었기에 참형을 면하고 유배형에 처해지게 되죠. 따라서 죄인의 발언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믿을 수 없다는 가와카미 겐조씨의 의견은 조금 황당한 주장으로 보이네요.

 일본 측 기록에는 안용복이 언급한 서계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특히 죽도고(竹島考)에는 돗토리번주(島取藩主)에게 막부가 "앞으로 조선인이 竹島에는 건너오지 못하게 잘 설득하라고 명령했다"는 한국 측 숙종실록이나 증보문헌비고의 기록과는 사뭇 다른 내용이 등장합니다. 이건 죽도고에서 왜곡한 기술내용으로 보입니다. 안용복은 돗토리번에 있을 때, 귀빈대접을 받습니다. 막부에서 돗토리번에 이런 명령이 내려왔다면, 안용복을 후히 대접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설명이 안되죠. 일본 막부에서 竹島(울릉도)와 松島(독도)를 일본령으로 간주했다면, 안용복은 함부로 일본 영토에 침범한 죄인이 됩니다. 이런 죄인을 최고로 후대했다면, 표류민에 준하는 대접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용복은 돗토리번에서 나가사키(長崎)로 호송될 당시, 한 국가의 사신에 준한 대우를 받습니다.

 안용복이 에도막부로부터 받았다는 서계의 존재는 숙종실록 숙종20년(1694년) 8월 14일조 기사를 통해서도 그 존재가능성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遂以張漢相爲三陟僉使 接慰官兪集一 受命南下. 盖安龍福朴於屯 初至日本 甚善遇之 賜衣服及椒燭以遣之 又移文諸島 俾勿問 而自長碕島 始侵責之 對馬島主書契 竹島之說 是爲他日徼功於江戶之計也. 集一問龍福 是得其實 乃喝倭差曰 我國將移書于日本 備言侵責龍福等之狀 諸島安得無事 倭差相顧失色 始自折服.

드디어 장한상(張漢相)을 삼척 첨사로 삼고, 접위관 유집일(兪集一)이 명을 받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대개 안용복(安龍福)과 박어둔(朴於屯)이 처음 일본(日本)에 갔을 적에 매우 대우를 잘하여 의복과 호초(胡椒)와 초[燭]를 주어 보냈고, 또한 모든 섬에 이문(移文)하여 아무 소리도 못하게 했는데, 장기도(長碕島)에서 침책(侵責)하기 시작했다. 대마 도주(對馬島主)의 서계(書契)에 ‘죽도(竹島)’란 말은 곧 장차 강호(江戶)에서 공을 과시하기 위한 계책이었는데, 유집일이 안용복에게 물어보자 비로소 사실을 알았다. 그제야 왜차(倭差)를 꾸짖기를,

 “우리 나라에서 장차 일본에 글을 보내 안용복 등을 침책(侵責)한 상황을 갖추어 말한다면, 모든 섬들이 어찌 아무 일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니, 왜차들이 서로 돌아보며 실색(失色)하고 비로소 스스로 굴복하였다.

 숙종실록의 이 기록은 너무도 중요한 대목입니다. 접위관 유집일(兪集一)이 안용복에게 물어본 결과 안용복과 박어둔은 처음에는 일본에서 대우를 잘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가사키 도주(長崎島主)와 대마도주(對馬島主)가 안용복 등을 침책(侵責)했으며, 대마도주 등이 울릉도를 점거할 계책으로 ‘竹島’ 운운하고 나서는 것은 에도(江戶)의 간파쿠(關白)의 뜻이 아니라 대마도주(對馬島主) 등이 후일 에도(江戶)에 (울릉도를 탈취한) 공(功)을 세우려는 생각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되었다고 했죠, 이 사실을 알게된 접위관은 대마도측의 부당한 행동을 에도의 간파쿠에게 알리겠다고 위협하여 대마도측을 굴복시키고 있습니다.

 왜 倭差들은 안용복의 일을 거론한 유집일의 물음에 실색(失色)하며 굴복했을까요? '竹島가 일본령'이라 쓰인 일본 측 외교문서는 에도막부의 뜻이 아닌 대마도주의 계략으로 고쳐 써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에도막부는 竹島인 울릉도가 조선령이라는 인식이 분명했던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에도막부가 안용복에게 '울릉도와 자산도가 조선령'이라는 서계를 만들어 주었을 충분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되죠. 또한 거짓말쟁이는 안용복이 아니라 대마도의 왜인들이었던 겁니다.

 이런 일본 측 주장에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린 것이 바로 오키도에서 발견된 '안용복 일행 조사서'입니다. 기록에서와 같이 안용복은 서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 서계를 오키도에서 필사했다는 기록까지 등장합니다. 막부에서 파견된 오키도의 관리가 확인을 했다면, 그 존재는 부정할 수가 없게 되죠.

 이 문서의 발견으로 적어도 안용복의 발언이 실린 한국기록상 서계의 존재가 일본 측 기록에서도 확인된 셈이죠. 서계가 현존하지는 않지만, 일본 측 또 하나의 안용복 거짓말 주장이 그 설자리를 잃게 된 것입니다.

 안용복은 숙종실록(숙종 22년 9월 25일條)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하고 있습니다. '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의 안용복의 발언내용과도 일치합니다.

玉岐島에 漂泊 하였다. 옥기도주가 들어온 이유를 물었으므로 말하기를 지난해 내가 이곳에 들어와서 鬱陵 子山 등의 섬을 朝鮮의 界로 정하여 關白의 書契가 있기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이 나라는 定式이 없어서 이제 우리의 경지(我境)를 또 침범하니 이것은 어떠한 도리인가고 하였습니다. (옥기도주는) 마땅히 伯耆州에 전보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래 기다려도 (伯耆州로부터는) 소식이 없었습니다. 저는 분을 이기지 못하여 배를 타고 곧장 伯耆州로 향하였습니다.

 이 이외 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에는 안용복 일행이 타고 온 배와 배안에 실려있던 화물, 안용복과 僧 뇌헌(雷憲), 이비원(李裨元), 김가과(金可果), 연습(衍習) 5人과 안용복이 탄 배의 승선인원 11人 전원에 대한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안용복 등 5人의 차림새, 지닌 물건, 나이까지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특히 법왕사(法旺寺) 주지인 뇌헌(雷憲)과 그의 제자인 僧 5인에게 어느 종파인지 묻는 재미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또한, 안용복 측은 하쿠슈에 소송을 하러 가는 이유를 글(訴訟一卷)로 써 제출하였고, 이 문서는 세키슈(石州)에 전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오키도는 막부가 직접 관리하던 곳으로 여기서의 오키의 관리는 이와미국(石見國) 오오모리 대관소에서 파견 나와 있었습니다.

이 중 안용복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一 安龍福 午歲四十三 冠ノヤウナル黒キ笠水精ノ緖 アサキ木綿ノウハキヲ着申候 腰ニ札ヲ壱ツ着ケ申候 表ニ通政太夫 安龍福 年甲午生 表ニ住東萊 印彫入印判小キ箱入 耳カキヤウジ小サキ箱ニ入 此弍色扇着ケ持申候

 안용복은 오세(午歲)의 43세이며, 관처럼 생긴 흑색 갓을 쓰고 수정의 끈, 연두색 목면의 상의를 착용, 허리에는 호패를 하나 차고 있었는데 표에  "통정대부(通政太夫), 안용복, 갑오년생(甲午年生), 동래(住東萊)에 거주, 인조인(印彫人)"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부채에는 작은 상자에 넣은 인판(印判), 그리고 귀 긁기 막대를 넣은 작은 상자를 달고 있었다. 이 2가지 색의 부채를 착용해 지니고 있었다.

 '通政太夫'라는 단어가 보이는 것으로 봐서 위조된 호패로 보이네요. 통정대부는 정3품의 고관입니다. 여하튼 이 호패는 위조된 것으로 보이므로 그렇게 믿을 만한 기록은 못되는 것 같네요.



 

此道中─→此途中 (강원도로 가는 도중에 ??????^^^^^) 이런 일본 측 왜곡해석의 진수는 제가 두고두고 써먹으려다, 위의 문서를 거론했으므로, 여기서 끝을 맺습니다. 안용복은 다음과 같이 발언하죠. '內'자가 너무도 선명하군요. 이런 짓을 언제까지 계속할지 궁금합니다.

松嶋ハ右同道之子山と申嶋御座候是ヲ松嶋と申由是も八道之圖記申候(송도는 위 팔도 가운데 자산이라는 섬이 있는데, 이것을 송도라고 한다. 팔도지도에 기록되어 있다.)


그럼, "안용복의 우산도"가 현재의 독도임을 증명해주는 자료를 살펴 보겠습니다.

1. 1877년 태정관의 지령서와 조선국교시말내탐서(1869~70년)

 이미 이전 글에서 언급했지만, 일본 태정관이 본방(일본)과 관련이 없다고 지령한 2섬은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입니다.

別紙內務省伺日本海內竹嶋外一嶋地籍編纂之件 右ハ元祿五年朝鮮人入嶋以來舊政府該國ト往復之末遂ニ本邦關係無之相聞候叚申立候上ハ伺之趣御聞置左之通御指令相成可然哉 此叚相伺候也

 분명 원록5년 안용복의 일로 인해 한일간 분쟁이 있었던 죽도1건에 대한 응답임을 밝히고 있고, 그 지령문중 일본과 관련이 없다는 지령에 외1도인 송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 태정관이 '시마네현'에서 올려 준 자료와 일본정부의 내무문건을 참조해 내린 공식 의견입니다.(태정관 문서의 외1도는 논평 A를 참조)

 일본의 외교문서 제3권에 실려있는 조선국교시말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에 역시 원록 년간의 일을 거론하면서 송도(독도)는 조선의 영토임을 밝히고 있죠. 이를 부정하기 위해서 일본 측에서는 애쓰고 있으나, 본문 내용상 죽도는 아르고노트가 될 수 없습니다. 분명한 울릉도에대한 설명으로 죽도를 기록하고 있죠.(자세한 것은 논평 B를 참조)

1877년  일본 태정관이 지령서를 내릴 당시 시마네현에서 제공한 자료 이외에 이와 같은 일본의 자료를 함께 참조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조선국교시말내탐서를 보고하도록 지시한 것이 일본 태정관이며, 그 확인자 또한 일본 태정관과 외무성입니다. 한 나라의 영토의 경계를 결정하면서, 이전의 이와 같은 자료를 참조하지 않고 대충 결정했을 리는 없죠.

 따라서 일본정부 최고 의결기관에서 이전 두 나라 사이의 분쟁이 있었던 '죽도 1건'에 울릉도와 더불어 송도가 포함되었음을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건 단순한 착오를 주장하기에는 너무나 분명한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표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만 가지고도 한국 측 주장이 옳다는 명백한 입증을 하기에 부족하지 않습니다.

2. 숙종실록의 사료적 가치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적으로 그 정확성과 객관성이 입증된 사료로,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된 사료입니다. 태종 4년, 사냥을 좋아하던 태종이 노루를 쫓다가 말에서 떨어진 일이 있었다고 하죠. 태종은 이 일을 사관이 알지 못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태종실록의 실제 기록을 보죠.

태종 4년 2월 8일條

親御弓矢, 馳馬射獐, 因馬仆而墜, 不傷。 顧左右曰: “勿令史官知之”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말라.”

 조선왕조실록을 기록하던 사관은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사실만을 기록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정보를 얻었는지 사관은 태종의 발언까지 정확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변사에서는 안용복뿐 아니라 동행했던 박어둔 이인성등의 심문도 함께 했으며, 모두 동일한 내용을 진술했습니다. 따라서 숙종실록에 안용복의 진술을 실어 놓은 것이죠. 만일 안용복이 거짓말을 했다고 판단이 되었다면, 조선정부에서 안용복을 참형에 처했거나 왕조실록에서 그 사실을 분명하게 언급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마도주의 흉계로부터 시작해 모든 사실이 안용복의 발언과 일치했으므로, 안용복은 참형을 면했으며, 숙종실록에서 그의 진술내용을 그대로 실어 놓은 것이죠.

 일본에서는 일본 측 자료상 숙종실록과 다소 다른 내용이 등장한다는 이유를 들어 숙종실록의 기록을 부정하고 있으며, 기록상 안용복의 진술은 거짓말이라고 하죠. 그러나 사료의 신빙성을 논한다면 일본 측 기록은 숙종실록에 크게 떨어집니다. 모두 민간의 기록에 불과하며, 어업적·상업적 이익에 관계하고 있던 돗토리번등의 기록이 대부분으로 그 객관성은 숙종실록에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안용복은 관직을 사칭하고 국경을 허락 없이 넘었다는 이유로 조선에서 죄인 취급을 받아 유배형에 처해집니다. 숙종실록은 그만큼 안용복의 일에 객관성을 유지하여 기록을 했을 가능성이 높죠.

 한국 측 기록과 상이한 내용이 몇몇 등장한다는 오카지마 마사요시의 "죽도고"를 그 예로 보죠. 여기서 그는 안용복일행이 다녀간 100여 년 후의 시점에서도 竹島가 일본령이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럼, 어느 사료가 더 신빙성이 있을까요? 이미 일본의 막부에서 조선령으로 인정한 공문까지 조선에 보낸 시점에서 竹島가 일본령이라 인식한 사서라면, 상당부분 왜곡된 사실이 실려있다고 보는 것이 당연합니다. 게다가 죽도고는 실제 사건이 일어난 120년 후에 쓰인 기록이죠. 책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그 신빙성이 전혀 없습니다. 돗토리번 주민의 어업적·상업적 이익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으로 보아도 저자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일정 사실을 왜곡해 기록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래 기사와 같이 조선인으로 인해 어업적 손실을 입었다는 기록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런 믿을 수 없는 기록을 근거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부정한다는 자체가 우스운 일이죠.

(元祿 )七年大谷九右衛門出府將軍綱吉ニ拜謁ス、是歲村川ハ人ヲ竹島ニ遣ル朝鮮人先ツ在リ漁獵ノ利ヲ失フ、

八年同斷朝鮮人先在リ重テ魚獵ノ利ヲ失フ、此ヨリ朝鮮人連年多人數航海我漁獵ノ妨ヲナセリ、於是事情ヲ幕府ニ啓シ其指揮ヲ請フタリ、

7년, 大谷九右衛門은 江戶에 가서 장군 綱吉을 배알했다. 이 해 村川은 사람을 竹島에 보냈는데 조선인이 먼저 와 있어 漁獵의 이익을 상실했다.

8년 同斷 조선인이 먼저 와 있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漁獵의 이익을 상실했다. 이로부터 조선인이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 척의 배를 끌고 와 우리의 漁獵에 방해가 되니 이에 사정을 막부에 고하여 그 조치를 청하였다.

 숙종 22년(1696년) 9월 25일조 기사에는 안용복이 일본으로의 제2차 도항을 하게 된 경위가 소개되어 있죠. 비변사의 심문내용에서의 안용복의 발언입니다. 이 기록 중 가장 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옵니다.
全文은
독도문서자료실

"뇌헌 등 여러 사람의 공사(供辭)도 대략 같았다.(雷憲等諸人 供辭略同 )"

 안용복의 발언은 그 일행 모두와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미운털이 박힌 안용복만 물고 늘어지지만, 안용복을 욕하려면 일행 전체를 욕해야 하며, 심문을 제대로 하지 않았던 비변사까지 탓해야 합니다. 또한, 거짓말을 했던 안용복의 일을 실록에까지 그대로 기록한 사관의 책임 또한 피할 수 없습니다. 곧, 숙종실록의 기록은 조선왕조 전체의 기록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합리적이죠.


3. 안용복 관련 기록에서의 "于山則倭所謂松島也。于山은 왜인이 말하는 松島이다"라는 기록 

 이 이외 안용복이 말하는 우산도가 당시 일본인이 독도를 호칭하던 송도라는 사실이 기록된 한국의 문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특히 안용복의 일화를 소개하는 기록이라면 어김없이 안용복이 말하는 우산도가 倭에서는 송도라는 사실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성호사설(1740년경 편찬, 李瀷), 증보문헌비고, 중정교린지의 기록과 만기요람 등 상상외로 많은 기록에서 같은 이야기가 거론되고 있어요. 송도가 당시 일본에서 독도를 부르는 호칭임이 분명한 이상, 안용복의 우산도는 현재의 독도가 됩니다.

 물론 숙종실록이나 '여지지(輿地志)'의 기록을 근간으로 그 후대의 서적에서 여기저기 인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이런 기록이 중요한 이유는 후대의 책 저자가 이 기록에 심각한 오류가 있었다면 (즉, '안용복의 우산도'가 倭에서 송도라고 부르는 섬이 아니라고 판단했다면), 그 기록의 오류를 주기하거나 기록에서 제외했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이 기록에 이의(異意)를 다는 기록은 하나도 없어요. 그건 숙종실록의 기록을 인정했다는 겁니다. 책을 쓸 당시의 인식 또한 다르지 않았음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흔히 만기요람등에서 언급된 기록이 여지지(輿地志)를 인용했음을 들어, 그 이후의 기록에서 언급한 여지지(17세기 중엽 편찬, 柳馨遠)가 현재 존재하지 않으니, 기록 모두를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을 하죠.

 그러나, 숙종실록 1714년(숙종 40) 7월 20일條에는 강원도 어사 조석명(趙錫命)의 영동 지방 해방에 관한 논의 중에 ‘울릉도의 동쪽으로 도서가 잇달아 왜(倭)의 지경과 접하게 된다(鬱陵之東 島嶼相望 接于倭境)’라고 쓰고 있습니다. 안용복의 활동 이후 울릉도와 일본 사이의 지리적 인식이 높아져 가고 있었다는 증거죠.

 18세기 중엽 신경준의 강계고(疆界考), 만기요람(萬機要覽), 한치윤의 해동역사(海東繹史,1823년), 증보문헌비고(1908년) 輿地考의 4가지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강계고(疆界考) 울릉도條

愚按輿地志云 一說于山鬱陵本一島 而考諸圖志二島也 一則倭所謂松島 而盖二島 俱是于山國也
필자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여지지에 이르길, "일설에 우산 울릉이 한 섬이다"라고도 한다. 그러나 여러 도지(圖志)를 살펴보면, 두 섬이다. 우산도는 왜인들이 송도라고 일컫는 섬으로서, 두 섬은 분명히 다른 섬이다. 이 우산과 울릉을 합쳐 우산국이라고 한다.

만기요람(萬機要覽) 軍政編四 해방(海防) 동해(東海)條

輿地志云 鬱陵于山皆于山國地, 于山則倭所謂松島也 
여지지(輿地志)에, ‘울릉ㆍ우산은 다 우산국(于山國) 땅이며, 이 우산을 왜인들은 송도(松島)라고 부른다. 

해동역사(海東繹史)

文獻備考云 鬱陵于山皆于山國地 于山島卽倭所謂松島也
문헌비고에 울릉 우산이 모두 우산국땅인데 우산도는 왜가 말하는 소위 송도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輿地考

輿地志云 鬱陵于山皆于山國地 于山則倭所謂松島也」「松島卽芋山島 爾不聞芋山亦我境乎
여지지(輿地志)에 이르길, 울릉과 우산은 모두 우산국지(于山國地)인데, 우산(于山)은 곧 왜(倭)가 말하는 바의 송도(松島)이다


 강계고를 저술한 신경준은 그후, 동국문헌비고 여지고에서도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를 해동역사에서 재인용하고 있죠. 따라서, 위 4기록에서의 원전(原傳)은 여지지(輿地志)가 됩니다.

실존하지 않는 여지지(輿地志)의 기록에 포함된 일도설(一島說)
 그런데, 여기서 강계고 울릉도조를 보면, 빠트릴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죠. 실존하지 않는 여지지(輿地志)의 기록에 관한 것입니다. 우산과 울릉이 두 섬이라는 2島說 뿐 아니라, 고려사지리지등에 언급된 一島說(울릉과 우산이 한 섬이라는)도 같이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록 당시의 인식에 맞는 여지지의 기록만을 채택
 신경준의 강계고에서는 분명하게 우산도가 왜인들이 송도라고 일컫는다는 말을 자신의 소견으로서 쓰고 있습니다. '
愚按'이라는 말은 자신의 소견을 밝힐 때 쓰는 단어죠.

 후대 특히 조선정부의 관찬기록인 만기요람(萬機要覽)이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서는 一島說에 대한 언급은 없고, 우산과 울릉이 2섬이며, 우산도는 왜인이 송도라고 한다는 여지지의 기록만을 주기 했습니다. 이런 조선의 인식은 앞서 살펴보았던 고종황제에까지 연결됩니다. 松竹島 라는 이름을 竹島로 오인한 외에는 동해에 울릉도와 더불어 2섬이 존재한다는 확실한 인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 만기요람의 기록은 독도문서자료실. 이곳을 클릭

 이로 보아 후대의 울릉도와 우산도를 거론한 기록은 책 저자의 면밀한 검토 후의 주기내용임을 알 수 있죠. 특히 만기요람은 왕명에 의해 편찬된 것으로서 통치자인 국왕이 보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며, 증보문헌비고는 조선왕조의 민족백과사전입니다. 일본 측 울릉도·독도관련 기록이 대부분 풍토기 정도의 일본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를 모아둔 기록이라는 점과 대조됩니다.

 이렇듯, 조선조 기록에서 인용한 사서인 '여지지'가 현존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후대의 이 책의 내용을 인용한 다른 기록을 모두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위에서 보았듯, 여지지의 기록 중 당시의 지리적 인식에 들어맞는 부분만 인용을 했기 때문이죠. 또한 그보다 이전의 숙종실록에 우산도가 송도라고 한다는 같은 내용이 기록되고 있다는 사실로 보아도 조선의 기록은 분명한 것이죠. 즉 한국기록 속의 于山島는 일본인이 당시 독도를 칭했던 松島입니다.

19세기 중엽 이규경이 저술한 울릉도사실변증설(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卷35)의 이 부분 기록을 하나 더 살펴보죠. 원문은 이곳을 클릭

倭人則稱松島 島在江原道蔚珍縣正東三百五十里(與日本之隱岐州相近 卽倭山陰道之隱岐州 隱岐四郡 亦一島居山陰道北 五穀乏 藻蜜多小 下國也 隱岐之旁 又有后烏羽 小島也) 三峰撑空 南峰稍卑 風便 二日可到(遠可七八百里自江陵三陟等地 登高望之 三峰 縹緲隱見 一作直三陟府)

왜인들이 松島라 칭하는 섬이 강원도 울진현에서 정 동쪽으로 3백 50리쯤 되는 거리에 있다. (이 울진현은 일본의 隱岐州와 서로 가까우니, 이는 곧 일본 山陰道의 은기주이다. 이 은기주 가운데 4군 또한 하나의 섬으로 되어 있는데, 이 섬은 산음도의 북쪽에 위치하여 오곡은 없고 海藻와 꿀이 많이 나는 곳으로 일본의 下國이다. 또 은기주의 곁에는 后烏羽라는 작은 섬이 있다.) 이곳에는 봉우리 세 개가 창공에 높이 솟아 있는데, 그 중 남쪽 봉우리가 약간 낮으며, 풍세가 좋으면 이틀에 당도할 수 있다.(이 세 봉과의 거리는 울진현에서 7~8백 리쯤 되는데, 江陵·三陟등지에서 높은 곳에 올라 바라보면 세 봉이 아스라하게 보인다. 어떤 데는 이 곳을 삼척부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보통 일본 측에서는 이 글에서의 松島는 울릉도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앞에 송도라는 섬을 제시하고 울진현에서 이틀이면 당도할 수 있으며, 이어 삼척이나 강릉에서 3봉우리가 보인다는 설명이 등장한다는 것이죠.

 분명, 여기까지만 보면 松島가 울릉도에 대한 설명인지 독도에 대한 설명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350里면, 대략 140km가 돼, 울진현에서 울릉도까지의 거리와 거의 일치합니다. 그러나 뒤에 이어서 울진현에서 7~8백 리(280~320km)쯤 된다는 설명으로 송도가 울릉도가 아닌 독도임을 명확히 재설명하고 있죠. 정확한 울진~독도까지의 실제거리는 약 216.8㎞로 울릉도가 아닌 독도에대한 설명인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 기록은 저도 굉장히 혼동되는데, 아마도 앞서 송도가 울진현에서 350리 정도 된다는 기록은 울릉全島에 대한 기록이고 실재 송도는 뒷부분 7~8백里로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네요. 강릉이나 삼척에서 3봉우리가 보인다는 설명은 엄연히 저자의 오해에 불과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아마도 울릉도에 대한 기록을 松島에 대한 설명으로 착각한 것이 아닌가 보입니다. 이규경은 울릉도 이외에 松島인 우산도가 울진현에서 7~8백리정도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 섬에 관한 정확한 정보는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럼, 이 기록상 松島는 어떤 섬일까요?

 그의 글에서 울릉도는 직접적으로 鬱陵島나 羽陵島(우릉도)로 나오고, 지봉유설을 인용하면서 所謂礒竹島 實我國之鬱陵島也 라고 해서 倭人은 울릉도를  의죽도(礒竹島)라고 불렀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松島는 울릉도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게 밝혀집니다. 倭에서 울릉도를 일컫는 분명한 섬 명칭이 등장하기 때문이죠. 어느 섬일까요?,
아래 이어 안용복의 일을 거론하면서, "龍福曰 松島本我芋山島(松島는 본디 우리 나라 芋山島이다)"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규경이 앞서 거론한 "倭人則稱松島 島在江原道蔚珍縣正東三百五十里"에서의 송도는 울릉도가 아닌 芋山島 즉, 독도임이 분명해지는 거죠.  

또한가지 여기서 우리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기록 바로 위에서

"輿地圖 鬱陵 未及畵于山島 而或畵一島于鬱陵上頭 稱于山('輿地圖'의 鬱陵 조에 의하면, 于山島는 따로이 그리지 않거나 혹은 어떤 섬 하나를 울릉의 위쪽에 그린 것을 于山이라 칭하였다.)" 하고 있습니다.(당시에 于山과 芋山은 구별하지 않고 썼습니다. 于山 = 芋山.)

 울릉도 이외에 于山島라는 섬이 하나 있으며 우산도는 따로이 그리지 않거나 어떤 섬 하나를 울릉도의 위쪽에 그렸다고 합니다. 이 구절이 왜 중요할까요. 한국의 古地圖상에 울릉도의 좌우 상하에 등장하는 우산도가 바로 왜인들이 송도라고 부르던 독도였다는 것입니다. 이미 제가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 조선중기까지의 지도에서는 우산도의 위치관계를 중요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한국 고지도속 우산도는 이곳을 클릭

 언제나 어떤 글을 대할 때,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글을 함께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보통 일본 측에서는 단문을 들어서 본래 저자의 뜻을 왜곡하는 일이 많죠. 안용복의 일을 들어 松島 = 于山島임을 밝히고 있는데, 위 글에서의 松島가 울릉도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울릉도를 부르는 일본식 호칭까지 松島가 아닌 礒竹島로 거론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 이규경은 울릉도가 어느 섬인지는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으나 松島(于山,芋山)가 어떤 섬인지는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직접 實査를 하지 않고, 각종 서적을 참고하는 과정에서 생긴 혼동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안용복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조선의 영토임을 밝히고 있음은 부인할 수가 없죠.

마침 일본웹사이트에서 이에 관련된 일본 측 주장을 접해 덧붙여 놓습니다.


4. 죽도 도해 금지와 일본의 독도 명칭 혼동과의 관련성

 1618년(최근 1625년으로 수정) 죽도 도해면허와 1661년 송도 도해면허를 오다니와 무라까와 두 가문에서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받아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독점적 어업권을 행사하게 됩니다. 이에 관해서는 제 이전 글에 자세한 언급이 있으니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이곳을 클릭.

그 이후, 안용복의 활동을 계기로 두 나라 사이의 교섭이 시작되었고, 죽도는 조선령임을 인정하는 일본 측 공문서가 조선에 전달되며, 1696년 1월 28일 일본 막부가 죽도 도해 금지령을 내림으로써 두 나라 사이의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 분쟁이 마무리됩니다.

 일본 측에서는 '죽도 1건'에 송도가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죽도 도항 금지는 있었으나, 독도인 송도에 대한 도항은 금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하나 발견되죠. 메이지 시기 울릉도뿐 아니라 독도에 대한 명칭혼동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일본 측 이야기대로 울릉도 이외에 독도에 가는 것을 막부에서 금지하지 않았다면, 이런 혼동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죠. 자신들이 언제나 가볼 수 있는 섬인데, 섬의 명칭 상의 혼동이 올 수는 없습니다. 죽도 도항 금지 이후, 1800년대 중반까지 약 150여 년 이상을 울릉도와 아울러 독도에 가보지 못했기에, 섬의 명칭 상의 혼동이 가능했던 겁니다. 그러므로 '죽도 1건'에 송도인 독도 역시 함께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일본의 독도 명칭 혼동으로 엿볼 수 있게 됩니다. 메이지 시기 다음 기록을 하나 살펴보죠. 인용된 기록은 죽도고증(下)의 기록입니다.

不省敬義、兒タリシ時嘗テ聞ク、隱崎國ヲ距ル殆ト七十里程之乾ニ當リ洋中荒蕪不毛之一孤島ヨリ之ヲ竹島ト稱スト、敬義稍稍人トナリ賤家ニ昔在ヨリ貯フ處之一小冊其ノ題表竹島渡海記ト號スル者ヲ見タリキ

不省한 본인 敬義가 어렸을 때 일찍이 듣기로 隱岐國에서 약 70리 정도 떨어진 서북쪽의 바다 가운데에 거칠고 황량하며 풀 한 조각 없는 孤島가 하나 있어 그를 竹島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敬義가 점점 어른이 되어 미천한 저희 집에 이전부터 모아놓았던 것 중 한 작은 책으로 그 제목이 竹島渡海記라고 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자료는 야우에몽(八右衛門)이 울릉도에 갔다가 처형당한 후 40년이 지난 뒤에 일본에서 막부가 붕괴되고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정권이 수립되어 대외팽창을 고취하자 토다 다카요시(戶田敬義)라는 사무라이가 1878년 1월 ‘竹島渡海’의 허가원을 도쿄부(東京府)에 제출한 자료의 앞부분 글입니다.

이 글에서의 竹島라는 명칭은 분명한 울릉도를 뜻합니다.(나머지 글을 보면 분명해지죠.) 그러나 그는 은기국 약 70리 정도 떨어진 서북쪽 바다 가운데에 거칠고 황량하며 풀 한 조각 없는 고도가 있다고 합니다. 은기국에서 70리 정도 떨어졌다면 그건 독도입니다. 울릉도는 독도와 다르게 푸른 섬이죠. 나무가 많기로 유명했습니다.

기죽도 약도에는 오키시마~松島(독도)의 거리가 80리로 나오고, 竹島考圖說의 竹島·松島之圖에는 70里로 나와 있습니다. 분명 독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戶田敬義는 竹島(울릉도)라는 명칭으로, 독도인 松島의 기술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당시 일본에서는 울릉도와 그 주위 섬에 대한 지리적 모호성이 존재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그의 발언으로 유추하건대, 독도에 일본인이 가지 못한 것이 꽤 오래 되었다는 사실이죠. 독도에 대한 명칭혼동이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용복 활동 이후의 '죽도도항금지'에는 송도가 포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戶田敬義은 이후 같은 해, 3월 또 한 번 죽도(울릉도)도해 신청을 하지만, 도쿄부로터 "書面의 竹島 도항원은 들어주기 어렵다"는 거부 결정 통고서를 받게 됩니다.

 자신의 나라 섬의 이름을 다른나라의 잘못된 지리적 인식에 맞추어 바꾸는 나라는 없습니다. 일본에서 울릉도와 독도의 명칭혼동이 존재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에도시기의 죽도1건에는 송도가 포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용복의 활동 이후, 일본인은 독도에 가지 못했던 것입니다.(물론, 막부의 명을 어기고 목숨을 걸고 불법어로를 한 사람들은 있었죠.)


일본분야도(日本分野圖)

아래의 지도는 일본분야도(日本分野圖, 1754, 森幸安)입니다. 그동안 게을러서 미처 올리지 못했던 자료를 이 논평부분에서 종종 올리도록 하겠습니다.(클릭)

 일본 국립공문서관 소장 지도입니다. 설명에는 단순히 竹島의 기재가 있다는 정도로 간단하게 竹島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주기 내용을 볼까요?

此溱デ天気ヲ見立テ竹島ヘノル(이 진(오키)에서 날씨를 살펴 죽도에 간다.)

 주기한 기록으로 보아서는 울릉도가 맞습니다. 독도는 오키시마에서 보이지 않죠. 이 주기만 없었다면 엄청 좋을 뻔 했습니다. 일본의 모든 섬에 채색이 되어 있는 반면, 竹島에는 한반도와 같이 채색을 하지 않음으로써, 한국의 영토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지도상 경위도선이 그려져 있습니다. 죽도 바로 위의 선이 북위 38도 선이므로 죽도의 위도상으로는 울릉도에 가깝습니다. (독도의 위도는 북위 37°14′26.8″) 그러나 竹島는 오키도의 일직선상 바로 위에 위치하고 있어 경도상으로는 현재의 울릉도로 보기에는 너무 큰 차이가 납니다. 게다가 섬의 크기 또한 울릉도보다 터무니없이 작아 독도에 가깝죠. 

그러나, 18세기 울릉도의 일본에서의 명칭이 竹島인 것은 틀림없고, 주기한 내용으로 보아 울릉도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단지, 지도제작자가 독도를 실제로 목격하고, 그 섬이 울릉도인 竹島로 착각해 지도에 그려 넣었을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죽도송도지도(竹島・松島之圖, 1724년)

 죽도고도설(竹島考圖說)의 죽도·송도지도(竹島·松島之圖)는 그동안 상세화면을 대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다케시마 연구회'에서 공개를 했군요.(공개한 것은 아니군요. 이지도는 이미 공개되어 있어 올려드립니다.)

竹島~松島 사이의 거리가 40里, 오키~松島 사이의 거리를 70里로 표기했습니다.
현재 죽도(Chukdo)로 보이는 섬을
イガ島(이가시마)로 표기했고, 관음도로 보이는 섬을 (間의 간체자)島 로 표기해놓았습니다. 좌측 바위섬에  '唐(光의 이체자)'라고 쓰여 있네요. 그당시 기록에 울릉도 당선기(唐船崎)에 왜선을 정박했다는 일본 측 기록으로 보아 선박의 정박장소임이 분명하네요.
※ 돗토리번의 고지도에 위치는 많이 어긋났지만 間島라는 명칭이 등장합니다. 이 섬과 같은 섬인 관음도의 명칭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돗토리번의 고지도에는 죽도(Jukdo)로 추정되는 섬에 (まの島 ; 한자표기로 間の島)마노시마 라는 같은 명칭이 등장해 정확히 이 섬이 관음도인지 죽도(Jukdo)인지 혼동됩니다. 죽도·송도지도에는 두 섬이 모두 표기가 되어 있어 명확히 구분이 되는 것으로 보아 이 지도의 명칭이 정확한 것으로 보입니다.

 
죽도고도설에 쓰여진 이 지도의 설명을 보면,

"右ニ拳ル圖ハ享保中從幕府竹島ノ地理物産竝往年彼地ヲ朝鮮ヘ奪掠サシ始末御穿鑿ノ有ケルキ大谷村川ガ両家ヨリ差上ル処ノ圖ヲ新ニ縮圖セルモノ也(위의 권도(拳圖)는 향보(享保)중에 막부가 竹島의 지리 물산(地理物産)과 아울러 지난 해에 그땅을 조선에 빼앗긴 시말(始末)을 연구하는데 있어 오다니·무리카와 가문에서 올린 지도를 새로이 축소도로 만들게 한 것이다.)"

라고 하여 이 지도가 오오야·무라카와(大谷·村川) 두 가문에서 죽도도해면허를 얻어 두 섬에서 어업을 할 때 작성한 지도가 원도(原圖)임을 알 수 있죠. 이 글에서는 竹島를 조선에 빼앗겼다고 주장하는군요. 그러나, 이와는 달리 에도막부는 죽도도해금지 이후, 竹島에 가는 일본인을 철저히 단속했으며, '죽도1건'에서 조선에 보낸 공문을 보면, 竹島를 빼앗겼다는 죽도고도설의 기술내용과는 동떨어진 내용이 등장합니다.
에도막부가 조선정부에 보낸 공문은 독도 문서자료실 숙종실록과 도쿠가와막부시기의 기록 02를 참조

 일본 측에서 이 지도를 근거로 송도(松島, 독도)를 에도시기 실효지배했다고 주장하죠. 이 상세도에는 현재 독도의 동도(東島)에 오두막을 그려 넣어 배가 도착하는 장소를 표시해 두었다고 합니다.

1. 이 당시만 해도 일본에서는 이렇게 2섬에 대한 분명한 지리적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섬의 명칭이 뒤바뀌죠. 그렇다면, 죽도도해금지에 송도까지 포함되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죽도도해금지 이후, 송도(독도)에 가지 못했기에, 명칭상의 혼동이 있었던 거죠.

2. 이 지도의 이름을 보죠. 竹島·松島之圖
지도에는 분명 오키도까지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왜 隱岐·
松島之圖 라고 하지 않고 竹島·松島之圖라고 했을까요?
바로 독도인 송도는 죽도(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죽도도해금지를 했다면 마땅히 송도가 포함되는 이유입니다.
이 지도를 근거로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한다면, 울릉도에 대한 영유권까지 주장해야 하는 겁니다. 죽도는 항상 송도와 하나로 묶어 생각을 했습니다. 竹島를 포기했다면 松島 역시 포기한 것이죠.

3. 자신의 정부가 조선령으로 인정한 죽도와 송도에서 그 이전 어로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실효지배했음을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남의 나라 영토에 가서 어로활동을 한 일련의 행위가 실효지배의 요건을 충족시킬 수는 없죠.


결어 

독도에 대한 한일 간 분쟁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몇 꼽는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안용복의 활동을 전후한 시기, 2.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전후해서 시마네현 고시가 나오기까지의 기간 3. 광복 후부터 샌프란시스코 대일강화조약 체결을 전후한 시기

 이중 한일 영유권 주장에서 어느 나라에 독도에 대한 역사적인 권원(title)이 존재하는지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시기가 바로 안용복의 활동을 전후한 시기입니다. 안용복의 활동이 인정된다면, 일본의 시마네현고시는 침략으로 낙인찍히게 되죠. 그래서 일본 측은 안용복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고자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료상 그의 숙종실록의 발언은 너무도 명백하게 증명되고 있습니다. 특히 새로 발견된 오키섬의 '안용복 일행 조사보고서'는 숙종실록의 안용복의 발언이 모두 진실임을 명확히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이 조사서를 작성한 사람이 일본 오키시마의 관리(막부 관할)라는 점에서도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이죠. 안용복은 월경의 죄와 관직을 사칭했다는 죄로 유배형을 받았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한국인에게 너무도 큰 선물을 안겨준 영웅이었습니다. 그가 있었기에 독도뿐 아니라 울릉도를 지킬 수 있었으며, 일본의 영토침탈을 사전에 방지하여 한일 두 나라 사이의 평화를 지켜 냈습니다. 그뿐 아니라 조선에서는 그의 활동으로 인해 그후 울릉도를 포함한 그 주위 섬들에 대한 지리적 인식이 높아졌으며, 대한제국 칙령에 독도(石島)를 포함시키는 개가를 이루게 됩니다. 안용복 장군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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